최초의 근대적 잡지  <소년>을 창간하고  
한국근대시사에서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중 한사람,
이광수, 홍명희와 함께 조선의 3대천재로 대표되던 사람, 
3.1만세 운동때 독립선언문을 기초하여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공약3장의 글귀를 지은 민족대표 48인중 한사람.....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한 사람,,  육당 최남선(1890~1957)  

 이런 사람이 왜 친일활동을 하게되었을까? 

3.1운동으로 투옥되고 3년수감생활후 석방된 이후 계속된 일본의 감시,규제를 받아 친일의 길을 걸었다고 알려져있다.



1928년 조선총동부의 조선사편수회(역사왜곡기관) 편수위원직으로 본격적인 친일행위를 하며 친일파 꼬리표를 달며 지탄받기 시작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다. 

 친일 논란을 불러온 육당의 행적은 크게 두 가지다.
일제가 만든 ‘조선사편수회(식민지정책에서 생긴 한국사 연구기구) 참여와 중추원 참의를 지낸 것.....  

'만몽일보(滿蒙日報)' 고문으로 있다가 1939년 일본 관동군이 세운 만주 건국대학 교수가 되었고, 귀국 후 1943년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고하는 강연을 하기 위하여 도쿄로 건너갔다.  이렇듯. 일본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선전하는 언론활동을 한 최남선.......

광복 후 서울 우이동 자택에 은거, 역사논문 집필에 전념하다가 친일의 죄목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반민족행위처벌법)로 기소되어 서대문형무소에 1949년 수감되었으나 병보석되었다. 6.25전쟁 때 해군전사편찬위원회 촉탁이 되었다가 서울시사(市史)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그 후 국사관계 저술을 하다가 뇌일혈로 작고했다.  

전체적으로 그의 일생을 보면 그는 계몽운동자? 문화운동가? 문학, 문화, 언론등 다방면의 분야에서 활동한 사람.....이라고
그는 정말 친일파가 아닐까?

왜 난 최남선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자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가 떠오르는 이유는 무얼까?? 

국토는 일시적으로 빼앗겼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민족의 혼을 불어일으킬 봄은 절대로 빼앗길 수 없다는 몸부림,,,,,,, 

민족의 아픔과 슬픔,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아주 짙게 담아내고 있는 이 시가 자꾸 생각나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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