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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최재혁 옮김 / 한권의책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지루한' 일상. 하루하루는 충분히 즐거울 수 있거늘 우리는 일상이라는 말 앞에 '지루하다'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데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생각보다 더 많이 지루한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오늘 무언가 엄청난 일이 터져서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아침을 맞이할 때가 많다. 그냥 그렇게 넘어가는 하루는 평범하고 지루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세상이 뒤집어지는 일은 아닐지라도,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정도라면 어떤 일이든 일어나는 것이 -나쁜 일이라도 좋은 경험이라고 참고 견딜 정도면 충분하다-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매일매일이 필연적으로 색다를 수밖에 없는 생활양식 속의 존재에게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왜 평소에 해 보지 못했을까?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에서 인간이 수렵생활에서 정착생활로 생활양식을 변경하는 ‘정착혁명’을 주의 깊게 살펴본 것은 바로 저자의 이런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정착 생활 후에 ‘지루함’과 ‘한가함’의 개념이 생겼다는 설명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서 금세 나를 이 책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저자가 결론에서 이야기한대로 이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나는 ‘동물 되기’에 성공했다. 다른 급한 일이 있기 전에는 책을 손에서 놓기 힘들 정도로. 항상 어렵게만 느껴져서 한 번도 내 머릿속에서 잘 녹아들지 않을 것만 같던 하이데거 철학도 지루함에 대한 부분만큼은 쏙쏙 잘 들어왔다.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한가함을 느끼고 지루할 수밖에 없다는, 다소 허망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 말이 너무나도 가슴에 와 닿았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혼자 있고 싶고, 그냥 조금 지루하고, 그냥 조금 우울하고. 이상적이라고 포장되는 우리네의 삶에서 그런 ‘아무 이유 없는’ 우울함과 지루함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치부되지만, 원래 우리가 그렇게 생겨먹은 존재라면, 그런 감정을 느낄 때 오히려 ‘내가 인간으로서 살아 있음’에 안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울함은 ‘마음의 감기’가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감정이라는 주장에 혹하듯, 누구나 인간으로서 지루해 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다시 한 번 안도감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지루함이 무기력함으로 이어진다면, 혹은 지울 수 없는 권태로 이어진다면, 한 번 밖에 없는 삶에서 너무 슬픈 일이기에, 저자는 우리에게 지루함을 극복할 방법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 대목에서 또 한 번 가슴에 와 닿는 말이 있었으니 윌리엄 모리스가 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한 말을 재구성한 것으로 “사람은 빵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빵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빵만이 아니라 장미도 바라자. 삶은 장미로 꾸미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부분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개성 있는 한 송이의 장미를 피워내는 일에도 집중하면서 살아야만 한다. 하지만 각박한 현대 사회는 각자가 생존을 위해 먹을 빵을 구하기도 녹록치 않고, 어쩌다가 여유가 남으면 장미를 피워내기는 시간이 너무 늦은 나머지 황혼의 공허함만이 밀려드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한 줄기 빛과, 한 줄기 아름다움을 피워내면서 스스로가 가치 있는 사람임을 보이고, 인정받고 싶어 한다. 굳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각자 모두 소중한 존재인 우리들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서 인정받으면서 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사치를 하자’고 주장한 대목도 인상 깊었다. 애당초 스스로를 만족시켜줄 수 없는 소비대신 여유를 부리며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치’를 부려보자는 것이다. 모리스가 이야기한 예술행위도 그런 의미에서는 ‘사치’에 들어갈 것이고 ‘동물 되기’의 몰입도 그것이 자신의 일에 중독되는 것이 아니라 취미에 몰두하는 것이라면 사치에 포함될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스스로가 진짜 좋아하는 것에 온 신경을 쏟아 붇는 ‘사치’를 부려본 기억이 얼마나 오래 전 일인지를 문득 깨닫고 한숨도 나오고, 저자의 표현에 소름도 돋았다.
이 책은 바쁘게 살아오면서 내가 잊어버렸던 많은 것들을 다시 기억나게 해 주었고, 많은 배움을 주었다. 이렇게 쉬운 문장으로 많은 생각과 배움을 주는 책을 만나기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다. ‘독서메모’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지만 이 글은 읽는 누구에게라도 강력하게 이 책을 추천하는 글이 되기를 바란다. 특히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온 나머지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가물가물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지경이라면, 그래서 지루함조차도 사치라고 생각한다면 더욱 이 책을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빵만이 아니라 자신이 피워낼 수 있는 한 송이 장미도 바라는 삶을 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