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신기하구나. 이런 사람인가 보다 하고 만나면 늘 다른 사람이야."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나도 남자들은 가장무도 의상을 입으며, 등 어딘가에 지퍼가 있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그러다가 문득 언젠가 나도 어른 남자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퍼 문제를 고민했다.

(선인의 전설 中)
- P44

세상은 원래 널따란 들판이고, 지구는 평평했단다. 이름없는 짐승들이 들판을 어슬렁거리며 큰 놈이 작은 놈들을 잡아 먹었지만 아무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어. 그러던 중 인간이 나타났다. 처음엔 세상 변두리에 웅크린 채 숨어 있기만 했어. 털북숭이에 멍청하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거든. 그런데 기다리는 동안 수도 많아지고 사악해지고 잔인해져 세상 변두리를 왜곡하기 시작했지. 변두리는 조금씩 구부러지고 비틀렸어.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이 세상에 남기 위해 서로 기어오르고, 기어오르면서 서로의 등가죽을 벗겼지. 그리고 그 바람에 인간은 모두 헐벗고 벌거벗고 춥고 잔인해지고 세상의 변두리에 매달린 거야.

(수콴섬 中)
- P56

로이? 내 말 들리니?
예, 지금 깼어요.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만 마음이 아주 안 좋다. 낮에는 그나마 괜찮은데 밤마다 그러는구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우는 소리를 했다. 미안하다, 로이. 노력은 한다만 버틸 자신이 없어.
로이도 이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우는 건 정말 싫다.
로이?
예, 듣고 있어요. 죄송해요, 아버지. 기운 내요.

(수콴섬 中)
- P102

짐은 몇 걸은 떨어진 곳에서 44구경 매그넘을 집어 총구를 머리에 댔다. 잠시 후엔 다시 내리며 미친 듯이 웃었다. 맙소사, 자살할 용기도 없다니! 그가 크게 소리쳤다. 자살마저 연기를 하려는 게냐? 앞으로 50년 동안, 매 순간마다 살아 이 상황을 곱씹어야 할 텐데?
그리고 또 울었다. 로이를 위해 울고 자기 연민 때문에 울었다. 스스로를 위해 운다는 사실도 의식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수콴섬 中)
- P179

넌 아직 살아 있다, 로이. 내내 그 생각을 했지. 지금이야 더는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하고, 죽는 순간 생명도 끝이 났지만, 그 대신 나한테 이렇게 끊임없이 문제가 일어나잖니. 그러니까 아직 살아있다고 볼 수 있어. 게다가 아무도 모르잖아? 네 엄마도 모르니까 완전히 죽지 않은 셈이다. 엄마가 소식을 들으면 다시 죽기야 하겠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엄마 때문에 살아 있어야 할 게다.

(수콴섬 中)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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