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년째 일산 신도시에 살고 있다. 50살 때 이사 와서 지금 70살이 되었다. (...) 20년 전의 어린 나무가 이제는 크게 자라서 잎이 무성하고 그늘을 거느려서 사람과 새를 모은다. 나는 내가 점찍어놓은 나무들이 자라는 과정을 20년 동안 들여다보았다. 나무의 우듬지 쪽 윗가지들은 새롭게 뻗어나와서 바람에 출렁거리지만, 밑동에 가까운 굵은 가지들은 더 굵어지고 껍질이 더 거칠어지기는 했지만, 가지가 벌어진 각도나 방향은 어렸을 때의 표정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호수공원의 산신령 中)
- P21
여성 노인들은 아들 편을 들었다가 며느리 편을 들었다가, 며느리를 욕했다가 자랑했다를 반복하면서 끝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야기는 날마다 이어진다. 누구의 삶인들 고단하지 않겠는가. 이러니 남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얼마다 두려운 일인가. 한 생애를 늙히는 일은 쉽지 않다.
(호수공원의 산신령 中)
- P35
여러 빈소에서 여러 죽음을 조문하면서도 나는 죽음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다. 죽음은 경험되지 않고 전수되지 않는다.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은 죽은 자들의 죽음에 개입할 수 없고, 죽은 자들은 죽지 않은 자들에게 죽음을 설명해 줄 수가 없다. 나는 모든 죽은 자들이 남처럼 느껴진다. 오래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염을 받고 관에 드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범접할 수 없는 타인이라고 느꼈다.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제가 죽었는지를 모르고. 제가 모른다는 것도 모르고 산 자는 살았기 때문에 죽음을 모른다. 살아서도 모르고 죽어서도 모르니 사람은 대체 무엇을 아는가.
(늙기와 죽기 中)
- P71
날이 저물고 밤이 오듯이, 구름이 모이고 비가 오듯이, 바람이 불고 잎이 지듯이 죽음은 자연현상이라서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고 스스로 다짐하지만, 그런 보편적 운명의 질서가 개별적 죽음을 위로할 수 없다. 문상 온 친구들이 그렇게 고스톱 치고 흰소리해대는 것도 그 위로할 수 없는 운명을 외면하려는 몸짓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문상의 자리에서 마구 떠들어대더 친구들의 소란을 나는 미워하지 않는다.
(늙기와 죽기 中)
- P72
당신들은 이 송년회가 후지고 허접하다고 생각하겠지. 나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덧없는 것으로 덧없는 것을 위로하면서, 나는 견딜 만했다. 후져서 편안했다. 내년의 송년회도 오늘과 같은 것이다. 해마다 해가 간다.
(해마다 해가 간다 中)
- P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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