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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버시의 철학 - 자유의 토대로서의 개인주의 ㅣ 돌베개 석학인문강좌 3
이진우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평점 :
전례 없는 집단생활을 체험하는 도중에 필자는 원초적인 욕구만큼이나, ‘개인’으로서 존재하고 싶고,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다는 욕구가 매우 강력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러한 필자의 상황 때문에 이진우의 『프라이버시의 철학』이 더 반갑게 눈에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책에서는 우선 개인주의가 쓰고 있는 억울한 누명들을 재조명하는 일부터 시작된다. 개인주의가 이기주의와 등치되고, 모든 사회악과 현대 사회문제의 근원이라고 매도당하는 세상. 진지하게 ‘개인주의가 모든 ’악의 축‘이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답할 사람이야 많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여러 매체에서 개인주의 풍토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은 이미 진부한 이야기이다. 고등학교 도덕책을 보면 환경 문제도, 공동체 구성원들끼리의 관계단절 문제도,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도 모두 개인주의(이기주의와 혼용된다는 점을 감안하고)에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는 것으로 나왔던 기억이 난다. 신문과 TV 뉴스에서 개인주의가 얼마나 부정적으로 묘사되는지는 필자가 일일이 사례를 들지 않아도 조금만 찾아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개인주의에 대한 누명을 걷어내고 프라이버시를 존중한다는 것이 개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지, 현대 자유민주주의를 운영함에 있어서 개인들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함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 강조한다. 과장을 보탠다면 이 책은 하나의 프라이버시 예찬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홉스, 로크, 칸트와 같은 철학자들의 이론도 모두 프라이버시 보장 혹은 존중이라는 깃발 아래 재조명되고, 4장에 가면 일상생활에서 흔히 직면하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공간, 정보, 결정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설명이 등장한다. 물론 이 논의들에서 프라이버시의 존중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에게 요구되는 덕목으로 등장한다.
공간, 정보, 결정의 프라이버시 모두 온전하게 지킬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필자의 입장에서 이진우 교수의 이러한 이야기는 목마른 이에게 선사하는 샘처럼 신선하고 가슴 깊이 와 닿았다. 특히 4장에서의 구체적인 논의는 언론법의 영역에서 다루는 프라이버시 논의와 많이 중첩되어 이해하는 데 더 수월하였다. 홉스와 로크, 칸트를 프라이버시라는 핵심 단어 아래 재해석한 부분도 흥미로웠다.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이 정도로 프라이버시라는 ‘진부한’ 단어를 진부하지 않게 잘 정리하기는 쉽지 않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라이버시와 소유 문제를 지적하는 부분에서, 예컨대 로크의 『통치론』과 관련된 부분에서 ‘사적 소유’를 대상물 일반을 한 개인이 배타적으로 처분한다는 소유의 개념과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의 개념 중 어떤 맥락에서 읽어야 할지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아 생기는 혼동은 아쉬운 점으로 지적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저자가 로크의 ‘노동가치론’의 모태가 되는 사상을 인용한 것은 소유에 대한 명제들을 프라이버시에 대한 명제들로 바꾸려는 시도를 더 자연스럽게 하기 위함일 수도 있겠지만, “소유에 대한 다양한 공격(p.150)” 중 현대인들의 물질적 욕망 일반에 대한 비판과 좌파가 제기하는 생산수단에 대한 배타적 소유에 대한 비판은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개인적 소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가 철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에)이 정확하게 구분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좀 더 거칠게 말하자면, 진부한 것들을 진부하게 서술하지 않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당 부분에서는 다시 부정확한 논의들을 진부하게 반복한 것은 아닌 지 의심스러웠다.
위에서 지적한 부분은 필자가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에 대한 것이라 더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프라이버시에 대한 추상적인 관념들을 잘 정리할 수 있어서 책을 읽는 내내 스스로가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꼭 쌓아야 할 최소한의 장벽(어쩌면 방벽일 수도 있다)으로서의 프라이버시가 나의 일상에서 어떤 의미를 가져왔는지 곱씹으며 읽었다. 저자의 표현대로 프라이버시는 '예의상 지켜주는' 정도의 중요성을 띤 것이 아니라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지켜줄 하나의 방벽으로 자리잡았다. 이 방벽의 부정은 '벽을 허물로 친밀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개별성의 부정이며 집단주의의 폐해가 작용하기 시작하는 지점이라는 지적 또한 매우 공감되는 부분이다.
책의 내용이 다소 어렵게 느껴질 사람들에게는 프라이버시가 어느 정도 침해당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경험해 본 다음에 다시 읽어보면 논의가 머릿속에 정말 잘 들어온다는 희망을 마지막으로 전하며 짧은 후기를 마친다.
(필자 개인 블로그 글을 일부 편집하여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