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순직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의사의 마지막 유언 -  
   

안중근<安重根> 1879~1910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고, 가슴과배에 있는 7개의 점때문에 아명은 '응칠'이다.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면서 도마(Thomas토마스)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된후 이듬해 전재산을 들여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하며 
인재양성에 힘썼다.
이후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이 일제로 부터 강제퇴위당하고, 정미7조약을 강제체결하여 군대해산, 식민지화에
본격적인 박찰을 가하자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그동안의 계몽운동에서 독립전쟁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1908년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참모중장이 되어 의병부대를 이끌며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09년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동맹을 맺는다.  
그러던중 1909년 이토히로부미가 러시아  코코프체프와 회담을 위해 만주 하얼빈으로 오자
안중근은 우리나라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뤼순감옥에 수감되고 그 이듬해인 1910년 3월 사형, 순국하였다.  
재판과정에서 판사,검사,변호사,통역관,방청인이모두 일본인이었던 형식적인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감옥에서 안중근은 자서전<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 거사이유를 밝힌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였다. 
<동양평화론>의 저술이 끝날때까지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줄것을 요구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한 일본....  

안중근의사가 처단한 이토 히로부미는 누군가?

일본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인물, 일본 전 총리, 초대 조선 통감 , 한국 식민지화의 원흉’ vs ‘일본 근대화의 원훈의 두얼굴, 
 공갈 대마왕, 협박의 국가대표급선수, 늙은 염소,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인간,  
한국통감 재직 중 순종으로부터 ‘친왕(親王)’의 예우를 받은 인간, 
1963년부터 1984년까지 21년간,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1천엔권 지폐인물  .......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이토 히로부미... 

 책 소개글을 보자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써내려간 기록 덕분에 우리는 그의 영웅적 행위뿐만 아니라 더욱 총체적이고 다면적인 그의 모습을 조명할 수 있다. 또한 그간의 많은 연구 성과들은 엄밀하게 사실을 파헤치며 실제를 규명하는 실증적 접근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안중근 평전>은 이러한 자료들을 집대성하여 안중근의 어린 시절부터 성장 과정, 이토 저격 사건의 전말 및 재판 과정, 그리고 그의 사후에 벌어진 일들까지를 오롯이 그려내며 안중근을 이해하는 정전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이번 <안중근 평전>에서는 그간 이견이 있거나 사실 확인이 덜 된 부분들을 하나하나 비교, 분석해가며 안중근의 행적을 찬찬히 짚어보았다. 이는 안중근의 영웅성을 부인하는 작업이 아니라 엄밀한 사실을 규명함으로써 실제의 안중근에 보다 적극적으로 다가가려는 기획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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