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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이민경 지음 / 봄알람 / 2016년 8월
평점 :
전 늦게 불어를 배웠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에 배웠으므로 원어민처럼 절대 말하지 못합니다.
처음 불어를 배울 때 익숙하지 않은 발음으로 남들 앞에서 말하는 걸 꺼렸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에는 X년을 살았는데 고작 그 정도냐 말이 나올까봐 자신있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외국인이 못 알아들으면 더 크고 정확하게 반복하는 대신 목소리가 기어들어갔죠.
지금은 매일 불어를 사용하며 살(아야 하)지만 연습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단어도 까먹고 표현도 까먹습니다. 동시에 모국어인 한국어도 까먹습니다.
내게 페미니즘이란 후천적으로 배운 언어입니다.
배우기 전엔 너무 어려울까 겁을 냈고, 드센 언니들이 사용하는 언어란 생각에 가까이 하기 왠지 무서웠습니다.
배워보니, 나도 모르게 지금까지 살면서 체득한 게 있긴 했나 봅니다.
모국어라 주장할 정도는 절대 아니지만
알파벳, 문법이, 관용 표현들이 낯설지 않습니다.
이제는 자신있게 큰 소리로 말해야겠어요.
까먹지 않게 연습하렵니다. 나의 생존언어인데 잘해야 하지 않겠어요?
참, 이 책은 매뉴얼입니다.
"상황별로 익히는 기초 프랑스어 회화"처럼 상황별로 적절한 언어 가이드가 되어줄 겁니다.
차별을 경험하지 못하는 쪽이 차별의 경험을 무시하게 되면 경험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는 점점 힘들어져서 결국 차별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차별의 경험이 모이면 쉽게 얻을 수 없는 직관이 되고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 하나의 경험은 소중합니다. 때문에 ‘별거 아니지 않냐‘는 가장 별것 아닌 말에 이 경험들이 사라져버려서는 안 됩니다.
상대가 내가 겪은 차별을 차별이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다음에는 내 말에 근거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내 피부로 겪은 진짜 경험이 몰이해의 폭력에 묵살되어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내가 겪은 일이 차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쪽이 그것을 겪지 않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오만함은, 말의 가벼움 이상의 무시 못 할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차별을 겪은 당사자가 스스로 느낀 부당함에 대해 사실 별 것 아닌가, 너무 예민했나,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생각하며 차별의 경험을 사회에서 지워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도 좋은 뜻으로 한 말이겠지‘라며 그의 말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는 건 오로지 내 선택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겁이 나서, 선택의 여지 없이 호의를 쥐어짜내거나 일방적으로 참는 경우가 많습니다. 겁이 난다는 건, 실제로 물리적 폭력을 염려하는 경우만이 아닙니다. 혼자 예민하다고 찍혀서 고립될까 봐, 주변에게 욕을 먹을까 봐, 상대가 나를 안 좋게 생각할까 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친절한 사람이 되곤 합니다.
저는 대화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대화는 2차적인 가해가 됩니다. 내가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내가 원치 않는데, 내가 겪는 차별을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부정하는 상대와 나누는 대화는 나에게 또 다른 내상을 안깁니다. 게다가 요즘은 시비를 걸고 변명을 하는 행위마저 뭉뚱그려 대화라 부르곤 합니다.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표명했는데도 계속해서 나와 대화를 나누려는 시도는 나를 침해합니다.
당신을 오독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당신이 당연하게 상대를 설득해야 하고, 그때의 어조는 당연히 온화하고 이성적이어야 하고, 상대가 당신의 말을 듣는 시늉을 하면 당신은 그에게 감사하고 그를 받아들여줄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권리를 얻기 위해 목소리를 냈을 뿐, 당신에게 상대를 설득할 의무는 없습니다. 상대를 사랑으로 감싸야 할 의무는 더더욱 없습니다. 당신은 상대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이 내킬 때에만 행동해야 합니다. 그럴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이가 너무도 많은 상황이기에, 상대가 당신에게 기대하고 바라는 그 무엇도 당연하지 않음을 더욱 강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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