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냐도 그다지 종요하지 않다. 그러나 살아 이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괜찬고, 당신도 괜찮아. 그런데 그는 죽었어!" 하고 말하는 것이 일종의 위로다.
이것이 우리가 강바닥을 훑고 비행기 잔해나 폭격 현장을 샅샅이 뒤지는 이유다.
이것이 ‘작전 중 실종‘ 이 ‘도착 시 이미 사망‘보다 고통스러운 이유다.
이것이 우리가 관을 열어 두고 모두가 부고를 읽는 이유다.
아는 것이 알지 못하는 것보다 낫고, 그것이 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그것이 나라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두말할 나위 없이 낫다. 일단 내가 죽은 사람이 되면, 네가 괜찮든 그가 괜찮든 나에게는 별 상관없는 일이 되기 떄문이다. 다 꺼져도 상관없다. 죽은 사람은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장의, 산자를 위한 의식 中)
- P23

겁에 질려 있지만 선의를 가진 무지한 사람은 "괜찮아요, 저건 그 아이가 아닙니다. 그냥 껍제기일 뿐이에요."하고 내뱉을 수밖에 없다. 나는 한 감독파 사제가 백혈병으로 십 대 딸을 잃은 어머니에게 이런 조언을 했다가 느닷없이 따귀를 맞고 쓰러질 뻔한 장ㅁ녀을 본 적이 있다. "저게 ‘그냥 껍데기‘가 되면 내가 알려줄게요." 그 여자는 말했다. "지금은, 그리고 내가 달리 말하기 전까지는, 저 아이는 내 딸이에요." 그녀는 죽은 사람을 죽었다고 선포할, 산 사람의 오래된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죽은 몸 中) - P51

두려움의 가난한 사촌이 분노다.
그것은 우리 아이들이 혼잡한 거리로 달려 들어가기 전에 양쪽을 살피지 않을 때 우리 안에서 솟아오르는 격한 감정이다. 또는 함정에 빠지거나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우리가 늘 제공하는 무료 조언을 가슴에 새기지 않을 때도. 그것은 엉덩이를 때리거나 말로 채찍질을 하거나, 문을 쾅 닫거나, 개를 걷어차거나,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것이다-우리를 아프게 하는, 하느님 우리를 도우소서, 사랑이다. 슬픔이다. 우리가 아무 힘을 쓸 수 없는, 전혀 힘을 쓸 수 없는 삶의 현실에 대항하여 벌이는 전쟁이다. 그것은 영웅과 배우들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아이를 기르는 방법은 결코 아니다.
(두려움과 믿음 中)

- P113

나의 분노의 대상인 하느님은 어머니가 알던 하느님이었다-턱수염을 기르고 대천사들을 거느리고, 책임을 방기한다는 논란이 있는자. 비열한 느낌이 드는 못된 장난을 치는 자로서, 우리 밑에서 의자를 빼 버리고, 단추 구멍에 꽂는 꽃으로 우리를 찌르고, 벼락을 치는 조이부저를 달고 우리와 악수를 하고 나서 왜 우리가 "이해"를 못나느냐고 의문을 품는다. "농담도 받아들이지" 못해?

(어머니의 위로의 말 中)



- P187

"지나가면서 나를 보라. 지금 당신이 있듯이, 한때 나도 있었다. 곧 당신도 지금 나처럼 될 것이다. 죽음에 대비하고 나를 따르라."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훌륭한 묘비로, 기억할 만하고 음침하며, 가장 훌륭한 석공의 필체로 새겨져 있다. 이것을 본, 언제고 말이 딸리는 일이 없는 직 아저씨는 즉석에서 대꾸했다. "당신을 따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당신이 어디로 갔는지 알기 전에는."

(죽은 자와 산 자의 거리 中)
- P232

이것이 내가 늘 존경하는 부분이었다-자신에게 그런 엄청나고 복구 불가능한 피해를 줄 수 있는 단호함, 그 순수한 결의, 이것이 모든 성공한 자살에서 도드라지는 요소다. 이것이 진정한 킬러와 이따금씩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을 나눈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 가운데 살면서 부재와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주는 편안함을 몇 번쯤 갈망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내일 살아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끝내지 않은 숙제, 조직검사 결과, 로맨스의 역전, 임신 검사 때문에-하는 사람과 내일과 그다음 날과 그 뒤에도 영원토록 죽고 싶은 사람 사이에는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차이가 있다.

(누가 존재하게 되고 누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가 中)
- P295

신이 자연을 창조했건 자연이 신을 창조했건, 자연스럽고 신적인 죽음은 환영받지 못하는 반면 자연스럽고 신적인 출생은 기쁨이다.물론 두 사건 모두 어느 정도 양가적 감정이 따른다. 어떤 출생도 경이롭기만 할 뿐 걱정이 없는 경우는 없고 어떤 죽음도 끔찍하기만 할 뿐 축복과 위안이 전혀 없는 경우는 없다. 우리는 그것을 견딜 수도 있고, 받아들일 수도 있고, 그것이 적절하거나 자비롭거나 시의적절하다고 간주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바로 최근까지도 출생은 기쁨의 꾸러미, 삶의 기적이었다. 죽음은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검은 천사, 잔혹한 수확자, 밤도둑, 개자식이었다.

(누가 존재하게 되고 누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가 中)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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