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유용주 지음 / 솔출판사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아직 변변한 습작 한번 제대로 해 본적 없으니 '문청' 소리 들을 자격도 없는 나에게는 강박적인 버릇 한가지가 있다. 어떤 책을 쥐건 간에 꼭 앞표지 날개에 붙은 글쓴이의 이력을 들춰 보는 일이다. '몇년도 어디 출생, 무슨 학교 졸업, 모모 잡지 또는 아무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작가 아닌 어느 누구의 생이든 몇 줄 안되는 이력으로 요약할 수 있으랴. 특히나 작가는 글로 승부하는 이들이니, 글을 통해 삶을 읽을 일이지 이력으로 그 자취를 가늠하지 말지어다라는 생각, 하면서도 그 버릇 여태껏 개 주지 못했다. 그러나, 유용주의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를 읽으면서는 거듭 그의 이력을 더듬고, 곱씹게 된다.

…내게 단 한번이라도 검푸른 교복과 석유 냄새 상큼한 새 책의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던가. 공부랍시고 책을 가까이 해본 적은 야간 검정 고시 학원을 다닐 때 청계천 헌책방에서 구입했던 국정 교과서 덮은 것이 마지막이었고, 고금과 소총을 아울러 오로지 현장이 표지였고 중국집 배달통이 제목이었으며 접시닦이와 칼판이 차례였고 제빵 공장 화부와 도넛부의 펄펄 끓는 기름솥이 서문이었으리라. 구두닦이와 귀금속 세공과 막노동이 내 청춘의 본문을 화려하게 장식했다면 이제 막판에 몰려 배운 무면허 운전 정도는 뒷표지 날개에 붙은 파리똥만큼이나 하찮은 독서였다…

그의 시집 <가장 가벼운 짐>, <크나큰 침묵>에 이은 이번 산문집 <그러나…>에서도 마찬가지로 그의 이력들은 생생하게 살아나 움직인다. 노가다란 노가다는 두루 거쳐 본, 그의 생은 참으로 화려하다. 아니 눈물겹다. 그의 삶을 한마디 경구로 요약하자면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쯤 될까. 하지만 그의 노동은 <성공시대> 유명인사들의 그것처럼 성공을 위한 발판이 아니었다. 그의 노동은 말년에 뜨듯한 집한칸이라도 마련하기 위한 것도 아니요, 먹물들의 위장취업처럼 발각되면 그만두고 말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 노동은 차라리 구원이었다 한다. 일에 몰입하지 않으면 일 속에 빠져들지 안으면 과거의 고통들이, 곡절많은 가족사가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기 때문이라 한다.

간난신고의 팍팍한 삶 속에서 문학과 조우하게 된 것은 작가 유용주에게 또 어떤 구원이었을까. 노동이 삶을 지탱해나가기 위한 오기부림이었다면 문학은 그의 생을 '경험'에 묶어두지 않고, 향내 나는 것으로 발효케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글을 통해 오랜동안 잘 담금질 된 빛나는 강철을 보게 된다. 푹 고운 사골국물을 맛보게 된다. 결 곱게 잘 짜여진 직물을 만져보게 된다. 그의 가슴아픈 가족사와, 노동의 역사와, 문우들과 벌인 취객열전들을 정신없이, 숨가쁘게 읽어내린 후 드는 생각은 크게 두가지이다. 첫째는, 부박한 땅 위에서나마 땀 흘리며 피워낸 꽃이 더 아름답다는 진리를 또한번 재확인 하게됐다는 것이고, 둘째는 웬지 모를 아쉬움이다.

'아직까지 시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 문학은 자서전에 불과합니다. 누구에 대한 외침이 아니라 오직 제 자신에 대한 반성과 다짐입니다.'

유용주 시인 스스로도 말했듯이 그의 글들이 아직 자기고백의 중간보고서이기 때문일까. 그의 끝간데 모르는 폭음이 쉴 틈을 가질 때, 그의 아픔들이 좀 더 곰삭여질 때 그의 시야는 좀 더 넓어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여태까지는 제 자신 하나 감당하지 못해 버둥거렸고, 핍진한 가족사에 매달려 정신이 없었는데 지금부터는 옆사람, 그리고 이웃들과 어울려 사는 방법을 배우겠습니다'라는 그의 고백이 더욱 넓고 깊어질 앞으로의 글들을 기다리게 만든다. 맷집좋아 보이는 든든한 외모만큼이나 동시대의 핍진한 삶을 끌어안을 넉넉한 품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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