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경한글역주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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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6)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逢父母殺父母”(『임제록』 14-17)
■ 영화배우 숀 펜이 2007년에 감독 데뷔작으로 내놓은 영화 「인투 더 와일드 into the wild」는 논픽션으로, 내용 자체의 감동과 더불어 뛰어난 연출로 많은 수상(受賞)을 했다. 아이비리그 명문 로스쿨 진학을 거부, 자신의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 세상을 주유(周遊)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영화의 많은 장면들이 나를 아리게 했고 애읍(哀泣)케 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원통했던 건, 그가 단호히 거부했던 그의 부모님들이 그를 너무 사랑해서 그를 찾다가 쓰러지는 장면이었다. 저렇게 학식 있고 훌륭한 부모님이, 저토록 뼈저리게 깊이 사랑하는데 왜, 왜 그는 ‘가족’을 참지 못하고 떠나야 했을까?
■ 지금 나는 카프카의 「변신」처럼, 가족의 본질을 탈은폐(脫隱蔽)시키는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술(前述)한 영화에서, 아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야생으로 뛰어들지만, 부모는 자식을 찾느라 직장을 관두거나, 식음을 전폐(全廢)하거나, 때때로 혼절(昏絶)한다. 그러다 깨어나면 아무데나 주저앉아 한없이 자식을 그리워하며 호곡(號哭)한다. 이것이 효(孝) 아닐까?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이 무량(無量)한 사랑과 자비 말이다. 대체로 생명 있는 존재자들의 사랑이, 아래[자녀]에서 위[부모]로 향한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생리적 본성과 아가페적 경향이 있다는 점, 오늘은 이것을 생각하고 싶다. 만약 이런 상식이 옳다면, 『심청전』은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악서(惡書)라 생각된다.❶ 그 해악은 악법보다 무섭다. 악법(惡法)은 옳을 수도 있지만 악서(惡書)는 옳을 수 없기 때문이다.
■ 빈한한 살림에, 그것도 늘그막에, 자기를 제사지내거나 봉양해줄 자식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하녀 들이듯이 무책임하게 애를 낳고, 그 과정에서 부인까지 죽음에 이르게 하고, 원래 집안 대대로 높은 벼슬을 했다면, 비록 나이 스물에 봉사가 되었다 해도, 눈 먼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을 텐데 전혀 배울 생각은 안 하고, 결국 심청이 시켜 빌어먹다가, 눈 뜨게 해준다는 말에 지름신이 강림했는지, 이기적이고 경망스런 결정을 지르고, 그러다 딸을 팔았고, 청이로 하여금 참척(慘慽)의 불효를 짓게 만들었고, 또 속없이 못된 늙은 꽃뱀과 재취(再娶)해서 패가망신하더니, 호모 사케르(homo sacer)처럼 누다-비타(nuda-vita, 벌거벗은 생명)가 되어,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도 아닌데 스트리킹(streaking)도 해보고, 눈 뜨자마자 자신의 신체의 일부였을 수도 있을(그레고리 베이트슨의 견해) 지팡이를 정(情)도, 은혜도 잊은 채 휙 집어던지는 나쁜 남자 심학규.
■ 『심청전』은 분명 효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 지식을(disciplinary)을 훈육(disciplinary)할 의도로 지금까지도 교과서에 실리고 있을 것이다. 권력의 미시물리학은 그렇게 하여 자율적으로 검열하는 주체를 생산해내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동화나 착한 이야기는 문학(文學)이 아니라 관학(官學)이요 양서(良書)가 아니라 악서(惡書)이다. 물론 효에 대한 담론 자체나 미담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관치적-체제순응적 조작-배포나 무비판적 수용이 그렇다는 것이다. 애기를 매장하고, 물에 빠져 죽게 하고, 손가락을 잘라내고, 허벅지를 도려내는 것이 효(孝)라고? 대박! 어처구니가 없다.
■ 물론, 부모님의 은혜는 정말이지, “설사 어떤 사람이 아버지를 왼쪽 어깨에 메고 어머니를 오른쪽 어깨에 메고 살갗이 닳아 뼈가 드러나고 다시 골수가 보이게 되도록 수미산을 수천 번 돌더라도” 갚을 수 없고, “설사 어떤 사람이 부모님을 위하여 예리한 칼로 심장과 간을 베어 피가 땅에 흘러도 그 괴로움을 달게 받으며 백천 겁을 하여도 부모님의 깊은 은혜에 보답할 수 없다.”❷ 문제는 이러한 우리들의 자연스런 인지상정과 본성에 근거한 내재적 자발성의 반성이, 가부장적 전제군주제를 정당화하거나 강화하기 위한 논리로 치환되거나 악용된다는 사실이다.
■ 예전에 『논어』「위정」편 6장을 읽고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맹무백문효. 자왈: 부모유기질지우.”(“孟武伯問孝. 子曰: 父母唯其疾之憂.”), 즉 “맹무백이 효를 물었다. 공자께서 이에 말씀하시었다: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까 걱정이다.” 흔히 효(孝)라고 하면, 자식이 부모에게 하는 행위를 생각하게 마련인데, 성인(聖人) 공자께서는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걱정 근심만 말씀하고 계신다. 『여씨춘추』「효행」편도 마찬가지이다. “증자가 말하였다: “……내 몸의 지체를 마치 종묘와 같은 성전을 지키는 것처럼 온전하게 지키는 것, 그것이 바로 효인 것이다.”❸ 그렇다면 우리들이 효에 대해서 뭔가 잘못 알아도 단단히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한 오해가 아마도 효의 일방성, 상향성에 관한 것이다.
■ 『예기』「예운」편에, “무엇이 사람의 의로움인가? 아버지가 자애로울 때 자식은 효성스럽게 되고, 형이 착하게 굴 때 동생은 형을 따르고, 남편이 의로울 때 부인은 남편의 말을 잘 듣게 되고, 어른이 은혜를 베풀 때 어린 사람은 순종하게 되고, 임금이 인(仁)할 때 신하는 충성을 다하게 된다. 이 열 가지의 쌍방적 관계를 일컬어 인의(人義) 즉 사람의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이다.”❹ 역시 성현(聖賢)과 고전(古典)은 남다르시다. 어찌 일방적 복종이 효일까보냐. 역주자(譯註者)는 “효의 원초적 본질은 아래로부터 위에로의 방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의 방향에 있는 것”(156)이라고 역설(力說)한다. “효의 본질은 위로부터 아래에로의 베풂에 있는 것이다. 이 ‘베풂’의 전제가 없이 아랫사람의 복종이나 희생, 헌신을 요구하는 것은 권위주의적 강탈이요, 복종주의적 강압이다.”(157)
■ 성악설(性惡說)로 잘 알려진 순자(荀子)는 아예 그런 효는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효자가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세 가지가 있다. 명령을 따르면 어버이가 위태로워지고 명령을 따르지 않아 어버이가 편안해진다면 효자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데, 곧 충심이다. 명령을 따르면 어버이에게 욕되고 명령을 따르지 않아 어버이가 영화로우면 효자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데, 곧 의로움이다. 명령을 따르면 새나 짐승같이 되고 명령을 따르지 않아 잘 수식해 드릴 수 있으면 효자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데, 곧 공경함이다. 그러므로 순종할 수 있는데 순종하지 않는 것은 자식이 아니며, 순종해서는 안 될 때 순종하는 것은 충심으로 섬기지 않는 것이다. 순종하고 순종치 않는 뜻을 분명히 깨닫고서, 공경과 충성과 믿음을 다하여 바르고 성실하고 삼가 행동한다면 곧 위대한 효도[大孝]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다음 말이 무섭다. “…도리를 따르되 임금을 따르지 않으며, 의로움을 따르되 아버지를 따르지 않는다…”❺ 임금이라 할지라도, 부모라 할지라도 도리가 아니고 의로움이 아니면 따르지 않는 것이 대효(大孝)라니!!!
■ 이제 우리는 에피그라프에서 인용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逢父母殺父母”라는 임제 선사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표상이 바로 가족 혹은 부모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가족과 부모가 순자가 말하는 도리와 의로움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기에, 가족이 원수이고, 부모를 죽이라는 촌철살인이 등장한 것일 것이다. 라캉은 특별히 아버지를 내세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아버지-의-이름’(Name-of-the-Father)이다. 부명(父名)은 부명(父命)인 것이다. “우리는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 자신을 법의 인물로 동일시해 왔던 상징적 기능의 지지를 인식해야 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이름에서이다.”(에크리, 67) 이 아버지의 이름이 우리가 사는 세상, 즉 상징계의 기본적인 질서가 된다. 이 기본질서에 순응해야 정체성이 부여되고 사회적 위치가 주어진다. 이 ‘아버지-의-이름’이 폐제될 때 정신병이 생긴다.❻
■ 그렇다면 과연 원수인 가족에게서 탈출할 수 있을까? 과연 부모님을 죽일 수 있을까? 이러한 정신병의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토록 단단하고 가족스럽고 부모스럽고 사랑스러운데. 라캉은 ‘욕망’에서 탈주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대타자 자체가 빗금친 대타자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균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욕망은 욕구와 요구의 불일치 혹은 차이처럼 나타난다. 이 차이는 구조적인 것으로 라캉은 이것을 욕구와 요구의 분열(Spaltung)이란 말로 지칭한다. 욕구와 요구의 분열은 사물의 살해 위에서 구축되는 상징계의 본성에서 비롯되며 주체는 이를 결여의 형태로 체험한다. 라캉은 이를 특정 대상의 결여가 아니라 존재 결여라고 말한다. (......) 대타자가 결여된 존재라는 것이 라캉의 욕망 이론에서 중요한데 그것이 욕망이 상징계에 대한 복종에만 머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욕망은 상징계 속에서 언어의 한계를 죽음 충동으로 체험하면서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주이상스로 발전해간다.”❼ ‘아버지-의-이름’이 실은 빗금친 대타자, 즉 어딘가 온전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말이다. 이제, 은유로서의 가족 탈출과 부모 살해를 통해, 이념화된 심청이의 효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 그러면 못된 군주와 나쁜 부모에 의해 강박되어 전해져 내려오는 사효(邪孝)와 소효(小孝)가 아닌 진짜 효는 무엇인가? 시간관계상 『효경』에서 가장 강렬하게 어필 된 것만을 간략하게 노트해놓는다. ㉮효는 내 몸을 불감훼상(不敢毁傷), 즉 감히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324~332) 이 한마디가 『효경』에서 가장 중요한 듯하다. ㉯ 『효경』에서 효(孝)를 가르쳐 계몽시키고자 하는 이는 일반 인민(人民)이 아니라 “항상 천자(天子)였다.”(352). 천자로 대표되는 윗사람에게 효를 가르치려 이 경(經)을 지은 것이지, 아랫 사람이 그 교육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390) ㉰ 윗사람이 잘못하면 명령에 따르지 말고 투쟁하는 것이 효이다.(398~399) 나에게 인상적으로 각인된 대목만 추려본다면 이 정도라 할 수 있다.
■ 특히 불감훼상(不敢毁傷)과 관련하여, 뼈에 사무치는 장(章) 있어 발췌해 놓는다. “…부모님을 모시는 자는,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교만하지 말아야 하며, 아랫자리에 있을 때는 함부로 난동을 부리면 아니 되며, 군중 속에 있을 때는 다투지 말아야 한다. 윗자리에 있으면서 교만하면 결국 그 지위를 잃게 되고,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난동을 부리면 형벌을 받게 되며, 군중 속에 있으면서 함부로 다투면 칼에 찔리고 마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위험을 삶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매일 소·양·돼지를 희생으로 삼아 맛있게 봉양해 드려도, 여전히 불효함을 벗어나지 못한다.”(377) 무엇보다도, 내 몸을 조심스럽게 보호하는 것. 그것이 효의 본질인 것이다.
---footnote & bibliography---
❶안데르센의 동화 중 「빨간 구두the red shoes」를 상기해보라. ˝˝Cut not off my head!˝ said Karen; ˝for then I could not live to repent of my sin; but cut off my feet with the red shoes.˝(Hans Christian Andersen, 「The Red Shoes」in 『Stories and Poems: for Extremely Intelligent Children of All Ages』, selected by Harold Bloom, New York: Touchstone, 2001, p. 364.) 어린 카렌 왈, 머리는 자르지 말고 다리를 잘라 달란다. 왜? 그래야 회개할 수 있으니까! 이것이 정녕 동화(童話)인가? 아니다. 공포와 협잡으로 이루어진, “지독한 종교적 단죄”(서동욱, 358)일 뿐이다. 참고로 서동욱의 『일상의 모험』(민음사, 2007) 중 「춤이란 무엇인가?」에 「빨간 구두」에 담긴 부정성이 잘 분석되어 있다.
❷편자 미상, 『부모은중경』 중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최은영 옮김, 2005, 홍익출판사, 69쪽.
❸원문은 다음과 같다. “曾子曰,……能全支體,以守宗廟,可謂孝矣.”재인용 및 국역은 도올 김용옥, “효경한글역주”, 2010, 통나무, 258쪽 참조. 이하 본고 괄호 안에 페이수만 표기함.
❹원문은 다음과 같다. 何謂人情? 喜怒哀懼愛惡欲, 七者弗學而能. 何謂人義? 父慈, 子孝, 兄良, 弟弟, 夫義, 婦聽, 長惠, 幼順, 君仁, 臣忠, 十者謂之人義.
❺순자, 『순자』, 김학주 옮김, 을유문화사, 2001, 「자도」편 818쪽. 원문은 다음과 같다. 전자는 “孝子所以不從命有三,從命則親危,不從命則親安,孝子不從命乃衷, 從命則親辱,不從命則親榮,孝子不從命乃義, 從命則禽獸,不從命則脩飾,孝子不從命乃敬. 故可以從而不從,是不子也,未可以從而從,是不衷也, 明於從不從之義,而能致恭敬忠信,端慤以愼行之,則可謂大孝矣.”이고 후자는 “…從道不從君,從義不從父…”이다.
❻딜런 에반스, 『라깡 정신분석 사전』, 김종주 외 옮김, 인간사랑, 1998, 152~153쪽에서 재인용 및 참조.
❼김석, 『에크리』, 살림, 2007, 186-188쪽.
❽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개념과 마르크스의 지배 이데올로기론에 의거하여, 심청이가 당대의 오도(誤導)된 욕망과 이념적 환상 때문에 살해되었다고 분석한, 이정원의 『전(傳)을 범하다』(웅진지식하우스, 2010)에서 특히 1부 2장 「심청살인사건의 은밀한 내막」은 정리가 잘 되어 있고, 그 외 잘 알려진 다른 텍스트 분석이 흥미로워 참고할 만하다.

효를 매일 강요하는 건강하신 우리 아버지께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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