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토니 모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들녘 / 2001년 9월
평점 :
절판


 

조, 라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열 여덟 어린 소녀를 사랑했다가 그 느낌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소녀를 쏘아 죽였다. 조의 아내인 바이올렛은 참을 수 없는 질투심으로 소녀의 장례식에 가서 시체의 얼굴을 칼로 긋는다. 소설은 선정적인 사회면 기사처럼 충격적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초입부의 강렬한 분위기와 달리 조와 바이올렛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 1920년대 흑인 거주지인 레녹스 주민들의 이야기가 입담좋은 아줌마의 육성으로 펼쳐지기에 흥분한 교감신경은 이내 가라앉을 것이다.

흑인 이주민들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뿌리뽑힌 삶'이라 할 수 있다. 1870년대 이후 백인들의 박해와 궁핍을 못 이긴 남부 흑인들은 희망을 안고 북부로, 도시로 몰려들었다. 도시는 이들에게 무엇이었을까.'도시에서 그들은 낯선 신참 주민이지만 그들의 자아는 더더욱 새롭다. 훨씬 더 강하고,훨씬 더 모험적인 자아가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갓 도착했을 때부터, 또 도시와 함께 20년 동안 성숙한 뒤에도 그들은 새로운 자아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망각하고 만다.'

하지만, 비로소 참된 자아를 찾은 듯한 느낌은 도시의 매혹이 가져다주는 착각에 불과하다. 백인들의 거주지에서 떨어진 흑인 할렘가에 기거하며 백인들의 사무실을 청소해주거나 파트타임으로 벌어먹으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이 그들 삶의 실상이다. 도시로 이주했지만 채워지지 않는 이들의 뿌리 깊은 박탈감은 '흑인'이라는 정체성에서 기인한다. 결코 바꿀 수 없는 숙명임에도 불구하고 '나 아닌 또 다른 나'를 추구할 때 결국 분열이 초래되고 만다.

바이올렛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바이올렛은 '흑인'이라는 핸디캡과 더불어 '여자'이기에 분열의 정도는 훨씬 극심하다. 궁핍한 삶과 부양의 의무를 버리고 대의명분을 찾아 집을 떠난 아버지와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무거운 짐과 핍박을 견뎌내다 못해 자살한 어머니를 보며 자란 바이올렛은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리고 절대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뒤늦게 찾아온 모성에 대한 갈망은 그녀를 괴롭힌다. 남의 아이를 충동적으로 훔치기도 하며 정신나간 여자 취급을 받던 바이올렛은 남편의 외도에 직면해 뿌리째 뒤흔들리고 만다.

소녀의 시신에 칼을 댄 것만으로도 모자라 죽은 소녀의 이모인 앨리스를 찾아가 소녀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 '아주머니라면 안 그러시겠어요? 자기 남자를 지키려고 싸우지 않으시겠어요?'라는 바이올렛의 절규에 앨리스는 외도한 남편의 죽음과 남편의 장례식에 나타났던 남편의 애인을 상기해낸다. 버림받은 여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앨리스는 바이올렛을 따듯하게 감싸준다. 이렇게 해서 도저히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인물의 화해가 이루어진다. 이루어질 것 같지 않던 화해는 바이올렛과 죽은 소녀의 친구인 펠리스 사이에서도 이루어진다. 바이올렛은 인생의 마흔줄에 이르러 겪은 커다란 방황을 펠리스에게 들려준다.

'내 인생이라는 걸 잊어버렸어. 내 인생, 내가 다른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라면서 거리만 왔다갔다 걸어다닌 거야.'
'누가요, 누가 되고 싶으세요?'
'누구라기보다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해야겠지. 백인, 빛, 다시 젊어지고 싶어.'
하지만 그녀는 결국 '나 아닌 나'를 버리고 나니 '나'가 남았다는 자기긍정에 도달한다. 가끔씩 떨칠 수 없는 회한이 스며들 때면 우울하면서도 신명 넘치는 흑인들의 음악- 재즈가 그녀를 위로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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