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회귀는 지금 자신의 삶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다. (...) 그리고 죽는 순간부터 나는 또다시 내 삶을 새롭고도 동일하게 반복한다. 어떤가? 끔찍한가? 아니면 기쁜가? 영원회귀는 우리로 하여금 ‘삶‘과 ‘순간‘이라는 두 종류의 시간의 가치를 뒤집어놓는다. (...) 영원한 순간에 비해볼 때 80년의 유한한 삶의 길이는 0에 수렴한다. 영원회귀를 깨달은 존재는 이제 삶의 방식이 바뀐다. 그는 먼 미래의 불확실한 목표를 향해 지금 이 순간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지금 이 순간을 가장 가치있고 의미있게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은 내 평생의 삶보다 훨씬 긴, 무한히 반복될 영원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비밀을 깨닫게 된 존재는 지금까지의 삶을 초월한 초인의 모습에 한 걸음 다가간다. (철학, 115~116p.)
의자는 본질로서 존재한다. 의자의 본질은 단적으로 ‘앉는 것‘으로, 의자의 본질은 개별적 의자보다 중요하다. 만약 특정 의자가 다리가 부러져서 ‘앉는 것‘이라는 본질을 상실했다면, 그 의자는 폐기될 것이다.(...) 말하지 못해도 인간은 가치가 있고,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인간은 가치가 잇다. 즉 인간은 의자나 돼지처럼 단일한 본질을 갖지 않는다. 이렇게 고정된 본질을 갖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존재자에 대한 이름이 ‘실존‘이다. 인간은 실존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철학, 132p.)
즉 소립자는 마치 우리가 관측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관측하고 있지 않을 때는 자신의 위치를 확정하지 않고 확률로만 존재한 채 두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해서 파동처럼 행동하지만, 관측을 시작하면 자신의 위치를 확정해서 입자처럼 행동한다. 다시말해 관측이라는 행위가 확률로 존재하고 있던 세계를 하나의 세계로 확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과학, 182p.)
야훼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했는데, 남성인 아담은 흙으로 만들어 만들고 여성인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만들었다. 다만 유대 신화에서는 이브 이전에 릴리트라는 여성이 아담과 동시에 창조된 것으로 나온다. 릴리트는 성관계를 중심으로 한 여성 평등을 주장하다가 아담과 갈등을 겪고 결국 홍해로 가서 악마가 된다. (...) 릴리트의 이야기는 이후 바빌로니아와 메소포타미아에 전파되었는데, 성경에서는 사라졌다.(종교, 276p.)
신체와 독립된 영혼은 존재하지 않고, 정신이라는 현상은 다만 뇌의 물질적 조건이 충족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인 것이다. 유물론적 관점은 물질적 기반이 충조될 때 나의 정신이 발현된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는 사후 세계나 윤회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견해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물론적 관점은 실제로는 반대로 윤회나 영원회귀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나의 정신이 물질적 조건이 충족될 때 발생하는 무엇이라면, 내가 죽은 후에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특정한 물질적 조건이 충족된다면 그때에는 나의 정신이 반복해서 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비, 336p.)
이러한 윤회의 가능성은 일반적으로 신체와 독립된 정신을 인정하는 물심이원론의 관점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독립된 정신를 인정하지 않는 유물론의 입장에서도 윤회를 설명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영혼이 있든 영혼이 없든 관계없이 윤회는 발생할 수 있다. (...) 영적인 존재가 없이 변화하는 물질세계만 있다고 하더라도 윤회는 발생할 수 있다. (...) 불교에서는 ‘무아‘를 말하는데, 여기서의 무아는 아트만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모순되지 않는가?(...) 답부터 말하면 윤회는 나의 의식이 반복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물질과 독립된 영혼이 없다고 가정해보자. 영혼이 없다고 해도 부정할 수 없이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은 세계를 보고 있는 나의 의식이다. 내가 세계를 보는 구심점으로서 의식적 존재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매 순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신비, 337~339p.)
내가 죽은 이후, 즉 물질의 소멸과 함께 의식적 능력을 상실한 다음에, 우주가 존재하는 동안의 이 무한에 가까운 시간 속에서 다시 우연적으로 물질적 조건이 대략적으로 충족된다면 나의 의식능력이 발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의 뇌 구조는 일반적으로 유사하므로, 과거 전체와 미래 전체의 인류의 뇌 구족의 다양성 안에서 지금 나의 뇌 구조가 유사하게 반복될 확률은 매우 높다. 즉 과거에도 미래에도 나의 의식능력은 반복적으로 출현했고 출현할 것이다. 이러한 의식능력의 반복을 윤회라고 이름 붙인다면 윤회는 독특한 사건이 아니라 우주의 일반적 사건일 것이다.(신비, 341p.)
그렇다면 내 눈앞의 세계가 나의 머릿속의 세계, 즉 의식세계라고 할 때 나의 외부에는 무엇이 존재하는가? 그것은 앞서 말했듯 칸트가 ‘몰자체‘라고 이름 붙였다. 실재 그 자체의 세계로서 물자체의 세계는 우리의 다섯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더듬어 볼 수 있을 뿐, 결코 인지할 수 없다. (...) 의식적 존재 전체를 통틀어서 의식 너머의 세계를 직접 접한 존재는 없었을 것이므로 물자체는 말할 수 없는 영역에 놓여있다. 다만 상상해 볼수 는 있겠다. 우선 물자체의 세게에 빛은 없을 것이다. (...) 실제 세계는 빛이 아니라 광입자들의 물리적 운동만이 있다. 광입자들은 빛나지 않는다. 광입자들을 빛나는 무엇으로 해석하는 것은 나의 의식이다. 따라서 의식 너머의 세계에는 빛이 없으므로 색깔이 없을 뿐만 아니라, 색깔이 머무는 표면이라는 현상도 없다.(...) 그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광입자, 운동, 인력, 척력, 상상할 수없는 것, 말할 수 없는 것들만 존재한고 있다. 내 눈앞의 세계가 실제의 세게와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에게 심적 위안을 주는 믿음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신비, 365~3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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