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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도치의 회고록
알랭 마방쿠 지음, 이세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가시도치의 회고록은 특별하다. 이제껏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흑인작가의 작품은 몇 번 읽은 적이 있었지만, 그가 아프리카인이였던 적은 없었다. 알랭 마방쿠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작가가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지 궁금했다. 일단 토인이라서 그런지 자연친화적인 느낌이 와닿았다.
처음 페이지를 넘겼을 때, 나는 혼란에 휩쌓였다. 주인공인 화자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 같으면서도 자기 혼자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 ~지'로 이루어지는 간결체도 아니고 만연체도 아닌 이 특이한 문장구조는 문장의 끝이 어딘지 알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결국 한 번 읽다가 끊고 다시 읽으려고하면 한 문단이 끝날 때 까지 기다려야 했다. 안타깝게도 이 특이한 문장구조는 한 문단이 4페이지 까지 차지할 때도 있었다. 그나마 그 것도 마침표없이 나누어져있었다.
당신이 지금하는 이야기를 신에게 해보시구려, 신이 포복절도할 테니까. (p.21)
이 독백의 대화가 가시도치와 바오바브나무의 대화인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내용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인간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시도치 마을을 떠나 인간의 세계로 가는 가시도치, 느굼바. 느굼바는 인간의 세계를 저주의 공간으로만 생각하는 가시도치 부락을 떠나 인간의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작가의 시선이다. 그렇다고 인간을 긍정적으로만 생각하지도 않는 중립적인 입장이다. 아마 인간세계를 부정적이고 퇴폐적이며 호전적으로만 바라 봤다면, 느굼바는 인간세계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느굼바는 키방디의 분신이기도 하면서 작가의 분신이기도하다. 자신이 직접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가시도치라는 동물의 몸을 빌려 표현한 것이다. 입문 음료인 마얌붐비를 먹는 주인의 모습을 보고 같이 괴로워하는 것에서 느굼바가 키방디의 분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키방디가 죽은 후에도 살아있는 모습에서 작가의 분신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느굼바의 몸은 키방디의 분신으로서 일하기는 하지만 정신에는 서구의 학문을 받아들인 지식인이 들어있다.
여기서 잠깐 짚고 가야할게 있다. 바로 가시도치의 존재이다. 여기서 나오는 가시도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고슴도치가 아니다. 아프리카에는 고슴도치가 살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호저, 산미치광이라고 불리는 쥐과 동물이다. 고슴도치와는 쥐目과 식충目의 관계로 조상부터가 다른 동물이다. 그렇다면 옮긴이는 왜 가시도치라는 이름을 빌려왔을까. 그건 굳이 말하지않아도 짐작이 갈 것이다. 호저나 산미치광이라는 이름보다는 가시도치가 더 친근하게 다가오지 않는가. 물론 가시도치라는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보다는 쥐와 가시도치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같은 쥐目이면서도 동굴에서 가시도치는 쥐를 나약하고 겁많은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마치 황인이 흑인을 무시하고 백인이 황인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물론 일단은 즐겨야지, 나도 즐기고 내 짝도 즐겨야지. (p.199)
분신과 주인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나는 이 둘의 관계를 노예제도에 빚대어 생각해 보았다. 노예들은 갖은 더럽고 천한 일들을 도맡아서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것은 아니다. 카방디의 분신이 된 느굼바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것이 아니라, 주인이 시켰기 때문에 복종했을 뿐이였다. 그렇다면 더러운 존재는 누구인가. 그 일을 시킨 주인일까. 아니면 그 일을 직접한 분신일까. 자기 자신이 의지 따위는 존중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분신과 노예의 행동이 비난 받을 수 있을까. 누가 더 더럽고 천한 존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