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보면 그녀는 입술을 꽉 물고 자기 앞에 놓인 어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 속에선 휴대전화 반사광이 안개처럼 어룽거렸다. 숨을 쉴 때마낟 그녀의 목 밑이 구멍처럼 패였다가 불고지곤 했다. 그때마다 낮고 긴 숨소리가 입김처럼 밀려와 내 귀에 닿았다. 누군가 그 숨소리에 이름을 붙이라고 한다면 나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두려움‘이라고 부르겠다. 그녀는 나와 함께 있었으나 완벽하게 혼자였다.

- P326

‘진이에게‘로 시작된 편지는 어머니다운 당부를 담고 있었다. 자신이 떠난 후에도 너는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니 짧게 작별하자고 했다. 3일장을 치르지 말고 곧장 화장해서 바다로 보내달라고 했다. 당신을 위해 울지 말라고 했다. 연민하지도 말라고 했다. 그것은 죽을힘을 다해 살았던 당신 삶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다. 대신 당신을 기억해달라고 했다. 내 딸이어서 미안했고, 내 딸인 게 고마웠다고 했다.

- P352

그가 한 발짝씩 전진할 때마다 정적의 밀도는 점점 높아졌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처럼 귀가 먹먹해왔다. 시야도 흐릿해졌다. 잠시 후엔 민주의 움직임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현실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때 이르게 덮쳐온 감각 박탈 상태에서 나는 떨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든 세상에 작별을 고할 때가 찾아온다. 작별하는 태도도 제각각일 것이다. 죽음을 부정하다 죽거나, 죽음을 인식할 새도 없이 죽거나, 죽음에 분노하며 죽거나,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며 죽거나, 어머니처럼 홀로 죽음을 맞거나.
아무래도 나는 끝까지 떨다가 죽을 모양이었다.

- P353

그녀는 내게 삶이 죽음의 반대말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삶은 유예된 죽음이라는 진실을 일깨웠다. 내게 허락된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영원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르쳤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 나는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삶을 가진 자에게 내려진 운명의 명령이었다.

- P367

<죽음, 지속의 사라짐>에서, 저자인 최은주 박사는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정의했다.

모든 위험을 받아들이면서 삶을 총체로서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단지 ‘무‘로 만들지 않는 길이다. 그것이 죽음의 의미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언젠가는 반드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어떤 순간이 온다. 운명이 명령한 순간이자 사랑하는 이와 살아온 세상, 내 삶의 유일무이한 존재인 나 자신과 작별해야 하는 순간이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 치열하게 사랑하기를. 온 힘을 다해 살아가기를......

(작가의 말 中)

- P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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