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전에 이미 산업발달의 폐해, 환경보호에 눈을 떴던 인두세 납부를 거부하며 개인의 자유에 대한 국가 권력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던, 무심코 펼쳐보다 눈에 뜨인 몸을 부지런히 놀리는데서 지혜외 순결이 온다. 나태로부터는 무지와 관능이 온다.’는 그의 글귀, 명함 사진 정도에 불과한 그의 얼굴이 링컨과 아주 흡사해 저자에게 호감을 느꼈다.

더욱이 월든 호수가 위치한 콩코드는 오빠가 사는 보스턴 렉싱턴에 가까이 있어 10년 전 가본터라 거론된 지명이 익숙하고 반가워 읽는 즐거움이 묘했다.

 

현대에 미한다면 원시적이고 근대적이었을 그 시대의 문화, 문명 좌 거부하며 즐기고, 발전시키는 이들을 신랄히 비판하고 죄인시하는 그의 경직된 사고가 자연친화를 주장하는 그의 신념과 과연 조화를 이룰 수 있었을까 의문도 생겼다.

 

한잔의 커피아 차의 유혹을 천박하다고 말하는 저자.

음악에의 도취가 그리스, 로마를 멸망시킨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영국, 미국조차 그로 인해 멸망하리라고 확신하는 저자에게 나는 충동적인 반감을 느끼게 되었다.

구태여 땀을 흘려가며 밥벌이를 할 필요가 없다. 생계를 유지하는 일은 오락정도로 충분하다라는 지나친 그의 절제가 행여 44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뜨게 한 요인이었던 것은 아닌지....(나의 극단적인 감정이 곳곳에서 불끈거렸다. 솔직히.)

모두가 도시를 등지고 숲으로 숲으로의 생활을 주장한다면 이웃과의 공존,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가 존재할 수 있을까. 현실과 문명을 배척하며 공간적, 시간적 진화가 200년 전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게 ㄲ 말하는 성실과 진실일 수 있을까?

 

물레를 손수 돌리는 허름한 의복을 걸친 마하트마 간다.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건 아주 중대한 일이었다.’라고 읊은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더 신선하게 푸근하게 가슴을 채워준다.

 

소박하고 겸허가 아닌 질책과 배태적인 그의 강인함이 소로우에 대한 느낌이라니 어쩐지 서운하다.

 

오빠가 사는 미국 동북부지역이 과거엔 뉴잉글랜드라고 불리워졌다는 사실이 또 다른 감회에 젖게한다. 청교도들이 육지에 도착해 밟아 찍힌 그 첫발자국도 오버랩 되는 시각이다. 조카가 한국에 온 지 3. 내일 모레 미국으로 돌아간다. 다시 방문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월든을 보며 그곳을 추억했듯 호숫가를 걸으며 소로우의 말을 기억해 볼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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