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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 쟁탈전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20세기를 대표하는 역사학자 중 한명인 에릭 홉스봄은 『역사론』에서 인류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그의 태도만큼이나 분명한 ‘역사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매우 간단하다. “있었던 일은 있었던 것으로, 없었던 일은 없었던 것으로, 그 이상의 논의는 죄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라고 줄일 수 있겠다. 물론 아직 미확인으로 밝혀진 사실들이 무수히 많은 것은 그도 인정하지만, 역사적 사실의 결과 자체가 영원히 미확인 상태일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은 폴란드를 점령한 적이 있고, 조선은 유럽의 30년 전쟁에 개입한 바가 없다(물론 유능한 사학자가 이에 대한 반론을 펼칠 증거를 가지고 나오기 전까지). 조선이 30년 전쟁에 어떤 시각에서 보면 개입하였고, 어떤 시각에서 보면 관계가 없다는 설명은 더 많은 것을 설명해주는 것 같아도 사실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좀 더 미묘한 문제로 접근해보자. 확정적인 결과가 아닌 과정의 문제이자, 하나의 결과로 가는 수많은 과정들의 존재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 대해서. 정조는 분명히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그가 암살당한 것인지, 다른 이유로 죽은 것인지를 두고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조선의 27명의 왕 중 누군가는 동성애자였을 수 있지만 실록에는 이를 확증하는 기록이 없다. 하지만 27명의 왕 중 누구도 가공의 인물은 아니다. 『리스본 쟁탈전』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714년부터 1147년까지 리스본은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있었고, 알폰소 1세가 리스본을 ‘쟁탈’한 것은 분명한데 이 과정에서 어떻게 이슬람 세력이 물러났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을 수밖에 없다. 1000여 년 전 이야기를 사진 찍듯이, 영화 한 편을 보듯이 생생하게 알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불명확한’ 일들에 대해 도전적일만큼 단호한 설명을 제공하는 ‘정사(正史)’를 듣고 배운다. 그 누구도 기록된 역사들이 모두 진실만을 담았다고 믿지 않지만, 무의식적으로 정사는 역사를 바탕으로 한 모든 종류의 창작물의 ‘기준’으로 자리 잡는다. 정사에서 배가 10척이라고 했으면 드라마에서도 배가 10척이어야 만족스러운 것이다. 때문에 역사가도 아닌 ‘한낱 교정자’가 리스본 공성전에서 십자군의 도움을 ‘한 펜에’ 부정해버리는 일은, 소설에 묘사된 긴장감 그대로,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당혹스러운 일이 수습되는 과정을 통해 역사적 서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를 얻는다. 사라마구의 소설이 항상 이런 식이다. 한 가지만 뒤틀어도 우리가 너무나도 익숙하게 느끼는 세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신기한 것은, 실바가 충동적인 실수(?)로 새로 쓰게 된 리스본 쟁탈전의 역사 속에는 그의 상상력이 개입할 빈 공간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의 상상력이 더해져 비로소 사람들이 살아갔던 장면의 이야기로 거듭났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가 보여준 이야기는 알폰소 1세의 영광스러운 영웅담이 아니라 기사의 첩으로 전쟁터에 딸려온 한 여성과 전쟁에 참여한 한 병사의,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눈으로 본 전쟁의 이야기이다. 이들이 실존인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 이들은 다른 수많은 이름으로, 하지만 같은 처지로 전쟁에 휘말린 많은 이들을 대변할 뿐이다. 그들이 보는 전쟁터는 온갖 ‘구질구질한’ 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 대의를 위해서 하나로 뭉치고 강한 정신력으로 무장해 목숨 걸고 싸우는 결의에 찬 병사들만 있을 것 같은 전장에는 이해관계를 놓고 교묘한 수를 주고받는 ‘지도자층’과 순간의 실수로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생명들, 그 와중에도 다양한 욕구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영혼들이 있고, 봉급이 밀리자 충성심도 거둘 준비가 되어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군대와, 공명심에 눈이 멀어 파멸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기사도 있다. 사실 이 전쟁을 종결하는 가장 큰 힘은 저자의 설정에 따르면 리스본 성이 포위를 버틸 수 없게 만든 기근인데, ‘신의 뜻’이든 ‘인간의 뜻’이든,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뜻이 위대하게 집행되었다는 결론보다는 훨씬 개연성 있는 전개일 것이다.
물론 라이문두 실바가 채워 넣은 ‘빈 공간’이 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는가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면, 역사는 주로 승리자의 시각에서 기록된다는, 진부하지만 자주 망각되는 사실을, 그리고 ‘승리자’ 중에서도 승리자 집단의 지배분파를 중심으로 작성될 뿐, ‘승리 호’에 탑승한 수많은 선원들의 이야기는 기억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라이문두 실바가 베스트셀러 작가였으면 결코 보려고 하지도 않았을 세밀한 삶의 현장들은 그가 스스로를 제대로 된 고등교육도 받지 않은 평범한 교정자일 뿐이라고 여기면서 바로 그 위치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꼼꼼하게 보았기 때문에 비로소 역사책의 한 귀퉁이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것들은 아마 사료에 의해 뒷받침될 수도 없고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아 있지 않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고증이 불가능하고, 그것을 ‘역사’라는 무거운 이름 속에 포함시켜야 할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그것들을 계속 사소한 문제로 치부할 경우 필자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후대에 똑같이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어 남겨지지 않고 우리는 영원한 망각 속에 들어갈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설사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슬픈 일 아니겠는가? 역시 평범하여 영원한 망각 행 열차를 타기로 예정되어 있는 실바 씨가 그런 이들의 이야기를 상상 속에서 ‘역사책’ 속으로 끄집어내어 한 줄이라도 더 기억되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 그것이 내가 그의 지루해 보이는 집필 작업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책에는 실바 씨의 책이 성공을 거두었는지, 심지어 제대로 출판되기는 했는지 그 결말이 나와 있지는 않다. 책을 쓰는 과정에서 우리의 교정자는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 전해줄지도 모르는 책을 찾기 이전에 자신의 삶을 바꾸어 줄 사랑을 찾았고, 이야기 역시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책의 집필을 마쳤다고 말하는 지점에서 끝난다. 어쩌면 새로 쓴 『리스본 쟁탈전』은 나오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실바 씨가 블로그 등을 통해 누구나 부담 없이 글 한편을 써낼 수 있는 오늘날과 같은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서 결말이 열려버렸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나의 주관적인 생각으로는 채널이 더 많이 주어진 요즘에도 라이문두 실바가 소설 속에서 행한 것과 유사한 가치를 지닌 창작물이 ‘쏟아져 나오지’는 않는다). 사실 책의 성공 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의 작은 모험을 통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들 ―우리가 지금까지 익히 들어 왔던 ‘역사 이야기’가 가지고 있었던 빈틈, 역사적 사실을 남에게 전달한다는 것이 얼마나 생경한 일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역사를 받아들이고, 또 써나갈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내 주위에서 실바와 같은 시도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재미있는 사람을 친한 지인으로 둘 만큼 내가 운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가까이하며 응원해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가 쓰는 이야기는 우리들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이야기가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