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지 못한 빛깔이나 향을 지닌 꽃이 더러 있긴 하다. 그러나 실상 검은 꽃을 본다면 기분은 어떨까. 수술, 암술의 빛깔은?
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여운을 남기고 지나간 이들이 사랑스럽기는 하나 가련하고, 아득한 가슴에 찬 기운이 스치고 지나가는 이런 감상을 작가는 검은 꽃에 대한 느낌으로 받아들였을까.
조선이라는 한 국가가 망망대해의 한 점 잉크 방울처럼 서서히 사라져가던 1905년에서 1910년 무렵 지구 반대편의 땅에 던져져 사투를 벌이다 희망도 없이 누군가의 기억에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 이웃같은 이들의 이야기로 엮어져 있다.
가톨릭 신부 박광수 바오로, 박수무당, 양반 파평윤씨(이종도의 아내), 내시 김옥선, 농민 조장윤, 황족 이종도와 딸 연수, 아들 진수, 도둑 최선길, 고아 김이정, 군인 출신 박정훈을 비롯해 조선인 1033명은 영국선 일보도 호를 타고 가난과 멸시를 피해 멕시코로 향한다.
가혹한 노예생활, 채무기간은 4년. 그러나 시기를 채워도 고향을 향하거나, 조선인의 정체성과 자존을 지킨 이는 없었다.
중국 신문 문홍일보엔 이런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조선은 멕시코와 외교관계도 없었고, 손을 써보기엔 너무 멀었고, 힘도 없었다.
“중국에서 사람을 꿰어 사들이다가 소문이 나빠 응모자가 없자 조선에서 노예를 매수하고 있다. (...) 모두 조각조각 떨어진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신었으니 이곳 본토의 남녀가 보고 비웃는 소리는 가히 듣기 거북하다. 연일 큰 빗속에 한인이 여러 농장에 흩어져 일할 때 아이를 팔에 안고, 등에 업고 길가를 배회하는 모습은 실로 우마와 같고 (...) 농장에서 일을 제대로 못하면 무릎을 꿇리고 구타를 당하여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낭자하니...”
숭무학교라고 불린 군사학교 출신의 조장윤을 비롯한 42명은 괴테말라의 내전에 참가하여 교란이 끝난 그 곳에 ‘신대한’이라는 국호로 소국을 세우고자 임시정부를 두었으나 정부군의 소탕작전으로 모두 전사하니 작고 초라했던 나라의 흔적도 없이 단지 인골 두어개만 연구팀들에 의해 발견된 채 역사속으로 사라져갔다.
모래알 속에 스켜든 한 줌의 물 같이 사라져간 그들의 생각을 자시금 뇌까려보는 것으로 애처로운 영혼에 위로를 대신한다.
거대한 파도가 배의 옆구리를 밀어젖힐때마다 홀수선 아래의 화물칸에 수용된 조선인들은 예의와 범절, 삼강과 오륜을 잊고 서로 엉켜버렸다. 남자와 여자가, 양반과 천민이 한쪽 구석으로 밀려가 서로의 몸을 맞대고 민망한 장면을 연출하는 일이 잦아졌다. 요강이 엎어지거나 깨지면서 그 안에 담겨있던 토사물과 오물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욕설과 한탄, 비난과 주먹다짐이 일상사였고, 고약한 냄새들은 가시지 않았다.(41p.)
이정은 말했다. 거기에서도 저 조선에서처럼 반상과 노소, 남녀의 구별이 이리 엄할까. 우리가 탄 이 배를 보라. 양반이든 상것이든 줄을 서야 밥을 먹는다. 우리 위엔 저 양놈들 눈엔 똑같은 조선놈일 뿐이다. 머리만 셀 뿐 족보에는 관심이 없다.(78p.)
유카탄의 석양은 느즈막이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가 일순 사라져버렸다. 평생 지평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조선인들에게 이 벌판의 황막함은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자신들이 산과 산 사이에서 태어나 산을 바라보고 자랐으며 산등성이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잠자리에 들었음을 깨달았다. 넘어갈 아리랑 고개가 없는 끝없는 평원은 그야말로 낯선 풍경이어서 사람들은 딱히 바닥이 딱딱해서라기 보다 지평선이 주는 망막함과 공허로 뒤척였다. (92p.)
에네켄은 멕시코가 원산지다. 사람 키와 비슷한 크기다. 나무처럼 단단한 나무 줄기에 잎이 달린다. 육질의 잎은 두툼하다. 마치 선인장처럼 잎 가장자리를 따라 딱딱하고 뾰족한 가시가 무수히 나있다. 잎이 용의 혀를 닮았다하여 용설란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난은 아니다. 외떡잎 식물이며 백합목에 속한다. 건조한 기후에 강해 유카탄 반도와 같은 덥고 건조한 지형에 잘 어울린다. 에네켄과 사이잘 삼은 19세기 후반부터 유카탄 반도의 주요 생산물이 되었다.(98p.)
이종도는 지구 반대편에서 떠나온 조국의 처지를 애통해하며 집에 틀어박힌채 어떻게 해야 일본을 물리치고 힘 세고 부유한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그 고민의 결과를 종이에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은 현실과는 별 관련이 없는 이상적인 입론에 불과한 것이었다. 아침이면 서쪽을 향해 절하고 밤에는 틀어박혀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세우는 그를 비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219p.)
조장윤은 이미 수 많은 한인들이 결국은 멕시코에 남을 수 밖에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멕시코 전역에 흩어져있는 한인들을 규합하는 조직도 분명 필요해질 것이다. 지금이야 각 농장에서 계약 노동자 채무 노예로 묶여 있지만 내년엔 다를 것이다.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조직의 장으로 상상하기 시작했다. 여기야 말로 반상이 전무한 곳이다. 소수의 양반 계급 출신도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지 오래다. 제게 맡겨진 일 하나 제대로못해내는 자가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할 리가 없었다.(2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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