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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칭성 인류학 - 무의식에서 발견하는 대안적 지성, 카이에 소바주 5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5년 11월
평점 :
I. 서론
오늘날, 세계는 생태계가 붕괴하고 문명이 상호 테러를 일삼는 부조화의 극치에 있다.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극심한 불균형에 처해 있는 상태를 본 논문에서는 ‘압도적 비대칭’으로 정의할 것이며, 이러한 비대칭의 대표적인 사례는 인간중심적 혹은 서구중심적으로 편향된 가치관이 가져온 생태계의 파괴와 문명 간(間) 충돌을 들 수 있다. 본 논문의 목적은, 이러한 비대칭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개념으로 ‘대칭성 원리’를 회복하거나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한 긴급하게 필요함을 증명하는 데 있다. 이를 효과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압도적인 비대칭의 괴물성(怪物性)을 탁월하게 형상화한 메리 셸리Mary Shelly(1797~1851)의 『프랑켄슈타인』(원제: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을 선정하여 이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 하겠다.
메리 셸리의 본 소설은, 그것이 지닌 기괴성과 특이함으로 인해 영문학 비평사에서 한우충동(汗牛充棟)할만한 해석을 생산하였는데, 본 논문에서는 우선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비평 담론을 정신분석적,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즘적 비평 담론으로 한정하여 기존 해석을 개관하고 그 한계를 밝힐 것이다. 이들의 해석은, 인류사에 있어 은폐되거나 억압된 존재를 조명(照明)한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찬사(讚辭)를 받을 만하나 여전히 비(非)대칭적 이분법을 고수하거나 아예 무(無)대칭적 초분법(超分法)의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 한계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여 본고는 『프랑켄슈타인』의 궁극적 교훈이 부조화와 불균형의 비대칭성이 야기한 파국을 피하기 위하여 조화와 균형을 지향하는 ‘대칭성 원리’의 회복 및 유지에 있음을 논리적으로 입증, 그 당위성을 설파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에서 보여주고 있는 비극적 결말은, 우리의 미래가 작금의 극단적 편향성 및 이분법을 지양해야 함을 적극적으로 경고하고 있기에 그것의 대안으로 균형 잡힌 조화, 즉 대칭성 원리의 회복을 역설(力說)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아 이를 정당화하는 논의 구도를 중심으로 논술하고자 한다.
본 논문의 연구 방법은 영상자료를 참조하되 문헌을 중심으로 비평적 해석을 진행할 것이며, 중점적 해석의 대상이 되는 문헌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영문 원서(Frankenstein, New York : Kaplan, 2004.)와 국역본(『프랑켄슈타인』, 오은숙 옮김, 미래사, 2002.) 이다. 더하여, 본 논문의 해석틀이자 핵심 개념인 대칭성 개념은 크게 인류학, 정신분석학 그리고 역학(易學)으로 한정하여 개념을 추출, 활용하고자 하는데, 이 과정에서 개념을 일의적으로 정의(定義)하지 않고 각 분야에서 도출된 대칭성 개념을 다양한 장면에서 시의적절하게 활용할 것이다. 인류학에서는 나카자와 신이치의 『대칭성 인류학』과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그리고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를, 정신분석학에서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근본 개념』과 슬라보예 지젝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를, 역학(易學)에서는 김상일의 『역(易)과 탈현대의 논리』와 고회민의 『주역철학(周易哲學)의 이해(理解)』를 주 텍스트로 삼아 대칭성 개념의 풍부한 응용과 심화를 도모할 것이다.
II. 대칭성 원리
이번 장에서는 본 논문의 핵심이 되는 ‘대칭성 원리’의 전반적인 의미를 숙지하고 인류학․정신분석학․역학에서 발견되는 그것을 문헌들을 참조하여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제(諸) 대칭성 원리
대칭성 개념도 주체와 대상, 인간과 자연, 뜨거움과 차가움처럼 이분된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일반적인 이원론처럼 ‘비대칭적’이지 않다. 동시에 대칭성 개념은 상반되는 것들의 조화로운 균형을 지향한다는 면에서 일원론과 유사하지만 ‘하나’인 것은 아니다. 가장 근사하게 대칭성 개념을 설명하는 용어는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로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다만, 어떠한 경우에도 대칭성 개념은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거나 회복하려는 생명의 자기생성체계(Autopoiesis system)1)이자 우주적 원리임을 특별히 강조하고자 한다.
1-1. 인류학에서의 대칭성
『대칭성 인류학』의 저자인 나카자와 신이치는 오늘날의 세계가 대칭을 이루려고 하기는커녕 하나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파멸의 징후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그 ‘하나’만을 추구하는 ‘일(一)’의 원리가 ‘세 가지 출현’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그것은 “신을 둘러싼 종교의 영역에서 발생한 ‘일신교 신의 출현’과, 경제의 영역에서 발생한 화폐경제의 발전형태로서 ‘자본주의의 출현’, 그리고 정치권력의 영역에 발생한 ‘국가의 출현’, 이 세 가지”2)로 이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불행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는 다음과 같이 언명한다.
현생인류가 행복을 느낄 때, 항상 거기에는 대칭성, 다차원성(고차원성), 개체와 전체의 일체감 등, 증여의 원리와 관련 있는 많은 특징들이 절묘한 작용을 하게 마련입니다. 교환을 토대로 하는 자본주의에는 무의식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원리’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인간이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식의 상투적 표현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습니다. 현생인류의 ‘마음’에 대칭적이며 고차원적인 무의식이 활동을 계속하는 한, 복논리적인 사회가 아니고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 엄연한 진리라고 할 수 있겠지요.3)
즉, 그는 인간의 마음 자체가 대칭적이기 때문에 대칭성을 구현하는 쪽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다. 클로드 레비-스토로스의 인류학에서는 비서구 문명권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한 ‘서구중심주의’와 자연정복을 지향하는 ‘인간중심적 사고’ 등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대칭성 개념을 모색하고 있다. 예컨대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를 번역한 역자 안정남은 이렇게 말한다.
레비-스트로스는 문명인의 사고를 추상의 과학으로, 미개인의 사고는 주술적이고 감각적인 ‘구체의 과학’ 으로 판단한다(다른 표현으로 신화적인 사고). 즉, 그는 “주술과 과학을 발전단계로서가 아니라 사물을 이해하는 두 개의 서로 다른 태도로서 파악한다.”4)
우리는 레비-스트로스의 저서에서 야생의 사회가 지닌 ‘구체의 논리’와 ‘신화적 사유’를 결코 폄훼해서는 안 되며, 문명-비문명을 자의적으로 구분하는 오만함을 지양해야 하고, 서로가 대칭적 조화를 이루어야 상생할 수 있음을 배울 수 있다. 다음으로, 인류학자를 연구하는 인류학자 브뤼노 라투르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대성5)은 내적으로 자연과 사회를 분할하고 다시 외적으로는 문명(우리)와 야만(그들)을 구분하면서 양쪽에 대한 비대칭적인 시각을 요구해왔다. 자연은 사실의 영역으로 연구하고 사회는 가치의 영역으로 다룬다거나, 문명은 과학적 합리성과 문화 모두를 통해 이해하고 야만은 그들만의 특수한 문화를 통해서만 이해해야 한다는 등의 비대칭성이 그것이다.6)
라투르는 인간만이 주체이고 인간의 생존 조건인 자연이나 인간이 제작한 기계 등은 대상에 불과하다고 치부한 근대인의 이분법을 비판하여 인간-비인간7)간(間)의 주체-대상의 상호성, 즉 대칭적 공존의 역사가 앞으로 ‘공식적으로’ 시작되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1-2. 정신분석학에서의 대칭성
정신분석학에서는 ‘무의식’의 억압과 은폐가 결코 해소되지 않고 반드시 귀환한다고 한다. 학자에 따라 이러한 무의식의 귀환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본 논문에서는 이를 의식과 무의식의 대칭적 조화의 요구로 해석하여 논하고자 한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의식의 정신 활동이 존재한다는 정신분석의 가정은 한편으론 우리 주변에 우리의 의식과 똑같은 의식이 있음을 깨닫게 하는 원시적인 정령설(精靈說)을 좀더 확대시킨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고쳐야 한다고 한 칸트의 주장을 확대시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의 인식이나 지각은 주관적으로 조건 지어진 것이며, 따라서 인식 불가능한 인식 대상을 우리의 인식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칸트와 마찬가지로 정신분석 또한 의식을 통한 인식을 인식의 대상인 무의식의 정신 과정과 동일한 것으로 보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것은 본질상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과는 다르다.8)
때때로 우리는 무의식의 힘을 간과하며 ‘의식’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그러나 이미 프로이트가 언명하였듯 무의식은 우리의 의식과는 다른 것으로 그것의 숨겨진 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 미국의 저명한 인류학자이자 생태학자인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으로 간주될 수 있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늘날 육체와 분리되고, 사회와 분리되고, 자연과도 분리되어 있는 총체적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믿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미신’이라고 말할 사람들을 위해, 나는 그런 미신과 함께 하는 사고 습관과 사고방식이 아직도 그들의 머릿속에 있으며 아직도 그들의 사고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는 것을 즉시 증명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장담한다. 여러분은 나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지적으로는 알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나를 볼 수 있다는 관념은 여전히 여러분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 같은 식으로, 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잘못된 것으로 알고 있는 인식론에 지배되고 있다.9)
이미 언급했든, 여기서의 ‘마음’은 육체와 사회와 자연과 분리된 커다란 빙산과 같은 무의식이며, 그것을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그것은 인간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럼에도 사람들 대다수는 고집스럽게 의식만이 ‘모든 것’이라고 믿는 잘못된 인식론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1-3. 역학(易學)에서의 대칭성
역학(易學)은 대칭성에 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역(易)의 강물은 음양 대칭의 완전한 조화라는 바다를 향해 흐름을 이루어 흘러가고 있다.”10)는 김상일의 단언에서도 알 수 있다. 특히 태극으로 표상되는 음양(陰陽)의 조화와 건곤(乾坤) 병존설 등이 대표적인 대칭성의 상징이다. 태극이란 용어는 공자가 「계사전」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한다.11)그런데 역학사(易學史)에서 태극의 기원에 관한 논쟁이 있다. 주렴계의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란 표현을 둘러싸고 주자학파와 상산학파의 논전이 있었다.12)여기에서는 그 논전의 내용을 생략하되 주자의 “주렴계 선생은 학문하는 사람이 태극을 어떤 사물처럼 오해하지는 않을까 염려하여 일부러 ‘무극’이란 두 글자를 덧붙여서 그 점을 명확히 했던 것이다.”13)라는 말을 수용하고자 한다. 즉 삼라만상의 기원이면서 동태적(動態的)인 우주 운영의 원리로서의 태극 개념으로 해석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한편 박석준은 ‘음양(陰陽)’에 대하여 “음이 지나치면 한질(寒疾)이 생기고 양이 지나치면 열병(熱病)이 생긴다.”14)고 말한다. 음과 양을 놓고 볼 때, 이 둘은 양분적이지만 어느 것 하나도 지나치면(압도적이면)안 된다는 것이다. 음양개념이 중요한 까닭은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지극히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에 가까운 개념적 형상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과 동태성15)에 있다. 음양론 유사한 ‘건곤(乾坤) 병존설’을 고회민은 건곤의 대립과 통일로 정식화하여 설명하고 있다.
대립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반대이고 나머지 하나는 상대이다 (……) 반대라는 뜻은 선후가 없고, 오직 동시이다. 이쪽에서 가는 것은 저쪽에서는 오는 것이고, 중국이 낮일 때는 바로 미국이 밤일 때이다. 《노자》에서,
“천하는 다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인 줄만 아니 이는 악일 뿐이고, 모두 선이 선인 줄만 아니 이는 불선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유와 무가 서로 생기고, 어려움과 쉬움이 서로 이루어지고, 장단이 서로 나타나고, 높음과 낮음이 서로 기울어지고, 음과 소리가 조화되고, 앞과 뒤가 따른다.”
아름다움과 더러움, 선과 불선, 유와 무, 어려움과 쉬움, 장단, 고하, 전후 등은 모두 동시에 출현하여 뜻은 서로 반대되지만 서로 같은 근원을 가진다 (……)
상대(相對)는 무슨 뜻인가? 건양과 곤음이 서로 대립하는 것을 말하는데, 상착(相錯)이라고도 한다. 음양은 원래 태극의 변화로서 유전(流轉) 중에 왕래가 있기 때문에 음과 양으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음양의 상대는 태극의 자체 성질의 차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전작용의 이동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음양은 서로 유전하기 때문에 양은 변하여 음이 되고, 음은 변하여 양이 되어, 마치 물을 끓여 수증기로 만들고, 수증기가 모여 다시 물이 되는 것과 같다.16)
여기서, 역학에서의 대칭성 의미가 보다 명확해진다. 즉, 건도와 곤도는 대립된다(반대이고 상대이다). 그러면서 건과 곤은 매사 조화롭게 공존하며, 그것들의 변화로써 만물이 생산된다. 이러한 태극의 성질은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라는 수식어로도 형용된다. 현존하는 한국의 대표적 철학자 김형효는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일함(一)은 동일하지않음(非一)에 상응하므로 다름에 상관적이어서 다름과 같이 동거하며, 다름(異)은 다르지 않음(非異)에 상응하므로 동일함에 상관적이어서 동일함과 동거한다.” 오른쪽은 왼쪽과 다르지만 왼쪽이 없으면 오른쪽도 존립하지 못하고, 반대로 왼쪽도 오른쪽과 다르지만 오른쪽이 없으면 왼쪽도 성립하지 못한다.17)
이는 고회민이 내린 태극의 정의인 “그 자체로 혼연한 일체로서 이것 혹은 저것이라는 구분을 할 수 없는 것18)”과 같은 맥락이다.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나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란 표현은 대칭성 그 자체가 이원론이나 일원론과 어떻게 다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2. 대칭성 개념의 문명사적·실존적 의의
인류학, 정신분석학, 역학의 세 가지 분야에서 살펴보았듯이, 대칭성이란 압도적인 양극으로의 분절이 아닌, 상호작용하는 극(極)들의 조화의 과정을 의미한다. 세계는 지금 자연과의 분쟁, 문명 간의 분쟁, 지역 간의 분쟁, 이념 간의 끝없는 분쟁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분쟁을 종식시키거나 최소화시키기 위해서 본고에서는 대칭성 개념을 내세우는 바, 상반되는 가치와의 동거가 필요하고 이질적인 타자와의 화해가 긴요하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9월 11일 이후 유네스코는 인류가 앞으로 나침반으로 삼아야 할 가치관을 모색하기 위해 세계적인 석학들과 대담을 가진 바 있다. 이 대담 중에서 엘레 베지 교수는 하나의 세계를 추구하는 동일성의 폭력이 세계를 유배시키고 추방시켰다고 보고 있으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대칭적 세계 구성을 제안하고 있는데 이는 본고에서 주장하는 대칭성 개념의 '문명사적 의의'를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만약 단지 하나의 세계만이 있다면, 그 세계는 살아갈 수 없는 곳이 될지도 모른다. 인간적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개의 세계가 있어야만 한다. 전쟁터와 피난처, 여행과 복귀, 과거와 미래, 빠름과 느림, 해 뜨는 곳과 해 지는 곳, 서양과 동양, 우리가 그로부터 나온 장소와 우리가 갈 안식처, 출발지와 지평이 있어야 한다. (……) 세계의 유배, 추방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두 세계에 대해 상상해야 한다.”19)
이러한 문명사적 필요 외에 개인의 실존방식에서도 의미를 두고자 한다. 압도적인 비대칭적 경쟁사회에서 개인은 페르소나에 매몰되어 가고 있고 비인간화되어가고 있다.20)개인의 실존방식이 균형을 찾으려면 대칭적 생활방식과 사유방식이 긴급히 요청된다.
정리하자면, 대칭성 개념의 문명사적 의의는, 대칭성 개념이 담보하는 조화와 균형만이 인류전체의 번영과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우주론이라는 점에 있고, 실존적 의의는 개인의 자각에 의한 대칭성 개념의 실천적 도입이 개인의 삶을 조화로 이끌 것이라는 점에 있다.
III.『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선행연구
『프랑켄슈타인』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주로 정신분석적,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즘적 비평 담론으로 연구된 바 있다. 필자는, 본 소설에 대한 새로운 독법을 제시하기에 앞서 위의 담론들을 개관, 선행연구의 의의와 한계를 제시하겠다.21)
1. 페미니즘적 연구
페미니즘 담론 장(場)에서는 괴물을 역사적으로 소외되고 배제된 여성으로 간주한다. 리정화는 『프랑켄슈타인』의 표면적 주제인 작위적인 생명창조라는, 과학기술에 대한 경고의 다른 측면에는 주변화 된 여성의 위치 그리고 여성의 부재가 놓여 있으며, 이에, 남성중심의 세계에서 타자화(他者化)된 여성과 추악한 외면을 가진 괴물은 남성적 혹은 가부장적 주체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는 존재라는 점에서 공통점 지닌다22)고 이야기한다.
즉, 괴물은 외관상으로는 추한 존재일 뿐이지만, 그것이 내포한 의미는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희생되고 소외되는 ‘타자’로서 보여진다. 이에 조미정은 『프랑켄슈타인』은 남성적 사회에서 소외되어 ‘죽음’을 맞이하는 나약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죽음’으로서 남성중심의 여성에 대한 압력에 저항한 ‘전략적’인 소설23)이라고 지적한다.
2. 마르크스주의적 연구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은 괴물을 산업혁명의 생산물이자 착취당하는 노동자로 규정한다. 괴물은 일차적으로 ‘생산물’이다. 그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창조의 결과로서, 이때 박사는 ‘생산자’가 된다.
조미정은 괴물의 노동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있는데(노동자로서의 괴물), 드 레이시 가족을 위해 자신의 존재는 드러내지 않은 채 ‘선한 정령’으로서 괴물은 노동을 행하나 그것은 그가 바랐던 ‘사회적 관계’를 가져다주지 못한 채 결국 ‘사회성으로부터 소외’된다24)고 지적하고 있다. 즉 소설에서, 괴물은 드 레이시 가족의 근처에 숨어서 살아가며 그들을 지켜보고 그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느껴 그들에게 장작을 패다 주는 등 선행(善行)을 베푼다. 이러한 과정에서 괴물은 그들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과 인간들 사이에서의 소외 경험을 두고 고뇌한다.
결국, 괴물은 드 레이시 가족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만 다시 한 번 상처만을 입은 채 창조자인 박사에게 결국 복수를 꿈꾼다. 조미정은 이를, 착취당하는 노동자로서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을 ‘노예’로 부름으로써 반역을 꾀한다고 표현한다. 즉, 그들의 관계-주인과 노예-는 전도되어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을 착취하고 고립시키며, 이에 박사는 사력을 다해 괴물을 쫓지만(노동) 항상 실패하는(노동의 결과에서 소외당하는) 노동의 굴레에 종속된 ‘노예’일 뿐이라25)는 것이다.
3.정신분석적 연구
정신분석학에서는 괴물을 의식이나 현실에 드러나지 않는, 억압되거나 애써 무시되는 무의식적 존재로 여긴다. 즉, 소설에서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괴물을 언어를 사용하고 사유할 줄 아는 의식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고, 겉모습처럼 흉측하고 이성적 능력이 부재한 공포의 대상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괴물은 언어를 습득하고 분노와 슬픔을 학습하며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이에 조미정은 괴물의 표면적인 흉측함이 아닌, 그것이 가진 ‘존재의미’가 비평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무의식(심상계)과 의식(계)의 대립을 괴물이 언어를 습득하고 사용하며 발생하는 사건들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26)고 하였다. 괴물은 자발적인 학습을 통하여 무의식(심상계)의 상태에서 의식(계)의 상태로 건너오게 되지만, 인간들에게 있어 ‘타자’인 그는 여전히 ‘무의식적’인, ‘무의식적이어야만 하는’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박소영은 그녀의 논문「귀환하는 실재에 응답하는 디지털 주체」에서 위의 담론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녀는 정통 프로이트주의의 의식-무의식의 대립 구도를 벗어나 무의식적 주체의 존재의미를 ‘디지털 주체’라는 개념으로 끌어 올린다. 다시 말해서 괴물이야말로 “주체의 불완전성을 드러내고 주체의 위상에 관한 회의를 촉구하며 (……) 주체 중심의 질서 체계에 내재한 허구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 준다”며 사이버 스페이스(cyber space) 시대에 적합한 주체라고 주장하고 있다.27)
4. 선행연구의 의의와 한계
간략하게 살펴본 선행 연구는 은폐되었거나 억압된 존재를 조명(照明)한 공로만으로도 찬사(讚辭)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들이 지니는 한계는 괴물과 닥터 프랑켄슈타인의 관계를 비(非)대칭적인 ‘이분법’ 또는 무(無)대칭적 ‘초분법(超分法)’으로만 파악했다는 것이다.28)
페미니즘 비평에서는 여성과 남성으로, 마르크스적 연구에서는 생산자와 노동자로, 정신분석학 담론에서는 의식 대 무의식으로 이분하여 어느 한쪽 항(項)만을 특별히 옹호하고 있거나 아예 이분적 대립항을 없앤 채 혼성적 자아를 도래하는 미래에 걸맞는 주체로 격상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필자는 대칭성의 관점에서 비대칭적 이분법과 무대칭적 초분법 양자를 지양(止揚)하려는 입장에서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분석을 진행할 것이다.
IV. 대칭성 개념을 중심으로 한『프랑켄슈타인』해석
이번 장에서는 II장(대칭성 원리)에서 설명한 ‘대칭성’의 개념을 중심으로 『프랑켄슈타인』을 분석하고자 한다. 기존의 연구들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괴물의 비대칭적 관계에 중점을 맞추어 왔던 반면, 본 연구에서는 그 두 인물의 관계에서 나타난 비대칭의 문제뿐 아니라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괴물 각각에 나타나는 비대칭성까지도 분석하여 대칭성의 필요가 양자 모두에게 요청됨을 논증하겠다.
1.『프랑켄슈타인』에 나타난 압도적 비대칭성
위 저서에 나타나는 다양한 비대칭적 요소 중, 우선 박사의 비대칭성에 대해 살펴보자.
1-1.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비대칭성
프랑켄슈타인의 어린 시절은 매우 유복하고 조화로운 환경이었다.
두 분은 이탈리아를 떠나 독일과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들의 첫째 아이인 나는 나폴리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그 정처 없는 유랑생활을 같이 했다. 꽤 오랫동안 나에게는 형제가 없었다. 두 분은 서로를 깊이 사랑한 만큼, 사랑의 광산에서 무한한 애정을 캐내어 나한테 퍼붓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다정한 손길과 아버지의 인자한 웃음은 내가 첫 번째로 떠올리는 기억이다.
나는 이들의 장난감이자 인형이었고, 그 이상의 존재였다. 이들의 아이, 천진하고 여린 그 존재는 훌륭한 사람으로 키워내라고 하늘이 내려준 것이었다. (52-53)29)
나만큼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도 없을 것이다. 부모님은 자상함과 친절함의 표본이었다. 자신들의 기분에 따라 우리의 운명을 지배하려고 드는 폭군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는 많은 기분을 주선하고 만드는 분들이었다. 어쩌다 다른 가족들과 어울릴 때마다 나는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 확인할 수 있었고, 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식 된 도리를 다하고자 했다.
나의 기은 때때로 격하게 끓어올랐고 욕정은 거셌다. 그러나 내 격정은 유치한 오락거리를 추구하는 대신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올랐는데, 그렇다고 내가 닥치는 대로 전부 다 섭렵한 것은 아니었다. (59)30)
박사가 자신의 입으로 이야기하듯, 그가 가진 격정적인 기질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년은 부모님의 노력으로 조화로운 대칭적인 상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칭성은, 어머니의 죽음, 대학에의 입학 등의 변화로 인해 깨어지고 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과학에 대한 열정적 숭배가 균열의 결정적 이유로 작용한다. 31)
암호들이 차례로 풀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머릿속이 한 가지 생각, 한 가지 구상, 하나의 목적으로 채워졌다. 프랑켄슈타인의 영혼이 외쳤다. 그렇게 많은 업적이 이루어졌다면, 앞으로 내가 더 많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루리라. 이미 찍힌 발자국을 따라가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미지의 힘을 탐사할 것이며, 창조의 가장 은밀한 신비를 세상에 펼쳐 보이리라.
그날 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 마음은 들끓는 폭동 상태였다. 앞으로 질서가 잡힐 거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내 스스로 마음을 다스릴 능력이 없었다. (……) 남은 것은 오직 옛날의 공부로 돌아가서 나 스스로 천부적 재능이 있다고 믿는 과학에 몰두하자는 결심뿐이었다. (75-76)32)
박사는 이내 마음의 균형을 상실한다. 그는 어린 시절의 과학지식과 문학의 조화를 버리고 급작스럽게 과학만능주의적 태도로 선회하는데, 급기야 박사는 죽은 생명체를 재탄생시킬 결심을 하게 되고, 그것에 몰두한다.
그렇게 한 가지 목표에 정신과 마음을 빼앗긴 동안, 여름은 지나갔다. 그해 여름은 여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들판은 어느 해보다 더 풍족한 수확을 안겨주었고, 과수원에서는 여느 때보다 탐스런 포도들이 포도주 통에 들어갔다. 그러나 내 눈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 주변의 것들을 보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멀리 떨어진 친구들, 오랫동안 보지 못한 사람들마저 잊어버리게 되었다. (85)
The summer months passed while I was thus engaged, heart and soul, in one pursuit. It was a most beautiful season; never did the fields bestow a more plentiful harvest, or the vines yield a more luxuriant vintage―but my eyes were insensible to the charms of nature. And the same feelings which made me neglect the scenes around me caused me also to forget those friends who were so many miles absent, and whom I had not seen for so long a time. (75)
박사의 생각이 외곬으로 달리면서 어린 시절 보여주었던 심미적 감각이 점차 상실되어가고 있었고 인간관계마저 파탄으로 향해가고 있음을 위 단락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외곬의 생각이 비대칭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좀 더 종합적인 인식론적·존재론적 틀에서 사유했더라면 소설의 비극적 결말만큼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사는 맹목적인 광기에 사로잡혀 결국 괴물을 창조하고 말았다. 짜깁기되어 재탄생한 괴물을 보고 박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너무 늦고 말았다. 더욱이 지금까지의 몰두와는 달리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며 ‘직면’하기보다는 ‘회피’하고 만다. 여기에서만큼이라도 만약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곧바로만 수행되었더라면 많은 비극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인데, 놀랍게도 박사는 또 다른 비대칭으로 도주하고 만다. 그래서 자신의 짝을 만들어 달라는 괴물의 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한다.
나 혼자만의 이익을 위해, 앞으로의 세대들에게 이런 저주를 부를 권리가 있는 걸까? 전에 나는 내가 창조한 존재의 궤변에 감동 했었다. 실은 그 악마적인 위협에 꼼짝없이 당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비로소, 내 약속의 부도덕성을 깨닫게 되다니. 후손들이 나를 자기만의 이기심에서 인류 전체의 존재와 자신의 평화를 맞바꾼 벌레만도 못한 놈이라고 저주할 생각을 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242)
Had I a right, for my own benefit, to inflict this curse upon everlasting generation? I had before been moved by the sophisms of the being I had created; I had been struck senseless by his fiendish threats. But now, for the first time, the wickedness of my promise burst upon me; I shuddered to think that future ages might curse me as their pest, whose selfishness had not hesitated to buy its own peace at the price perhaps of the existence of the whole human race.(308)
박사의 고백은 반성이라기보다는 인간중심적인 허위의식의 탄로로 느껴진다. 이에 더하여 소설의 후반부에서 토해내는 박사의 고백은 그의 무책임하고 터무니없는 당당함을 보여준다.
이 마지막 며칠 동안 내 지나온 과거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네. 남한테서 욕을 들을 만한 일은 없었어. 열정적인 광기에서 이성을 가진 존재를 창조했고, 내 힘이 미치는 한 그의 행복과 안녕을 보장해 주려고 했었어. 그것이 나의 의무였지.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어. 내 동료 인간들에 대한 의무가 내 욕심보다 더 중요했어. 인간들이, 행복과 불행에서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나는 그 첫 번째 피조물의 반려자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거절했던 것이고 그것이 옳았어. (518)
During these last days I have been occupied in examining my past conduct; nor do I find it blameable. In a fit of my past conduct; nor do I find it blameable. In a fit of enthusiastic madness I created a rational creature, and was bound towards him, to assure, as far as was in my power, his happiness and well-being. This was my duty; but there was another still paramount to that. My duties towards my fellow-creatures had greater claims to my attention, because they included a greater proportion of happiness or misery. Urged by this view, I refused, and I did right in refusing, to create a companion for the first creature. (415-417)
대학시절 그는 자신의 과학만능주의에 사로잡혀 괴물을 창조하였다. 그러나 이후 그는 인간중심론에 사로잡혀 괴물의 요구를 묵살하고 만다. 어느 경우든 둘 다 비대칭적 태도라 볼 수 있으며 무책임했다고 규정할 수 있다.
1-2. 괴물의 비대칭성
기실 괴물은 인간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며 인간의 세계에 진입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괴물은 자신의 외모 때문에 거부당하고 마는 데, 이로 인해 괴물은 비대칭성에 내던져지고 만다.33)
“저주받을 창조자! 왜 당신조차 역겨워 고개를 돌릴 소름끼치는 괴물을 만들었는가? 신은 자신의 형상을 본떠 인간을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만들었건만 내 모습은 추잡한 인간의 모습이고, 인간과 비슷하기 때문에 더욱 끔찍해 졌다. 사탄에게는 칭찬해주고 용기를 줄 동료 악마들이라도 있었지만, 나는 철저히 혼자이고 미움을 받는 존재라니.” (193)
'Cursed creator! Why did you form a monster so hideous that even you turned from me in disgust? God in pity made man beautiful and alluring, after his own image; but my form is a filthy type of yours, more horrid form its very resemblance. Satan had his companions, fellow-devils, to admire and encourage him; but I am solitary and detested.' (233)
괴물은 크게 세 가지 차원의 비대칭성을 지닌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신체의 비대칭성이다. “프랑켄슈타인의 악마적 시험의 결과로 생겨난 피조물을 지탱하는 것은 분명 ‘규칙적인 조합’, 인간에게서처럼 “가장 완벽한 대칭이 (……) 용모의 균형을 잡아주는” 균등의 법칙을 따른 그러한 구성이 아니다.”34)두 번째 차원은 인간의 세계에 속하지 못한 비-인간으로서 괴물의 비대칭성이다. 비-인간인 괴물은 이 비대칭성을 벗어나고자 하나 맹인 할아버지와의 찰나적 교류 외에 계속해서 모든 인간들에게 배척당한다. 이어서 세 번째 차원의 비대칭성은 자신의 짝이 없어 극단적으로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35)세 번째 차원의 비대칭성만이라도 극복하기 위해 괴물은 간절하게 창조자에게 탄원한다.
“(……) 어쨌든 내 요구는 정당한 것이고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오. 나와 성이 다르지만 나처럼 징그러운 존재를 만들어 달라는 것뿐이오. 그로 인해 얻는 만족은 소박하겠지만 그것이 내가 받을 수 있는 전부이고 그것이면 충분하오. 사실, 우리는 세상과는 담을 쌓은 괴물이 될 거요. 그런 만큼 서로가 더욱 애착을 느낄 거고. 우리의 삶은 행복하진 않겠지만 남한테 피해주는 일 없고, 지금 나처럼 비참하지도 않을 거요. 아! 제발 나를 행복하게 해주시오. 한 번의 자비를 베풀어 당신께 감사하게 해주시오! 다른 존재로부터 인정을 받아보고 싶소. 내 청을 거절하지 말아주시오!” (215)
"(……) What I ask of you is reasonable and moderate ; I demand a creature of another sex, but as hideous as myself. The gratification is small, but it is all that I can receive, and it shall content me. It is true, we shall be monster, cut off from all the world; but on that account we shall be more attached to one another. Our lives will not be happy, but they will be harmless, and free from the misery I now feel. Oh! My creator, make me happy; let me feel gratitude towards you for one benefit! Let me see that I excite the sympathy of some existing thing; do not deny me my request!" (265)
인간 세계에 속하길 포기하고 단 한 사람의 반려(伴侶)만을 원하는 괴물의 작은 요청은 거절당하고 만다.36)결국 괴물이 처한 비대칭성은 극복 불가능하다는 확정으로 귀결되고 급기야 괴물은 박사에게 복수를 천명하고 실천한다.
“모든 남자가 아내를 가슴에 품고, 모든 야수도 짝이 있는데 나만 혼자 살라고? 나도 한때 사랑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혐오와 경멸뿐이었다. 이봐! 너는 맘에 안 들겠지만 조심해야 할걸! 앞으로 네 인생은 공포와 불행 속에서 지나갈 것이고 머지않아 네게서 영원히 행복을 앗아갈 벼락이 내릴 테니까. 내가 감당 못할 비참함 속에서 뒹구는 동안 너는 행복하겠다고? 넌 나의 나머지 욕망도 파괴할 수 있겠지만 복수는 남아. 복수. 앞으로 그것이 빛나는 음식보다 더 달콤한 단어가 될 것이다! 나는 죽을지 몰라도 그 전에 네가, 나를 괴롭히는 폭군인 네가 먼저 너의 불행을 지켜보는 태양을 저주하게 될 것이다. 명심해라, 난 겁이 없고 그래서 강인하거든, 뱀처럼 교활하게 지켜보다가 독을 쏠 테니. 넌 네가 입을 상처를 보며 후회하겠지.” (245)37)
"Shall each man," cried he, "find a wife for his bosom, and each beast have his mate, and I be alone? I had feelings of affection, and they were requited by detestation and scorn. Man, you may hate; but beware! Your hours will pass in dread and misery, and soon the bolt will fall which must ravish from you your happiness for ever. Are you to be happy, while I grovel in the intensity of my wretchedness? You can blast my passions; but revenge remains―revenge, henceforth dearer than light or food! I may die; but first you, my tyrant and tormentor, shall curse the sun that gazes on your misery. Beware; for I am fearless, and therefore powerful. I will watch with the wiliness of a snake, that I may sting with its venom. Man, you shall repent of the injuries you inflict." (313-315)
1-3.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괴물 사이의 비대칭성
앞의 전개에서도 알 수 있듯, 박사와 괴물은 서로를 끝내 이해하지 못한 채 끝없이 쫓고 쫓긴다. 박사는 죽음에 임박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나를 그 악마에게 인도하는 수호천사는 내가 그렇게도 바라는 휴식을 언제쯤 허락해줄까? 아니면 그를 살려둔 채 죽어야 하나? 월튼, 나에게 맹세해주게. 내가 죽어도 자네가 그를 놓치지 않겠다고, 그를 찾아 죽임으로써 내 원한을 풀어주겠다고. (305)
Oh! When will my guiding spirit, in conducting me to the daemon, allow me the rest I so much desire; or must I die, and he yet live? If I do, swear to me, Walton, that he shall not escape; that you will seek him, and satisfy my vengeance in his death. (399)
그는 괴물에 대한 원한감정을 끝내 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박사의 임종 후 괴물은 이야기한다.
나는 죽을 거요.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고뇌를 느끼지도, 만족시킬 수 없는 감정의 포로가 되는 일도 더 이상 없겠지요. 나를 만들어주었던 그는 이제 죽었소. 그리고 이제 내가 죽으면 우리 둘에 대한 기억도 곧 잊혀질 거요. (326)
“잘 있으시오! 이제 떠나겠소, 당신이 이 눈으로 보는 마지막 인간이 될 거요. 잘 있으시오. 프랑켄슈타인! 그대가 아직 살아 있어서, 아직도 나에 대한 복수의 열망을 불태웠다면 나는 죽음보다는 삶을 만족시켰을 것을.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구려. 당신은 나를 없애고자 했소. 내가 더 큰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말이오 (……) 당신도 불행했지만 내 고통은 당신의 고통보다 더 컸소. 괴로운 죄책감이 내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아픈 상처를 쑤셔댈 테니까.” (327)
I shall die. I shall no longer feel the agonies which now consume me, or be the prey of feelings unsatisfied, yet unquenched. He is dead who called me into being; and when I shall be no more, the very remembrance of us both will speedily vanish. (427)
"Farewell! I leave you, and in you the last of human kind whom these eyes will ever behold. Farewell, Frankenstein! If thou wert yet alive, and yet cherished a desire of revenge against me, it would be better satiated in my life than in my destruction. But it was not so; thou didst seek my extinction, that I might not cause greater wretchedness ... ellipsis ... Blasted as thou wert, my agony was still superior to thine; for the bitter sting of remorse may not cease to rankle in my wounds until death shall close them for ever." (429)
그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상실했음을 내뱉으며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결국 박사와 괴물 모두 파멸로 생을 마치고 마는데 이러한 서사 구조는 인물들 개인의 비대칭적인 사고방식과 인물들 간의 관계에 존재하는 비대칭적 실존 구조, 즉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않고 압도적으로 ‘타자화(他者化)’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괴물과 함께 머무르기의 의의38)
독일 근대의 위대한 관념론자 헤겔은 그의 『정신현상학』 「서설」에서 “(……) 정신은 오직 절대적으로 찢겨져 있는 가운데서 자신을 발견함으로써만 자신의 진리를 획득한다. 정신은, 어떤 것에 대해 우리가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거나 거짓이다. 이제 이로써 이것에 대해서는 다 마쳤다"라고 말하고서 그로부터 다른 어떤 것으로 넘어갈 때처럼, 부정적인 것을 외면하는 긍정적인 것으로서의 이런 권능이 아니다. 오히려 정신은 오직 부정적인 것을 대면하고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를 통해서만 이러한 권능인 것이다. 이 머무름은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바꿔놓는 마력이다.”39)라고 말한 바 있다. 정신이 정신으로서 온전히 존재하고 진정한 권능이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것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할 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 함께 머물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인간 역시 인간으로서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서는 비-인간과 대면할 수 있어야 하고 동거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정신으로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인간의 생명 그 자체도 헤겔의 정신처럼 ‘부정적인 것을 대면하고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아래의 질병학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질병은 더 이상 한 종이 다른 종을 못 살게 구는 생물학적인 강도짓이 아니다. 오히려 감염은 고전적인 사건, 즉 생명의 근본 현상이며 그것은 평화로운 공존을 향해 나아가는 경향을 띤다는 것이다. (……) 생물은 단백질을 합성할 때만이 생존이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백질이나 그 구성성분인 아미노산을 섭취해야 한다. 한 생명체가 다른 종의 단백질을 획득하는 수단은 살육에서 기생까지 다양하지만 모든 경로는 같은 목적을 갖는다. 바이러스는 박테리아와 나무와 인간을 비롯한 거의 모든 생명체에 기생한다. 진균과 박테리아는 식물과 동물들을 갉아먹는다. 사슴, 말, 고릴라, 양 등은 식물을 먹는다. (……) 이 끝없는 전달 과정은 <먹이사슬food chain>이라고도 불린다. (……) 이 보편적인 법칙 <먹느냐 먹히느냐Eat or Be eaten>는 언뜻 보기에 앨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의 <이빨과 발톱의 유혈 낭자한 자연>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자연이 늘 잔혹하지만은 않다. 살육과 기생은 자체의 한계가 있다. 만약 맹수들의 모든 먹이를 다 잡아먹는다면 자신들도 굶어죽게 될 것이다. 비슷하게 기생충이 숙주를 모두 죽인다면 그것들은 먹이와 거주지 그리고 급기야는 자신의 생명마저 잃게 된다.40)
더하여 인류학자 나카자와 신이치는 괴물과 함께 머무르기를, 아니 머물 수밖에 없음을 다음과 같이 논변한다.
현대세계에서 괴물은 예외적인 존재로 취급받고 있지만, 이 예외적 존재야말로 우리의 ‘마음’의 원초적인 기층에서 나오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사고가 괴물을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괴물로부터 사고가 탄생하는 셈이지요.41)
그는 괴물과의 동거만이 인간의 고차원적인 유동적 지성을 활동할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억압된 무의식은 필연적으로 돌아온다고 정식화되고 있다. 그러므로 강제적 억압이나 억압의 회피보다는 승화나 카타르시스를 통해서 무의식과 의식의 조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통로가 없을 경우엔 무의식의 귀환이 왜곡되는 데 그때 그것은 고통과 무질서를 가져온다.42)『프랑켄슈타인』의 파국적 결말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소개하는 저서에서 “‘거기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내가 동화시켜야 할 심오한 진리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할 참을 수 없는 진실이다.”43)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문장에서 ‘거기서’는 프로이트에 의하면 ‘이드id’이고 라캉의 표현으로는 ‘내 진실의 자리’로, 무의식이라는 것이 ‘맹목적이고 불합리한 본능의 영역에 종속’44)된 어떤 것이 아니라 ‘외상적인 진실이 말을 하는 장소’45)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이 라캉과 지젝을 거치면서, 무의식이 정복이 대상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할 참을 수 없는 진실’이라는 개념으로 재구성 혹은 재해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 논문에서도 라캉과 지젝의 무의식 개념을 받아들여46), 괴물을 단지 억압된 욕구나 본능의 의식의 장(場)으로의 불청객적인 틈입(闖入)으로 보지 않고, 괴물을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할 참을 수 없는 진실’로 해석하고자 한다.
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이 지금까지 쌓아올린 지혜는 반대되는 것과 함께 머무는 것이야말로 존재의 근본임을 공통으로 말하고 있다.47)그리고, 지금은 이러한 인류의 지혜를 세상에 적용해야 마땅한 시기다. 도처에서 우리는 비대칭성의 폭력을 목격한다. 그것은 지구를, 사회를 그리고 개인의 삶을 분할시키기에 이러한 상황의 진행이 더 이상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 비대칭의 시대에서 대칭성의 언명은 ‘필요’가 아닌 ‘당위’에 가깝다. 즉, 이제 우리는 ‘자발적’으로 ‘괴물과 함께 머무르기를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V. 결론
비대칭적인 이분법이라는 세계관이 가져온 오늘날의 위험은 크게는 생태계의 파괴와 테러리즘의 만연에 처한 문명을, 작게는 심신의 부조화와 인간관계의 어려움에 처한 현대인을 들 수 있다. 본 논문은 이러한 파멸적 현상과 공포스러운 현재가 한쪽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비대칭적인 이분법적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중심으로 인류학과 정신분석학 그리고 역학에서 강조하고 있는 대칭성이라는 통찰을 적용하여 살펴보았다.
기존의 연구들이 괴물을 억압받는 여성이나 착취당하는 노동자 또는 은폐된 무의식으로 해석했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지만 반면에 비대칭적인 이분법 즉 어느 한쪽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아예 무대칭적 초분법 즉 중심 없는 변화만을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한계를 지님에 따라, 본고에서는 이를 비판하고 조화로운 대칭성 회복의 필요를 역설하였다. 연구를 통해서 『프랑켄슈타인』의 등장인물들의 비대칭성과 파국의 관계가 명확히 드러나면서 본고에서 천명한 주장이 정당화될 수 있었다.
비대칭적인 것의 지속은 분할과 부조화를 만들고, 『프랑켄슈타인』의 예와 같이 주체들을 파멸로 이끌 뿐이다. 우리는 본고를 통하여 메리 셸리가 만들어낸 인물들 각자의 비대칭성, 인물들 사이의 비대칭성을 자명하게 노정(露呈)시켰다. 사실, 이는 현재 우리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내적으로는 스스로 대칭을 이루지 못하고, 외적으로는 동료나 사회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또 다른 괴물, 그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 각자의 자화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각자가 각자에게 괴물로서 현존함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스스로가 만들어낸 괴물성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다만 필자가 요구하는 바는 그것의 공존이 비대칭적 혹은 무대칭적인 양상이 아닌 대칭을 지향해야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도처에 현존하는 괴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것과의 대칭적 조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필자의 연구는 문학적으로는『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새로운 비평적 독법을 제시하는 데 의의가 있고, 문명사적으로는 건곤(乾坤)병존으로 표상되는 태극적 세계관을, 실존적으로는 개인이 조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대대적(待對的) 가치관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아쉬운 점은, 사정상 재해석의 생산이라고 할 수 있는 다양한 『프랑켄슈타인』 관련 영상자료의 참조가 미비하였고48), 필자가 지닌 능력의 한계로 인해, 주요 논지와 개념을 텍스트 분석에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즉 꼼꼼한 텍스트 분석과 비평적 도구들의 적절한 개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울러 연구를 진행하면서 본고에서 주장한 대칭성에 대한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는바, 우선 마르크스주의(Marxism) 담론에서는 본고에서 주장하는 조화와 균형보다는 적대와 모순을 강조하고 있어 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필요를 절실하게 느꼈다. 예컨대 대칭성에 대한 강조가 자칫 질서만을 옹호하는 보수적인 입장에 머물 가능성이 높았고 때로는 필요할 수도 있는 변혁적 태도를 생성시키지 못할 우려가 있기에 적대와 모순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고 대칭성 또는 괴물과의 동거에 대한 당위성만 강조하였지 그것의 구체적 실천의 과정이 누락되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는바, 타자(他者) 자체에 대한 성찰과 타자에 대한 환대(歡待)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대해 앞으로 깊이 있게 논의되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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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프로이트,『정신분석학 근본 개념』, 윤희기․박찬부 옮김, 열린책들, 2003.
□질 메네갈도 책임편집, 『프랑켄슈타인』, 이영목 옮김, 이룸, 2004.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14) 원효의 화쟁사상”, <서울신문>, 2006년 04월 06일.
□케네스 브래너, <프랑켄슈타인(영화)>, 1994.
1) ‘자기생성’(autopoiesis)-자기생산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이란 용어는 생물학자인 움베르또 마뚜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가 만들어낸 개념으로, 생물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환경의 변화에 맞게 생산한다는 의미이다. “누가 생물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생물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음을 가정한 셈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을 ‘생물’이라는 부류로 묶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을 부류로서 정의하는 조직이 무엇인지 명시적으로 밝힌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생물을 특징짓는 것은 자기 자신을 말 그대로 지속적으로 생성(erzeugen)하는 데 있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생물을 정의하는 조직을 자기생성조직이라 부르고자 한다.”(움베르토 마뚜라나 외, 『앎의 나무』, 최호영 옮김, 갈무리, 2007, 56쪽.) 이 개념은 대칭성 개념의 자율적 운동성-개체 생물과 우주를 포함하여-을 잘 보여주고 있다.
2) 나카자와 신이치, 『대칭성 인류학』, 김옥희 옮김, 동아시아, 2009, 128~129쪽.
3) 나카자와 신이치, 위의 책, 112쪽.
4)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안정남 옮김, 한길사, 2009, 옮긴이해제 참조.
5) 위 저서에서는 비대칭의 원인이 됨
6)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 이었던 적이 없다』, 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용어해설 371-372쪽.
7) 위의 책에 수록된 용어해설에 따르면, ‘비-인간’의 쓰임은 다음과 같다. ‘사물, 혹은 대상의 행위자적 속성을 드러내기 위한 개념으로 인간 개념과 쌍을 이룬다. 라투르는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을 통해 주체와 대상(객체)의 구분을 대체하고 기술이 인간 주체의 의지와 목표를 실현하는 중립적인 도구라는 생각을 비판하고자 한다.’ (용어해설 373쪽)
8)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윤희기․박찬부 옮김, 열린책들, 2009, 168-169쪽.
9) 그레고리 베이트슨, 『마음의 생태학』, 박대식 옮김, 책세상, 2006, 728쪽.
10) 김상일, 『역(易)과 탈현대의 논리』, 지식산업사, 2007, 425쪽.
11) 위의 책, 94쪽 참조.
12) 위의 책, 특별히 1부 4장 참조.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논쟁이 본고에서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이 논쟁이 태극의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적인 개념을 제공해 준다는 점이다.
13) 주자, 『주자대전』36, 위의 책 114쪽에서 재인용.
14) 이동철 외(박석준 부분), 『21세기의 동양철학』, 을유문화사, 2005, 184쪽.
15) “주자는 (……) 음양은 도가 아니며 음양하는 까닭이 도라고”한다는 김상일의 지적에서도 볼 수 있듯이 대칭성 개념은 상태가 아니라 과정임을 알 수 있다. 김상일, 앞의 책, 123쪽.
16) 고회민, 『주역철학(周易哲學)의 이해(理解)』, 전병석 옮김, 문예출판사, 2004, 205쪽.
17) 김형효,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 원효의 화쟁사상」, <서울신문>, 2006년 04월 06일.
18) 고회민, 앞의 책, 117쪽.
19) 엘레 베지, 「비인간의 문화」, 제롬 뱅데 엮음,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이선희 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0, 80~81쪽.
20) 필자는 좀비 영화의 등장과 유행을 페르소나 즉 가면으로서의 사회적 자아와 밀접하다고 생각한다. 오직 본능에의 완벽한 충실만 있을 뿐 주체적 자각이나 의지가 완벽하게 부재하는 좀비는 극단적으로 사회화된 비대칭적 존재를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21) 참고로 슬라보예 지젝은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에서 기존의 해석들을 비판하면서 "괴물이 의미하는 것, 괴물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적 혁명의 괴물성, 아버지에 항거하는 아들의 괴물성, 근대 산업의 괴물성, 비성애적 재생산의 괴물성, 과학 지식의 괴물성을 의미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지 않고 단지 나란히 병치되는 복수의 의미를 갖게 된다. 즉, 괴물성의 해석은 해석의 괴물성(공상)으로 귀결된다."(117쪽)라며 이 작품의 정합적 해석이 아예 불가능함을 지적하고 있다.
22) 리정화,「괴물에 비추어진 메리 셸리와 프랑켄슈타인의 모습」, 영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5, 5쪽 참조.
23) 조미정,「『프랑켄슈타인』과 타자성 : 페미니즘, 정신분석, 마르크스주의 비평」,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93-94쪽 참조.
24) 위의 논문, 25쪽 참조.
25) 위의 논문, 121쪽 참조.
26) 위의 논문, 55쪽 참조.
27) 박소영, 「귀환하는 실재에 응답하는 디지털 주체」,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 94쪽 참조.
28) 비(非)대칭적인 이분법이라 함은 주체와 대상 혹은 서양과 동양 등으로 이분(二分)한 후 어느 한쪽에만 과도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사고 경향을 의미하며, 무(無)대칭적 초분법(超分法)이라 함은 조미정의 ‘디지털 주체’처럼 특별한 정체성에 얽매이지 않은 채 그때그때의 환경에 걸맞는 주체되기를 지지하는 입장을 의미한다. 비대칭적 이분법과 마찬가지로 무대칭적 초분법 역시 괴물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기는 한다. 다시 말해서 조미정의 디지털 주체라는 개념은 혼성적 주체 즉 이전의 단일한 정체성을 지닌 주체에서 다양하게 변모할 수 있는 주체로 긍정하고 있다. 그런데 혼성적 주체는 사이버스페이스나 전자네트워크로 연결된 기계문명에 ‘걸맞는’ 주체이지 결코 상호공존성을 강조하는 대대(待對)적 주체가 아니다. 그래서 대칭적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無)대칭적이라고 했고, 결코 이원론이나 일원론이 아니어서-혼성적이어서-초분법(超分法)이라고 명명했다. 본 논문에서는 디지털 주체와는 다르게 괴물의 긍정성을 의타기성(依他起性)의 차원에서 즉 호상성(互相性)의 입장에서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시대적 급변과 무관하게 괴물을 긍정하고 있다.
29) 한국어 판본과 영역본 내용이 달라 상기 내용을 찾지 못하였다. 괄호 안의 숫자는 책의 면수이다. 이하 마찬가지.
30) 한국어 판본과 영역본 내용이 달라 상기 내용을 찾지 못하였다.
31) 케네스 브래너 감독의 영화 <프랑켄슈타인>(1994)에서는 어머니의 죽음을 박사가 인간의 필멸성에 도전하는 모티프로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어머니의 죽음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
32) 한국어 판본과 영역본 내용이 달라 상기 내용을 찾지 못하였다.
33) 박사와 괴물 둘 다 비대칭적이라는 표층적 공통점이 있지만 심층적 차이가 있다. 박사의 비대칭성이 내재적(內在的)이라면 괴물의 그것은 외재적(外在的)이라는 것이다.
34) 자크 뒤렌만트, 「조각을 붙여 만든 사탄들」, 질 메네갈도 책임편집, 『프랑켄슈타인』, 이영목 옮김, 이룸, 2004, 143쪽.
35) 앞에서 대칭성의 한 상징으로 ‘음양’을 얘기하였다. 그런데 속류적 의미에서 음양은 흔히 남녀를 가리킨다. 이는 가장 기초적인 음양 차원이 생물학적 수준에서 환기됨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개인의 서정시가 짝을 잃은 슬픔을 노래한 고구려 2대 유리왕의 「황조가」인 것은 이런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반려가 없는 괴물의 비대칭성은 원초적 조화의 부재, 즉 원초적 비대칭성이라고 볼 수 있다.
36) 스피노자에 의하면 인간은 ‘코나투스conatus'를 가지고 있다. 코나투스란 삶의 주체가 ‘자신의 삶을 유쾌하고 즐겁게 증진시키려는 의지’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러한 코나투스가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물에게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인간이나 사물이 어떤 것이 선(善)이어서 그것을 향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선(善)이라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프랑켄슈타인』과 관련하여 필자는 스피노자에게서 주요한 두 가지 통찰을 응용할 수 있다. 첫째, 인간이나 사물이나 모두 기쁨을 추구하면서 살려는 의지로서의 코나투스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노력하고 투쟁하는 괴물의 의지를 당연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둘째, 선험적으로 선(善)이라는 것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데 이점(利點)이 있거나 행복할 경우가 선(善)이기에,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일견 유장한 논리가 맞다면 괴물의 기본적 생존 충족의 논변 또한 맞다는 점이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과 관련해서는, 강신주, 『철학 대 철학』, 그린비, 2010, 111쪽 참조.
37) 이 대목에서 흥미 있는 또 하나의 비대칭성을 볼 수 있는데,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그것이다. 주인인 박사와 노예인 괴물은 이 대목에서 괴물에 의해 ‘명시적’으로 그 위치가 전복된다. 괴물은 지금 이 순간부터는 자신이 주인이고 박사가 노예라고 재규정하는 것이다. 서로의 필요성을 긍정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는 한 관계의 역전은 있을지언정 비대칭성은 여전함을 알 수 있다.
38) 이 절(節)에서는 앞에서 언급했던 부분은 반복되지 않도록 최소화하거나 생략하였다.
39) 슬라보예 지젝,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2007, 8쪽에서 재인용. 강조는 인용자.
40) 아노 카렌, 『전염병의 문화사』, 권복규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2, 33~34쪽.
41) 나카자와 신이치, 『대칭성 인류학』, 김옥희 옮김, 동아시아, 2009, 143쪽.
42) 이를 왜곡된 대칭성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모든 불행은 방 안에 홀로 있을 줄 모르는 데서 온다.”는 파스칼의 말이 히키코모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올바른 대칭성의 좋은 고독과 왜곡된 대칭성의 나쁜 고독이 있다. 마찬가지로 침묵의 공간이 아닌 사교의 장에서 나는 다중(네그리)이 될 수도 있고 대중(카네티)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대칭성은 진행된다. 비대칭성은 필연적으로 회복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회복 방향을 올바르게 기획하고 선취해야 한다.
43) 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캉』, 박정수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09, 9쪽. 강조는 인용자.
44) 위의 책, 8쪽.
45) 위의 책, 9쪽.
46)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이 오해되어 왔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프로이트적 무의식은 결코 상상력이 빚어낸 낭만주의적 무의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밤의 신령들이 지배하는 장소가 아니지요. (……) 낭만주의적 무의식의 용어들을 이어받은 융을 파문했다는 사실은 정신분석이 그와는 전혀 다른 것을 도입하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시사해줍니다. 마찬가지로 은둔의 철학자 에두아르트 폰 하르트만이 평생에 걸쳐 궁리해낸 저 무질서하고 잡다한 무의식도 프로이트적 의미에서의 무의식이 아닙니다. (……) 프로이트적 무의식이 그것과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좀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자크 라캉, 『세미나11』, 맹정현 외 옮김, 새물결, 2008, 43쪽.) 그런데 오히려 라캉의 이 발언을 통해서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이 광범위하게 오해받아 왔음과 결정적으로 라캉 자신의 무의식 개념과는 다름을 알 수 있다. 라캉의 무의식 개념으로는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자크라캉, 『세미나3』, 딜런 에반스, 『라깡 정신분석 사전』, 김종주 외 옮김, 인간사랑, 1998, 127쪽에서 재인용.)라는 문장이 가장 유명하다.
47) 불교와 도교 역시 역학(易學)처럼 대립자의 존재를 중시한다. 예컨대 노자는, “반자, 도지동 反者, 道之動” 즉 “대립적인 것이야말로 진리의 운동”이라고 말한 바 있다. 노자, 『도덕경』, 오강남 옮김, 현암사, 1995, 제 40장.
48) 질 메네갈도가 책임편집한 『프랑켄슈타인』(이영목 옮김, 이룸, 2004)을 보면 역대의 『프랑켄슈타인』 관련 영화에 대한 소개와 독특한 해석이 잘 정리돼 있다.
49) 이에 대한 앞으로의 연구 계획으로 임마누엘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과 자크 데리다의 환대론 등이 있다.
(역술가로 살다보니 아무래도 음양오행의 대칭성을 중시하게 되는가보다. 보는 작품들마다 그렇게 보게 된다.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