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 (李滉, 1501~1570)은 '동방의 주자' 라고 추앙되고 있다. 우리나라 화폐 천원권의 인물이기도 하다.  

경상도 예안 온계리(지금의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에서 출생한 이황은, 12살이 되던 해에 숙부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우기 시작하며 학문에 입문,.20세경 침식을 잊고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뒤로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한다. 22 세에는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했다. 33 세에 과거에 급제한 퇴계는 호조좌랑,정언, 승문원교리 등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쳤다
을사사화 후 병약을 구실삼아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1546)가 되던 해 향토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60세(1560)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한국의 성리학(유학)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주자의 이기이원론적 사상 및 영남학파의 창시자인 이언적의 주리설을 계승하여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성리학은 송나라 때 주희가 집대성한 것으로, 우주와 인간의 근본 문제를탐구하는 유학이며 우리 나라에는 고려 말에 들어왔다.16세기 당시 성리학은 경험적 세계를 중요시하는 주기론(主氣論)과, 도덕적 원리와 그 실천을 강조하는 주리론(主理論) 등 두 가지 계통으로 발전했다. 퇴계는 주리론을 계승ㆍ발전시켰으며, '군자'나 '성인' 등 참된 인간이되기 위해 학문을 연구했다. 그래서 퇴계는 항상 제자들에게 "글을 배우는까닭은 마음을 바르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출처 <문화재청>

퇴계는 평소에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거두어 정돈하고 머리 빗고 옷과 관을 가지런히 갖추어 입고는 단정히 앉아서 글을 읽었다. 그의 어머니는 항상"문예에만 힘쓰지 말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며, 현감 이상은 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자제하고 겸손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이 책은 2008년에 첫 번역 출간된 『퇴계 이황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 개정판. 

초판 이후 추가로 발굴된 관련 도서들을 참고하여 내용을 대폭 보강하고 문맥을 쉬운 표현으로 바꾸어 독자들의 이해를 높였다. 가족과 친척, 친구, 관계(官界) 인사 등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해를 돕기 위해 퇴계의 가계와 교우관계에 대한 해설을 부록으로 덧붙였다. 

퇴계 이황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둘째 아들 채(寀)는 나자마자 곧 생모(生母)를 사별하고, 커서는 의령에 있는 작은 외할아버지-외종조부- 댁에 보내 놓고 있었다. 그 집에서 장가도 들었으나 곧 자식도 없이 죽어 거기서 묻히게 되었고, 큰아들 준(寯.1523-1584))은 17세 때부터 집을 떠나 살았다. 

퇴계는  옆에 두고 지켜볼 수 없는 아들에게 보내는 부정(父情),그리움과 안타까움을 편지에 담아 보냈다. 큰아들 준은 도산과 가까운 예안의 외내(烏川) 마을에 사는 금재(琴?)라는 이의 딸에게 장가를 가서 10여 년 이상 처가살이를 하였다. 가난했던 퇴계는 결혼한 아들이 처가살이 하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그 시절 보낸 편지에는 아픔과 동시에 선비의 기운이 묻어난다.
이번 책에 수록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퇴계가 40세가 되던 해 쓰기 시작한 것들이다. 불행하게도 17세 때 처가살이로 집을 떠난 아들 준과 퇴계는 그 이후로도 계속 떨어져 살아야 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퇴계가 서울로 올라가 벼슬을 했고, 반대로 퇴계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아들이 벼슬길에 올라 경주 서울 등으로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들과 오래 떨어져 있었던 탓에 퇴계는 아들의 교육 문제를 늘 걱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편지에는 유독 공부에 대한 내용이 많다 

퇴계는 생전 아들 준에게 613통, 손자 안도에게 125통의 편지를 썼다. 퇴계는 아들과 손자들에게 틈틈이 편지를 보내 공부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아들과 손자, 후손에게 무려 1300여통의 편지를 썼다.
이 책을 보면 퇴계 선생이 40세 때부터 17살로 처가에 가서 살고 있는 이 맏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 다음은 퇴계가 서울에 올라가서 조정에서 벼슬살이하면서 외내로 보낸 편지들, 풍기군수로 근무할 때 보낸 것들, 또 퇴계가 고향에 돌아와 있을 때에 이 맏아들이 반대로 벼슬하여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참봉(參奉)이나, 서울의 제용감(濟用監) 같은 곳에 근무할 때 보낸 편지들이 차례로 나온다.  
편지는 퇴계가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한 뒤 풍기 군수를 지내던 시절, 퇴계가 고향으로 돌아온 뒤 아들이 벼슬을 시작해 떨어져 있던 때까지 1540년부터 15년간 이어진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출처 문화재청>

 

퇴계 이황은 ‘자녀교육의 대가’였다.
퇴계는 공부하는 법에서 시시콜콜한 대인관계에 이르기까지 선비가 지녀야 할 모든 덕목을 편지로 가르쳤다.  편지는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때보다 감정을 순화시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교육적인 효과가 훨씬 크다고 한다. 아무래도 화가 날 때 얼굴을 보고 말하면 감정이 그대로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자녀 간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한다면 결코 좋은 장면이 아닐 것이다.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이용할 경우 가족 간의 대화의 장벽을 허무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퇴계는 편지에서 선비로서 인품과 교양을 갖추라는 당부하고, 씨를 뿌리는 일이나 종들을 관리하는 일, 세금을 내는 일 등 살림살이를 챙기는 모습에서 그의 꼼꼼함이 느껴지며, 손자에게 어떤 책을 읽히고 어떤 글씨체를 쓰도록 하라던지, 친척들 사이에서 재산 분쟁이 생겼을 때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도 자세히 이르고 있다. 편지를 읽다보면 그동안 알려졌던 학자의 모습보다는 자상한 아버지와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며 세심한 배려를 하는 생활인로서의 퇴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아픈 아들을 걱정하는 글에서는 아버지로서의 따스한 사랑이 묻어난다. 이처럼 여느부모처럼 자녀교육에 노심초사하며 공부법,재산관리,인간관계등 자녀앞날에 필요한 교육을 열정적으로 시킨사람이다. 


140번이나 넘게 공직의 부름을 받았던 대학자이지만  자녀뿐 아니라 먼 친인척의 자제들,제자들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퇴계는 추석 등 명절을 맞아 아들과 손자, 며느리와 손부 등 일가 후손들이 선물을 보내오면 반드시 답례와 함께 편지를 보냈다. 특히 며느리에게 참빗을 선물하는 퇴계를 떠올리면 절로 미소 짓게 한다. 퇴계는 며느리에게 귀걸이를 선물하기도 했다. 윗사람이라고 해서 받으려고만 해선 존경받을 수 없다. 가족이나 일가친척끼리도 좋은 인간관계는 베푸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좋은 친구와 함께 지내며 학문을 닦는 것을 중시했던 퇴계는 아들과 손자, 조카뿐만 아니라 형의 외손, 질녀, 형의 사위, 형의 손자, 조카 등 그가 돌본 후손은 무려 90명이나 됐다. 

퇴계는 300여명이 넘는 수제자를 길러냈다. 퇴계로부터 직접 배운 제자명단인 '도산급문제현록'에는 368명이 기라성처럼 올라 있다. 이들 대다수가 당대의 대표학자이거나 문장가, 삼정승과 같은 정치가로 이름을 남겼다. 퇴계 성리학이 길러낸 금지옥엽들이었다. 학문이 깊고 똑똑한 제자가 있으면 아들과 손자, 다른 제자들에게 소개해주고 함께 공부하게 했다. 학문하는 사람은 좋은 벗을 얻어야 서로 도움을 주고 더욱 학문에 매진할 수 있다며 벗을 맺는 일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퇴계가 함께 공부하라고 권한 김성일과 우성전은 훗날 대학자가 되었다.
퇴계는 또한 문하의 제자 대하기를 마치 붕우(朋友) 대하듯 했다. 비록 젊은이라도 이름을 버리고 '너'라고 호칭하지 않았다. 아무리 지체가 낮고 어린 자라도 소홀히 대접하지 않았다. 맞이하고 보낼 때는 예절을 차려서 공경함을 다하였다. 자리에 좌정(坐定)하면 반드시 먼저 부형의 안부를 물었다. 대화를 나눌 때도 반드시 상대방의 말이 끝난 다음, 천천히 한 마디 말로 이를 분석하여 가리었다. 그러나 반드시 그것이 옳다고 하지는 않고, 다만 "내 생각은 이런데 어떤지 모르겠다"고만 했다.

퇴계의 양대 제자로 일컫는 학봉과 서애는 우뚝한 학문과 벼슬로 업적을 남겼고, 이 문중은 안동의 대표적 명문가로 손꼽힌다. 이런 제자 수백을 길러낸 스승으로서의 퇴계의 권위는 지금까지도 독보적인 것이다. 퇴계종가가 '명가 중의 명가'로 대접받는 이유이며, "경상감사보다 퇴계종손 자리가 낫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퇴계가 70세를 일기로 작고하던 해인 1570년 12월4일,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키고,일으켜 달라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簀: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조카 영에게 받아쓰게 한 유언장은 국장(國葬)을 치르지도 말고, 값비싼 유밀과(油蜜果)는 물론 비석도 쓰지 말고, 작은 돌에다 앞면에는 단지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퇴도 만은 진성이공지묘·사진)라 쓰게 할 정도로 극도로 간소하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 퇴계 선생이라면 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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