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히려 과도한 연명 치료 때문에 생의 마지막 시간을 불필요한 고통으로 보내는 경우를 많이 봐왔습니다. 자연스럽게 말라가듯 죽는 것. 오히려 이 편이 고통스럽지 않아요. 원래 죽는 순간은 아프지 않고 괴롭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큰 병원의 의사들은 이걸 모르고 죽음은 패배라는 생각에 최후의 순간까지 과도한 연명치료를 하는 겁니다.(49p.)
차갑게 식은 아버지와 대면한 것은 경찰의 시신 안치소였어요. 그게 내 인생 최초로 본 사체였습니다. 나는 많은 것이 분했어요. 슬프다기 보다는 분했습니다. 피를 나눈 가족인데도 육친의 죽음을 전혀 짐작할 수 었었다는 무력함이 우선 분했어요. 그리고 수년 동안 대학병원 정신과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치료를 받았는데, 왜 이런 결과가 됐는지도 분했습니다. 의료라는 것도 이 정도로 무기력한 것인가 싶어서 말이죠. (60~61p.)
그렇다면 ‘죽음‘이란 어디까지나 1인칭, 그 사람 개인만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죽음으로 인해 충격을 받는 건 언제나 타자니까요.
유감스럽게도 나는 ‘내가 죽어서 충격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물론 ‘내가 죽어서 잘 됐다‘고 말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고요. 죽음이란 언제나 2인칭 혹은 3인칭입니다. 2인칭의 죽음은 대개 충격이고 슬프죠.(62~63p.)
사소한 것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실 ‘자살自殺‘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자살로 죽은 가족이 있는 사람 중에는 이 ‘죽일 살殺‘ 이라는 문자에 상처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죽이다‘ 가 죄라서 그런 건가요?)
그래요. 일본에서는 ‘스스로 죽을 권리‘는 허용되지만 ‘살인‘은 죄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에 ‘살‘이라는 문자는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실 시마네현에서는 이미 그런 움직임이 있습니다. 2013년부터 ‘자살 대책 종합계획‘이라는 행정 정책이 ‘자사 대책 종합계획‘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어요. 가족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해요. 시마네현의 장애복지과는 "‘자사‘에는 열심히 살려고 했으나 무력감이나 절망 끝에 죽었다는 어감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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