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근무하는 응급실로 들어온 후, 3년 동안 중환자실과 병실을 오가다 죽음을 맞았다. 그때 어머니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지금도 어머니를 완전히 보내지 못했다. 별짓을 다해도 그게 잘 안된다. 끊임없이 덧나는 상처다. (1부 등단을 향한 여정 中 20p.)

종교는 두려움 극복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고 쭉 천주교 신자로 성장했지만, 내세 때윈 믿지 않는다. 모순되게도 나는 철저한 진화론자다. 신에게 의지하는 건,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에 내재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다. 숙명을 거스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든 필멸의 숙명을 받아들이고 싶어서다. 그런데도 죽는 순간까지 죽음을 두려워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1부 등단을 향한 여정 中 22p.)

죽음이 우리 삶을 관통하며 달려오는 기차라면, 삶읜 기차가 도착하기 전에 무언가를 하는 자유의지의 시간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언지 알고, 원하는 것을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시간. 내 시간 속에서 온전히 나로 사는 시간. (1부 등단을 향한 여정 中 25p.)

컴컴해지는 의식 너머에선, 축하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나는 욕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내가 뭐라고 대꾸했는지도 기억에 없다. 그저 고무장갑을 벗어 손에 틀어쥔 채 욕실 바닥에 엎어져 ‘엄마‘를 무르며 울던 기억만 남아 있다. 내 인생에서 삶이 그토록 눈부셨던 순간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2년 후, 다시 ‘세계문학상‘을 받았을 때에도, 그날의 빛이 재현되지는 않았다. (1부 등단을 향한 여정 中 35p.)

작가는 자기가 만드는 세계에 대해 신처럼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다. 내가 만든 세계에선 파리 한 마리도 멋대로 날아다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3부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법-자료조사 中. 111p.)

사실, 나는 어떤 작가로 분류되느냐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내 소설이 어떤 장르로 라벨링 되는가도 문젯거리는 아니다. 진짜 고민은 이런 것이다.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은지, 어떤 이야기를 잘 쓰는지, 어떤 이야기까지 쓸수 있는지.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3부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법-자료조사 中. 143p.)

실수는 할 수 있다. 다만, 실수를 깨닫는 순간, 즉시 바로잡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무리 공사가 커도 방설이거나 회피해서는 안된다. ‘뭐 어때,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잖아‘라고 자신을 기만해서도 안된다. 그건 해결책이 아니라 망하는 길이다.
(5부 1차 수정-그 장면이 필요 없다면 과감히 지워라 中. 225p.)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할 수 있는 이야기라면 최고로 좋을 것이다. 그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건, 의지와 능력이 대립하는 경우다. 내 경우 전자를 포기한다. 프로라면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할 수 없는 분야가 있다는 걸 인정하면, 포기 못할 것도 없다. 나는 SF를 좋아하지만 이야기할 능력은 없다. 그래서 이 장르는 독자로만 만족한다. 물론 처음부터 포기한 건 아니었다. 무엇이든 일단 덤벼보기는 한다. 이 일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려면 일단 해보는 것 말고는 길이 없으니까.
(5부 1차 수정-주제 中. 225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