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지 20년(작가가 그쯤의 나이에 이르러)이 넘어 어머니를 그리며 잔잔하게 일렁이는 그리움을 저녁 노을에 강물 흘려보내듯 한 마음으로 풀어내려간 회상록이다.
가난한 가정을 배경으로 한 어머니, 그래서 우리의 눈으로는 억척스럽고 매정해 보였던 –그 시대야말로 가난한 생활은 극히 평범하고 일반적인 세태가 아니였을까- 그분으로부터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족에 대한 인내와 사랑, 아귀 같이 들러붙어 더 끝없는 희생을 강요했던 형제들과의 어린시절 이야기는 그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드물게 행해지는 식당 나들이에서 남은 음식을 준비해온 비닐 봉지에 쓸어 담는 창피한 어머니. 시장에서는 상인과 물건값을 깎느라 실갱이를 벌이는 싸움쟁이, 도망가는 쥐를 향해 거꾸로 든 골프채를 휘둘러대는 적의에 찬 눈매, 작가는 이 소스라쳐댔던 어머니의 나날들이 지금의 자신을 키워준 힘이라고 고백한다.
자식들이 그리워, 관심을 사고자 가끔씩 집안을 뒤집어 엎었던, 그래서 속을 끓이고 타박해댔던 어머니의 외롭고, 죽음으로부터 위협을 당했던 세월들이 문득문득 슬픔으로 가슴을 메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농장 타라를 지켜내던 스칼렛처럼 꿋꿋했던 엄마는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었으면 손가락의 지문이 닳아 없어지도록 묵주알을 굴려댔을까.
작가는 말하고 싶다. 자꾸 말하고 싶다.
‘소중한 사람들을 우리가 얼마나 가볍게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를.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정신적인 지면을 할애해 나의 소중한 모든 것에 대해 써봐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이놈을 낳고 집안 살림이 폈다”며 유난히 경숙이에게 애정을 보이는 아버지에게 속상함을 드러내거나 투정을 부리기에는 나는 너무 자존심이 강한 큰딸이었다. 내가 만든 음식을 즐겨 드신 아버지에게 칭찬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이 복수심의 한 방법이었을까. 그날 역시 주워들은 동냥대로 양파를 잔뜩 갈아넣은 매콤한 비빔 냉면을 만들어 드렸다.
맵고 속이 쓰려 안절부절못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15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가슴 아프게 자리 잡고 있고, 그날은 배가 터져라 꿀물, 얼음물, 주스를 마구 마셔대셨다. “정말 죄송합니다. 너무 오바했어요.”
어린 시절 나는 오빠가 족히 6~7명이나 되는 대가족 속에서 살았다. 그러니 그 장정들이 훑고 지나간 밥상은 빈 접시들만이 나뒹굴고 있다. 뒤늦게 밥사발을 챙겨 들고 앉은 엄마와 우리 자매는 잠시 눈을 마주쳐보곤 밥 한 끼를 때운다. 엄마는 ‘대충 먹자’는 민망한 눈빛, 우리는 ‘콩나물 대가리라도...’ 나는 지금도 새우젓국에 호박 듬뿍 채썰러 넣은 맑은 국을 두 세 그릇 먹는다. 무를 썰어 넣은 갈치조림, 콩나물 무침을 수북히 담아놓고 보지만 그때가 너무도 그립다.
초등학생부터 입시전쟁에 내몰리던 시절, 학교나 과외나 너나없이 칠판 앞에 서서 매타작을 받곤 했다.
어느 날 막무가내로 누워 다 그만두겠노라고 떼를 썼었다. 다음 날 엄마는 학교로 과외로 소리 없는 행차를 했고 나는 바지 안에 체육복, 내의를 두껍게 껴입고 ‘퍽퍽’ 소리만 요란한 매타작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