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논문주제는 ‘중세 서정시에 고전 전통이 미친 영향‘이었다. 그는 여름에 고전 작품과 중세시대의 라틴어 시를 읽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특히 죽음을 다룬 시들을 많이 읽었다. 로마의 서정시인들이 죽음을 삶의 현실로 편안하고 우아하게 받아들인 것에 다히 의아함을 느꼈다. 그들은 무(無)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살면서 즐겼던 풍요로움에 바치는 공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반면 기독교 시대에 라틴 전통에 따라 시를 쓰던 후세의 시인들 중 일부의 작품에는 거의 감춰지지 않은 증오, 쓰라림, 공포가 드러나 있는 것이 신기했다. 그들은 비록 모호한 약속이기는 하나 풍요롭고 황홀한 영생의 약속으로 그런 감정이 드러난 것을 보면 마치 죽음과 영생의 약속이 삶을 망가뜨리는 못된 장난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 P59

검시관은 심장마비가 사인이라고 선언했지만, 윌리엄 스토너는 슬론이 분노와 절망의 순간에 자기 의지로 심장을 멈추게 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뿌리부터 배신당해 더 이상 참고 살아갈 수 없게 된 그가 마지막 순간에 세상을 향해 사랑과 경멸을 드러낸 것 같았다. - P127

이제 두 분은 평생을 바친 땅 속에 누워 있었다. 땅은 앞으로 서서히 두 분을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이다. 습기와 부패의 기운이 두 분의 시신이 담김 소나무 상자를 서서히 침범해서 두 분의 몸을 건드리다가, 마침내 두 분의 마지막 흔적까지 모조리 먹어치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두 분은 이미 오래전에 자신을 바쳤던 이 고집스러운 땅의 무의미한 일부가 될 것이다.
- P153

늦겨울과 초봄에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고요함을 맛볼 수 있었다. 바깥세상이 점점 조여 들어오는 동안 두 사람은 그 세상의 존재를 덜 의식하게 되었다. 함께 느끼는 행복이 너무 커서 바깥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작고 침침한 캐서린의 아파트, 육중하고 낡은 주택 밑에 동굴처럼 숨어있는 아파트에서 두 사람은 시간을 벗어나 자기들이 직접 발견한, 시간을 초월한 우주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 P296

고든 핀치의 사무실을 나선 순간부터 그는 알고 있었다. 존재의 작은 중심에서 자라난 무감각한 공간 속 어딘가에서 자기 인생의 일부가 끝나버렸음을. 자신의 일부가 거의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이라서 다가오는 죽음을 거의 차분한 태도로 지켜볼 수 있을 정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 P300

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거의 평생 동안 무심한 교사였음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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