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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배수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3월
평점 :
품절
어느 날, 저녁밥을 지어먹고 나자 쌀이 딱 떨어지고 말았다. 좀 귀찮은 일이긴 하지만 가까운 슈퍼에서 포장된 봉지 쌀을 사다 두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쌀이 떨어졌다'는 사실은 어쩐지 서글픈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쌀을 살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어린 시절 쌀이 없어 밥을 굶어야만 했던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쌀.이.떨.어.졌.다'는 상황이 그렇게 궁상맞은 기분을 불러일으킨 걸까. 그것은 분명 샴푸가 떨어졌을 때의 불편함이나 커피가 떨어졌을 때의 초조감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쌀을 넉넉하게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 그것은 오랫동안 '빈곤'의 상징이었다. 쌀이 흔해 빠진 세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쌀에 연연하게 되는 건 조상들이 물려준, (보릿고개 류의) 징글징글한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쌀은 여전히 소비 목록의 우선순위를 차지한다. 다시 말해 쌀을 넉넉히 마련한 다음에야 고추장아찌를 살까, 젓갈을 살까 하는 부식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간식이나 기호품은 그 다음 순서다. 와인 같은 잉여 물품은 언제나 가장 나중으로 미루어야 한다. 돈이란 항상 빠듯하고 계산대에서 값을 치르고 돌아서는 발걸음은 언제나 아쉽다. 그러니 우선과 차선, 가격 대비 만족감을 따져야 하는 쇼핑이란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까르푸 매장에서 까르르 웃을 수 있는 건 오직 어린애들뿐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돈을 벌어 쌀을 사게 된 이후로 생긴 피로감이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만났거나 혹은 직접 만나지 못한 모든 사람에게서 빈곤을 읽었다. 가난을 겪은 사람이나 심지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 말고는 사람에게서 아무것도 읽은 것이 없다고 말할 수조차 있다. 극단적으로 단언해서, 나를 포함해서 빈곤하지 않은 사람을 나는 한번도 만나지 못한 것이다. (292p. '작가의 말' 중에서)
배수아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되는 소설이다. 식당 주방 아줌마. 교수 부인, 옷수선 집 주인, 프리랜서 기자. 결혼을 앞둔 가난한 연인, 고학력 룸펜, 고액 연봉을 받는 맞벌이 부부, 전당포 주인.....그리고 직업을 가지지 않은 채 남들이 버린 유효기간이 지난 음식들을 먹고 사는 '노용'이라는 인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과 계층의 인물들을 통해 빈곤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배수아가 드러내고 있는 가난에 대한 인식은 소름끼칠 정도로 냉철하다. 이 책을 읽다보면 '가난은 단지 불편한 것'이라거나 '빈곤은 상대적인 것' 등의 말들이 얼마나 얄팍한 위로에 지나지 않는지를 선명하게 깨닫게 된다. 가난이 진정 무서운 것은 한 인간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를 제한하고, 그 운명마저 결정지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신학자가 되고 싶었던 전쟁고아 출신이 전당포 노인으로 늙어버리고만 그 운명 앞에서 '역사의 비극'은 얼마나 허울 좋은 말인가. 거기에는 '오직 짓밟힌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가난의 치명적인 독성은 구질구질한 일상의 반복에 가리워져 있기 십상이다. 한정된 수입을 쪼개 '살 수 있는 것'과 '살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동안 우리 인생의 사이즈도 어느덧 그냥 그렇게 결정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