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을유세계사상고전
토머스 모어 지음, 주경철 옮김 / 을유문화사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유토피아에는 크게 두 종류의 사람이 산다. ‘자유인’과 ‘노예’. 자유인으로 남느냐, 노예로 전락하느냐 사이에는 하나의 ‘선’ 이 있다. 그것은 방종할 자유, 타락할 자유다. 선만 넘지 않으면 얼마든지 물질적 풍요와, 과하지 않은 노동, 쾌적한 여유를 누릴 수 있다. 반면 선을 넘어서면, 온갖 더럽고 힘들고 귀찮은 노동을 떠맡아야 한다. 그러니 유토피아의 시민들이 어찌 고분고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토피아의 자유인들에게 ‘방종할 자유, 타락할 자유’가 없다는 것은 커다란 역설로 다가온다. 그들은 정말로 행복할까? 말끄므레한 모범시민의 얼굴 뒤에 감춰져 있을 자기검열과 신분하락에의 불안, 그 속에서 디스토피아의 징후를 읽게 된다.

유토피아에는 참으로 편리한 ‘인간분리수거’ 방법이 있다. 범죄자, 부랑자, 거지 등 소위 골치 아픈 인종들은 하나로 묶어 사회에서 격리시킨 다음, 노역에 종사시키거나 수도원에 감금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격리 시책은 우리나라에서도 시행된 바 있다. IMF 이후 노숙자들이 눈에 띄게 늘어난 98년도 즈음이었다. 해고당한 노동자, 명퇴 당한 전직 회사원, 부도 난 전직 사장 등 다양한 이력을 지닌 자들이 두루두루 섞여 있었는데, 밖에서 보기엔 그저 한 무더기의 부랑자로 보였나 보다. 국가에서는 ‘노숙자 쉼터’라는 것을 지어서 반강제로 입소시키는 방안을 마련했다. 밥 주고 잠만 재워주면 감지덕지할 줄 알았나 보다. 하지만 엄격한 집단 생활, 그에 따르는 규제, 관리자들의 비인간적 대우와 폭행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차라리 대합실에서 자는 편이 낫다”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노숙자에서 인권활동가로 변신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소년의 집’ 출신으로 선반공으로 일하던 중 해고되어 부산역 앞에서 노숙생활을 시작했다. 노숙은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노숙자의 인권을 주장하게 된 것도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노숙자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바라는 그의 목소리는 “배 부른 소리 하고 있네”라는 싸늘한 시선에 번번이 튕겨 나왔다. 그가 손수 기획했던 99년 ‘노숙자를 위한 인권영화제’의 관객은 기획자였던 그와 자원봉사자였던 나, 단 둘이었다. 밥보다 자존심이 먼저였고, 노숙자의 자유를 주장했던 강씨 아저씨,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물론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는 강씨 아저씨 같은 사람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인권을 주장하는 ‘반항적인 부랑자’라니 가당키나 할 소린가.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검열에 시달려야 할 자유인, 부자유 속에서도 끽 소리 하나 못내는 노예, 그들은 정말로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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