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거칠게 단순화시키자면, 현재 한국에서 21세기형 비평가의 '이상적'(?) 모델은 가라타니 고진형과 슬라보예 지젝형으로 이분화된 것은 아닌가 한다. 문학의 영토로 시작되어 철학의 고원으로 옮아간 가라타니 고진, 그리고 철학과 정신분석학의 지층에서 시작하여 영화를 비롯한 전방위적인 문화비평으로 나아간 슬라보예 지젝. 평론가들은 이들의 텍스트를 수많은 '각주'로 소비하지만, 비평가라는 존재의 윤리적 차원에서 두 사람은 더더욱 복잡한 화두들을 던지고 있다. -28~29쪽
소설가는 '소통 불가능성'이라는 거대한 암벽을 타며 손발로 끊임없이 소통의 언어를 더듬는 고독한 등반가다. -39쪽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보며 타인의 고통을 타자화시킬지도 모르는 두려움과, 타인의 고통을 들쑤시는 행위 자체의 수치심과 싸우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고통을 기억하고 기록해야 한다. 타인의 고통을 타인만의 고립된 상처로 봉인하지 않기 위해 문학은 좀더 더러워져야 하고 훨씬 많이 수치스러워져야 하며 있는 힘껏 혐오스러워야 한다. 이토록 휘황한 문명의 시대에 이토록 거대한 빈곤의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번지고 있다는 것, 여전히 빈곤이 인류의 화두라는 것이야말로 문학이 감당해야만 할 인류학적 스캔들이 아닐까. -90쪽
대중문화의 최전선 혹은 대중문화의 맨 밑바닥에서 정치적 폭탄을 길어올리는 것. 그것은 이데올로기를 소프트하게 번역하기 위해서도, 이데올로기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자기 시대의 버려진 물건들의 상처를 통해 다가올 미래의 혁명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벤야민의 빛나는 명랑성은 여전히 소중하다. -115쪽
미디어는 '심심한 자들의 킬링타임거리'나 '약자들의 도피처'가 아니다. 현대인에게 '삶으로서의 권태'는 일상적이며, 권태로운 인간은 우울에 빠진다. 그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엔터테인먼트다. 벤야민의 말처럼, 권태는 현대인의 존재론적 기초다. 이것이 바로 미디어의 존재 이유다. 범람하는 미디어 비판론이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그것을 넘어설 만한 강력한 대체재가 없기 때문이다. 웬만한 양식 있는 지식인들은 민족주의의 타파를 부르짖고, 어지간한 비판적 지성들은 모두 미디어를 비판하지만, 우리에게 민족주의가 주는 대중적 위안을 뛰어넘을 마약이 있는가. 영상 미디어를 압도할 만한 관능적 매혹의 텍스트가 풍부한가. -144쪽
유비쿼터스의 환상과 싸우는 김애란, 한유주가 진정 미디어를 뛰어넘기를 원한다면, 그녀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균질화된 평범성'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매스미디어는 자본의 가면이자 혈관이다. '나는 미디어에 중독되지 않았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위치시켜서는 안 된다. 벤야민이 자본의 매혹을 통해 자본주의를 내파했듯이, 그들도 미디어의 방관자가 아닌 미디어에 매혹되고 중독된 자리에서 미디어를 내파하기를. 우리는 외계인 사령부에 보내는 지구답사기를 원치 않는다.-144-145쪽
원룸형 솔로레타리아의 집단적 탄생. 이것이야말로 21세기적 인간형의 핵심적 문제다. '원룸-편의점-비정규직 일터'로 상징되는 솔로레타리아에 대한 계급적/심리학적 분석이야말로 이들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현대사회의 치명적 환부가 아닌가. -171쪽
"선택은 자아의 본성을 직접 반영한다.(...)단 하루 동안에 천 가지의 조그만 선택들을 할 수도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가 중요한 것들이다. - 앤서니 기든스,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163p 재인용.-197쪽
인스턴트 식품과 유전자조작식품이 점점 '안전한 식탁'을 위협하는 무기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사회에서나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요리하고 먹는지가 그 사람의 일상은 물론 가치관과 운명까지 집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엌은 현대인의 정신적/육체적 통과제의의 공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235쪽
(권여선에 대하여)
그녀의 붓은 수정처럼 단단하되 물결처럼 유연하다. 그녀는 방울뱀처럼 치명적인 독을 품으면서도 화려한 무늬를 자아내는 문체를 구사한다. '오정희'적 문체와 '최윤'적 지성, 고집스런 감수성과 세련된 지성을 동시에 품은 그녀의 다음 소설이 기다려진다. -255쪽
70년대에 태어나고 90년대에 대학생이었던, 현재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인 세대를 묶어줄 만한 이름이 있을까. 아니, 묶는다는 것이 가능하거나 필요한 일일까. 이십대 초반에 IMF를 겪었으며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청년실업'이라는 단어를 귀가 아프게 들어야 했던, '백수'를 표현하는 온갖 창조적인 표현들을 발명해낸 이 세대. 오프라인의 경험을 온라인의 경험보다 굳이 우위에 두지 않는 이들의 정신세계를 '한 큐에' 엮을 통쾌한 명명법은 없는 것일까. 나는 아직 이들을 '우리 세대'라 묶을 수 있는 어떤 경험적 증거도 찾지 못했다. 이 세대들에게서는 경험의 공통분모도 감수성의 교집합도 쉽게 발견할 수 없다. 가까스로 이들의 문화적 취향과 의식적 성향을 얼기설기 묶어낼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X세대나 N세대 같은 미디어의 언어로는 이들의 감각을 아우를 수 없다. 어쩌면 우리 세대의 가장 분명한 공통적 감수성은 그 어떤 집단과도 공통의 경험을 나눌 수 없다는 '단절감'이 아니었을까. -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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