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초때문에 일어난 사화라고 하여 사화(史禍)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 학파의 대립, 권력쟁탈로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은 네 가지 큰 사건이다.  

사화(士禍)는 말 그대로 선비(사대부)들이 입은 참화다. 조선시대 4대 사화라면 연산군 4년(1498년) 때의 무오사화, 10년 때의 갑자사화, 중종조의 기묘사화, 13대 명종(재위 1545~1567) 즉위년에 일어난 을사사화를 가리킨다.  

무오사화는 사림(‘사대부의 숲’이라는 뜻)파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춘추관 사관으로 있을 때 훈구대신 이극돈 등의 비행을 사초에 넣고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삽입한 게 발단이 됐다. 김종직 일파와 대립했던 이극돈, 유자광 등이 <성종실록> 편찬 때 조의제문이 단종한테서 왕위를 빼앗은 세조를 비방한 것이라며 연산군에 고하고 처벌을 부추겼다.  

갑자사화는 어머니 폐비 윤씨 사건과 관련한 연산군의 무차별 보복극?

기묘사화는 유교적 도덕정치를 지향한 조광조 등이 남발된 훈구대신들의 공훈 삭제를 감행한 데 대한 대신과 국왕의 반격 모양새를 띠고 있다.  

을사사화는 대윤, 소윤으로 갈라진 문정왕후 외척간의 권력투쟁이었다.

수십, 수백명에 이르는 피화자들은 다수가 사사, 주살 등의 형태로 사형당하거나 고문당하고 유배됐으며, 무덤에서 주검을 꺼내 목을 베는 부관참시도 드물지 않았고 가족, 친척, 친구, 제자들도 연루돼 맞아죽거나 노비가 되고, 유배당하는 참혹한 화를 당했다.   

사화는  원인과 사정은 각각 다르다 하여도 본질적으로 그것은 신·구세력 간의 대립이고, 진보와 보수세력 간의 투쟁이었다

조선왕조시대 사회분열과 갈등은 선비들의 권력대립에서 비롯되었다. 중앙의 정계를 무대로 정치지향의 선비들은 대립을 일삼았고, 정쟁을 일으켰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가 일어나 선비들은 큰 화를 입었다. 동서분당에서 남인 북인 노론 소론으로 갈라져 국력을 소진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선비들의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을 경계한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의 조선 4대 사화는 정치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의 극명한 현실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가 주는 교훈은 우리의 현실에도 큰 영향을 준다. 조선의 4대 사화는 조선 시대의 특별한 현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한다.  

 

----------------------------------------------------------------------------------------------------------------

   

 핏빛 조선4대 사화 첫번째 무오사화 

무오사화를  정의하면 

연산군 4년(1498) 김일손(金馹孫) 등의 신진사림(新進士林)이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정치적으로 몰려난 사건이다.   

사림파를 옹호하던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훈구파의 사림파에 대한 감정은 폭발하여 1498년(연산 4)의 무오사화가 발생하였다

성종때 김종직(金宗直)을 중심으로 정계에 새롭게 진출한 사림파는 3사의 언론직 및 사관직을 독점하면서 훈구파의 비행을 폭로·규탄하고, 연산군의 향락을 비판하면서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였다.  

한편 훈구파는 사림파의 이러한 행동에 불만을 갖고, 사림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여 연산군 이후 그 대립이 표면화된다. 그 직접적인 발단은 사관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싫은 것을 빌미로 이극돈, 유자광등이 연산군을 충동질한다. 이는 수많은 선비들의 목숨을 앗아간 「무오사화」의 시작이다.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도 사관 김일손(金馹孫)의 붓끝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수록했다. 단종을 의제에, 세조를 항우에 비유하여 세조의 찬탈 행위를 단죄하려 했다. 실록 편찬을 책임졌던 권신 이극돈(李克墩, 1435~1503)이 그 내용을 발견하여 연산군에게 고하면서 참극이 일어난다. 김일손은 처형되고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게 된다. 겉으로는 김일손의 세조 비판을 문제 삼았지만, 이극돈은 권력을 휘두른 자신의 행적이 김일손에 의해 비판적으로 기록된 것에 앙심을 품었던 것이다

이 사화로 사림들이 대대적으로 화를 입고, 정국은 훈척계열이 주도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이 사화의 처리과정은 연산군이 주도적 입장에서 처리해나감으로써, 대신과 언론의 통제와 강압이 이루어져 그의 전제적 성향은 점차 노골화되었다.
  

조선 시대 최초의 사화를 다룬 『무오사화』에서는 이와 같은 당쟁 속 조정의 분위기와 사회 변화를 다루고, 당시 정계에서 활약한 인물들의 생애와 일화를 집중 조명한다. 양반 계급 사이에서 여러 파벌이 생기고 차츰 반목하게 되자 정치 기장은 약해지고 사족들은 정치를 자기의 당파 자리를 확고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는다. 이러한 분위기는 연산군이라는 극단적인 성격의 왕의 시대에서 셀 수 없는 희생자를 만들게 된다.
 

---------------------------------------------------------------------------------------------------------------- 

 

핏빛 조선4대 사화 두번째 갑자사화 
 

갑자사화를 정의하면 

  1504년(연산군 10) 갑자년에 연산군의 생모인 성종비 윤씨의 폐출과 사사(賜死)에 대한 연산군의 보복과 이를 기화로 척신세력이 훈구사림세력에게 화를 입힌 사건이다.

성종비 윤씨는 질투가 심하여 왕비의 체모에 어긋난 행동을 많이 하였다는 이유로, 1479년(성종10년) 페출되었다가 1480년에 사사되었다.

 갑자사화는 1504년(연산 10)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크게 제거된 상태에서 연산군과 그를 싸고 돈 궁궐세력이 훈신계열의 재력을 탈취하고자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비에 대해 묵과했던 훈구파 대신들을 흠잡아 일으킨 사건인데 이 사건은 표면상 연산군이 생모 윤씨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벌인 살육으로 평가할 수도 있으나 그 이면에는 조정 대신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작용한 결과이다. 연산군의 극에 달한 향락생활과 사치로 인해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자  성종 때 양성되어 유교적 왕도정치를 추구한 사림들과 연산군의 방종과 학정을 통하여 자기 세력을 구축하고자 한 신하들간의 정치 투쟁이었다.임사홍이 이러한 구도를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연산군의 복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해 일으킨 사건이었다. 임사홍은 무오사화 때 당한 원한을 갚기 위해 연산군비 신씨의 오빠인 궁중세력의 신수근()을 끌어들여 부중세력의 훈구파와 무오사화 때 남은 선비들을 제거하기 위해 옥사를 꾸몄던 것이다.     

갑자사화는 이후 국정과 문화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는데, 사형을 받았거나 부관참시의 욕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역사상 그 이름이 빛나는 명신과 대학자·충신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 사화로 성종 때 양성한 많은 선비가 수난을 당하여 유교적 왕도정치가 침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연산군의 비행과 폭정을 비난하는 한글 방서사건()이 발생하자 글을 아는 사람들을 잡아들여 옥사를 벌였고, 이를 계기로 한글서적을 불사르는 등 이른바 언문학대()까지 자행되어 이후 국문학발전에 악영향으로 문화는 정체되는 등 순탄한 내일을 기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인륜질서의 회복과 정치적 쇄신의 요구는 불가피하였으며, 이것이 중종반정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 되었다.

『갑자사화』는 갑자사화의 내용, 인물 중종반정 등을 다룬다. 이러한 내용을 전해준다. 교훈을 전제로 한 역사가 우선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가 반세기가 지난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삶에 대해 진지한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

 

핏빛 조선4대 사화 세번째 기묘사화
  

기묘사화를 정의하면 

1519년(중종 14)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 사류(新進士類)들이 숙청된 사건이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고 성균관을 중수하였으며, 두 차례의 사화로 희생된 사람들을 신원()하고, 명망 있는 신진 사림파를 등용하였다. 중종에 의해 등용되어 개혁정치를 펼치던 조광조는 38살 때 대사헌의 벼슬에 뛰어 올랐다. 중종의 신임을 받은 조광조는 성리학으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고대 중국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이른바 지치주의(至治主義)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으나 급진적인 면이 적지 않아 훈구세력과 대립하게 되었다.  신진 사류와의 알력과 반목이 날로 커져가는 가운데 정면 도전을 받은 훈구파는, 중종의 사랑을 받는 희빈 홍씨의 아버지인 홍경주를 움직였다. 그들은 희빈과 짜고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 肖 爲 王)'이라는 글씨를 써서 그것을 벌레가 먹게 했다. '走'자와 '肖'자를 합하면 조(趙) 자가 된다. 즉,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니, 이것은 조광조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남곤 ·심정() ·홍경주 등 훈구파의 사주도 있었지만, 중종은 점차 신진 사류의 급진적 ·배타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위훈삭제 사건이 중종반정을 반역사건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의심하게 되었고 중종은 결국 조광조와 신진사류를 몰아내었다.  이리하여 조광조 등에 사형이 내려지고, 그 처자들은 노비로 삼았으며, 재산을 모조리 빼앗는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조광조는 1519년 12월 20일, 사약을 받아 38살의 나이로 숨졌다.이 해가 기묘년이므로, 이 사건을 '기묘사화'라 한다.

기묘사화는 첫째, 1515년 왕비를 책립할 당시 조신간의 대립과 알력, 둘째, 조광조가 추구한 지치주의 정치를 위해 대량 등용된 신진 사류에 대한 불만, 셋째, 도의론을 앞세워 사장파를 도외시한 사림파의 배타적인 태도에 대한 훈구파의 증오가 밑바탕에 깔린 원인으로 잠재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반정공신 위훈 삭제 사건을 도화선으로 폭발한 것이다. 이 사화는 무오 사화와 같이 훈구파와 신진 사류 간의 반목과 배격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정치적 음모가 도사린 정쟁이었다는 점과 갑자사화와 같이 정치적 투쟁 목적이나 이념이 없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  

 

 핏빛조선 4대 사화 네번째 을사사화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尹元衡) 일파 소윤(小尹)이 윤임(尹任) 일파 대윤(大尹)을 숙청하면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제1계비 장경왕후와 제2계비 문정왕후의 인척을 중심으로 척신들의 권력다툼이 심화되면서 중종 말기 혼탁한 정국이 된다. 장경왕후 소생 호혜공주의 시아버지가 된 김안로, 장경왕후 윤씨의 동생인 윤임, 문정왕후 윤씨의 동생인 윤원형. 이렇게 3명이 각각 세력을 형성하면서 서로 물고 뜯는 형국이었다..
김안로는 우선 문정왕후 측을 제거하고자 윤임의 방조 하에 윤원형을 탄핵하여 실각시킵니다. 이에 그치지지 않고 문정왕후를 폐위시키려는 작전을 세우다 오히려 중종의 노여움을 사 귀양 간 후 사사(死賜)됩니다.
김안로()에 의해 정계에서 쫓겨난 문정왕후()측의 세력인 윤원로()·윤원형 형제는, 김안로가 실각한 뒤 다시 등용되어 점차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정국은 윤여필()의 딸인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의 친정인 대윤()과 윤지임()의 딸인 제2계비 문정왕후의 친정인 소윤()으로 갈라져 외척간의 권력투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인종이 죽자 12살 명종(경원대군)이 등극한다. 문정왕후는 어린 임금을 대신하여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며.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 윤임과 인종을 따르던 사림들을 축출한다.. 을사사화 이후에도 문정왕후의 지나친 권력 행사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가차 없이 처단합니다

을사사화는 표면적으로는 윤씨 외척간의 싸움이었으나 사림파에 대한 훈구파의 공격이었다. 1498년(연산군 4) 이후 약 50년간 관료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나타난 대옥사()는 을사사화로서 마지막이 되었으나
을 숙청한다.. 이 와중에 인종이 등용한 사림들까지 몰아내며. 중종 사후 경원대군의 등극을 반대한 사림들을 향한 철퇴를 휘두른다. 수렴청정이 끝나고 명종의 친정 이후에도 문정왕후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자신의 뜻대로 정사를 펼쳐나간다.. 소윤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후광 덕에 온갖 비리와 전횡을 일삼는다.

을사사화는 다른 사화와는 다르게 문정왕후가 죽기 전까지 그 여파가 미칩니다. 문정왕후의 행동에 반감을 가진 자들은 모조리 제거되었습니다. 연산군 4년(1498년) 이후 약 50년 동안 피바람을 몰고 왔던 사화는 을사사화로 마지막이된다.. 그러나,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세력에 의해은 붕당(朋黨)이 형성되었다. 
 

 

----------------------------------------------------------------------------------------------------------------

 

 **함께 읽으면 좋은책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

 

조선선비살해사건 2권  

권력을 둘러싼 본격적인 훈구와 사림의 대립이 펼쳐진다. 

오랜 은둔을 끝내고 중앙 정계에 진출한 조선의 개혁 선비들. 그들은 연산군 4년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던진 한마디에 의해 최초의 위기를 맞는다. 이에 사림의 영수 김종직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죽음을 맞는다. 이를 시작으로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중종 14년 조선 역사상 가장 개혁적인 선비로 꼽히는 조광조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기묘사화, 그리고 명종 원년 인종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인 사림파와 훈구파의 피비린내 나는 을사사화 등이 연이어 일어나고…. 조선 역사상 가장 많은 선비들이 죽음을 맞이한다.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의 개정판인 책~~ 

연산군 4년, 오랜 은둔을 끝내고 중앙 정계에 진출해 직필을 휘두르던 개혁 선비들은 최초의 위기를 맞았다. 사림파의 영수 김종직도 피해갈 수 없었던 훈구파의 대반격!
-연산군 10년. “전하께서 친어머니로 알고 계시는 자순대비는 사실 친어머니가 아닙니다.” 폭군 연산에게 던져진 임사홍의 이 한마디가 도 다른 피바람의 시작이었다.
-중종 14년, 거침없는 조광조의 개혁정책에 숨죽이고 있던 칼을 들어 복수를 시작한다. 조선조 최고의 개혁 선비였던 조광조는 결국 이 칼바람에 희생되는데….
-명종 원년, 독살설에 휘말린 인종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림파와 훈구파의 마지막 대결. 권력을 향한 피도 눈물도 없는 무한대결에서 최후의 승자는 과연 누가 될 것인가?

 

 연산군은 소설이나 연극·영화·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역사상 인물이지만, 그에 대한 묘사와 평가는 하나같은 점이 있다. 모성에 굶주린 미치광이 폭군. 그러나 김범의 <연산군-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글항아리, 2010)은 그런 해석을 거부한다. 연산군이 즉위했을 때, 대간으로 통칭되기도 하는 삼사의 위상은 대단했다. 연산군대의 조선왕조실록인 <연산군일기>를 보면, 연산군이 가장 많이 내뱉은 말 가운데 하나가 능상(凌上)이다. ‘윗사람을 능멸한다’는 뜻의 이 말 속엔, 그만큼 대간들에 의해 왕권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국왕의 열패감이 녹아 있다. 연산군은 부왕이 만들어 놓은 국왕·대신·삼사의 정치적 분립을 왕권의 퇴보이자 조정의 폐단으로 여겼다. 왕권을 절대화하겠다는 욕망은 모든 왕들의 공통분모로, 그러기 위해 연산군이 벌인 게 조선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다. 즉위 초기부터 그 무렵까지는 왕과 대신이 한편이 되어 삼사와 대립하는 구도였는데, 왕과 대신이 삼사를 공격한 게 무오사화였다. 이런 해석은 각종 사화를 훈구 대 사림의 대결로 보는 한국사의 중요한 통설을 뒤집는다. 연산군의 삼사에 대한 경고나 같았던 무오사화와달리 대신과 삼사를 아우른 무차별적인 숙청이 바로 갑자사화이다.---- 

이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연산군의 부왕이자 선왕인 성종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성종 때 형성된 정치적 배경과 연산군에게 매우 중요한 사건 인 사사된 폐비 문제를 자세히 다룬다. 2장에서는 연산군의 치세 초반 1~4년을 다루고 있다. 또한 연산군이 성종의 정치적 유산을 다루는 방식과 그에 따른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에 대해서 다룬다. 3장에서는 갑자사화에 대해서 다루었다. 이 당시의 연산군의 연회·사냥·음행이 심각성에 대해 여러 사료들을 통해 보여주고 그로 인한 혼란과 갈등을 설명한다.
마지막 4장에서는 연산군의 광기 어린 폭정이 결국 반정으로 인한 폐위와 사망으로 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담았다. 마지막으로 연산군 개인과 그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종합적으로 서술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