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28살을 눈앞에 둔 여류 잡지사의 여기자와 암울한 어린 시절을 겪으며 성장하여 사회적인 명성을 떨친 - 그러나 그는 늘 삶의 쓸쓸함과 덧없음을 풍기는 스산한 겨울 분위기를 벗어버리지 못한다. - 유부남인 미술가와의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이다.

 두 지성인이 사회적인 윤리나 관습, 열정적인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습을 여주인공의 일기를 빌어 그려내고 있다. 결국 가족들과의 도덕성조차도 예술에서 배제할 수 없다는 남성의 결단으로 사회적인 통념을 극복하지 못하는 보수적(?), 고전적(?) 결말을 맺는다. 여주인공 희원은 시인으로 등단함으로써 예술가들의 자유분방함을 빌어 이 사랑을 지속시키려하나 일방적인 상대의 의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희원이 새 삶을 시작하면서 지난 일 년 간의 과거를 흘려보내는 예식으로써 자신의 사랑의 흔적인 일기장을 읽어 내려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는 내일이면 한 남자의 아내가 된다. 그 남자는 건강하고 쾌활하고, 아마는 성실하다.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의 이름은 앞으로의 내 삶에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자에게 있어서 결혼은 하나의 레테(망각의 강)다. 우리는 그 강물을 마심으로써 강 이편의 사랑을 잊고, 강 건너의 새로운 사랑을 맞아야 한다.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오직 그 새로운 사랑으로 남은 삶을, 그 꿈과 기억들을 채워 가야한다.

 나는 지금 그 강가에서 나를 건네줄 사공을 기다리고 있다. 내 귓전에는 느릿느릿 저어오는 그의 노소리가 들린다. 나는 가리라. 앞서의 수많은 여인들이 희망과 기쁨으로 또는 탄식과 눈물 속에 건너간 이 뱃길을 가리라. 강 이편의 그 무엇에도 연연함이 없이.

 그리하여 나는 이제 그 홀가분한 출발을 위해 지난 세월과 마주하고 섰다. 내가 새삼 이 일기장을 펴드는 것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미혼 시절을 향한 허심한 목례, 여기에 담겨진 기억들을 망각의 불속으로 던져버리기 위한 마지막 작별의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은 현란한 애증의 그림자를 벗어버리지 못했지만 이윽고는 똑같은 빛깔로만 떠오르게 될 시간들이여. 한때는 내 삶에 버금가는 소중함이었지만 이제는 끝 모를 침묵과 어둠속으로 살아져 가야 할 기억들이여. 기쁠 수도 슬플 수도 없는 노래여.

 

 그리스 신화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리비디아라는 소도시에 바위 틈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샘물이 있는데 오른쪽으로 흐르는 물은 므메모쉬네(기억의 샘물), 왼쪽으로 흐르는 물은 레테(망각의 샘물)이다. 그 두 샘물이 어우러져 하나의 시내를 이루는데 이 시내의 이름이 바야흐로 LIFE(인생)! 어찌 사랑과 이별을,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려고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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