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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서 - 뇌과학의 살아있는 역사 에릭 캔델 자서전
에릭 R. 캔델 지음, 전대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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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의 역사

 이 책은 평생을 기억의 메커니즘을 연구해온 신경과학자의 생애와 연구 과정에 대한 기억을 담았다. 모든 이의 기억은 그 만큼의 역사와 동일하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은 인간 에릭 캔델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는 크라우스가 자기 파괴의 실험실이라고 부르던 오스트리아 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빈은 모든 전통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혁명이 일어나던 장소이다. 언어의 자명함을 의심한 비트겐슈타인부터 표현주의 양식을 이끄는 클림트, 에곤 쉴레, 코코슈카 그리고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프로이트까지. 하지만 유태인인 그는 이러한 기억을 유산으로 가지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야만 했다. 특히 그 곳에 스스로 동화되기 위해 독일식 이름인 에리히를 버리고 에릭이 되었을 때, 그의 심정이 어떠하였을 지는 21세기 한국에서 살아가는 내가 미루어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2.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지금 나는 내 기억을 불러내어

다시 한 번 상기한다. 초목이 아는 것,

창밖으로 보이는 해바라기가 아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하나의 별이라는 것을,

누가 이것을 잊게 하는가? 초침이 멈춘다면,

천년을 계획하는 것,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한스 카로사 해 지는 땅의 비가

 

 인간 정신의 안과 밖이 모두 파괴 되었던 시기. 에릭 캔델는 과학자로서 인간 정신의 근원인 기억을 연구하였다. 기억의 메커니즘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태어난다는 점에서 모두 동등하다. 그러나 메커니즘을 통해 기억되는 순간들은 일차적으로 모두 개인적 차원의 가치를 지닌다. 이 순간들은 모두 라는 주체를 통해 하나로 연결된 역사를 형성한다. 결국 신경과학자들이 밝혀낸 연구 결과는 우리가 기억을 SF 영화에서처럼 한 순간의 기억을 완전히 삭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3. 과학의 시대와 반성

 20세기는 과학의 세기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과학의 영향력이 폭발적으로 확장하는 시기이다. 심지어 요즘에는 과학이 인문학의 영역마저 모두 잠식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정리하였듯, 현재로부터 미래를 예언하려는 인과 명제에 대한 믿음은 모두 미신이다. 다만 과학은 실증적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인과 명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단지 그 뿐이다. 과학의 정당화는 전적으로 인류의 실용성에 있다. 이러한 선을 넘어섰을 때, 과학은 신의 얼굴을 하고 지상에 천국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지옥을 완성시킬 것이다. 우리는 두 번의 세계 대전으로 이미 충분히 경험하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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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행동의 논리 : 공공재와 집단이론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07
멘슈어 올슨 지음, 최광.이성규 옮김 / 한국문화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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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인간 행위를 조롱하거나 한탄하거나 경멸하기보다는 이해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해 왔다. 


-바뤼흐 스피노자 정치철학논고

 

1. 비틀거리는 집단

 복잡하고 다양해진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자신과 동등한 목적을 가진 사람과 팀을 맺어서 활동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팀 내부를 살펴보면 종종 재대로 활동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집단이 커질수록 더욱 심한 경향을 띤다. 속된 말로 버스 태워준다는 바로 이 표현. 도대체 이런 현상은 왜 발생하는가?

 

2. 공공재

 멘슈어 올슨은 자신이 쓴 이 저서에서 이 현상을 경제학의 접근을 통해 해명하고자 한다. 그는 이런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공공재(올슨이 쓸 당시의 표현에 의하면 집합재<Collective goods>)’의 고유한 특성에 있다고 설명한다. 공공재란 1)비배재적이고 2)비경합적인 특성을 가져서 시장에서 유통되지 않는 재화나 서비스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이 재화(혹은 서비스)는 집단 내부의 모든 경제 주체에게 해당되며, 선착순이라든지 어떤 순서 없이 모두 동일하게 적용된다. 일반적으로 공공재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에는 주로 국가에서 생산하는 국방 서비스나 치안 서비스 등을 말한다. 그러나 올슨은 국가를 포함한 모든 집단 특히 집단의 규모가 커질수록 공공재에서 기원하는 문제를 가진다고 바라본다. 예를 들어 국회의 정당이나 대기업, 시민단체, 이익집단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렇다면 공공재가 가져오는 문제는 무엇인가?

 

3. 무임승차자

 그것은 바로 무임승차자 문제이다. 앞서 밝혔듯이, 공공재는 그 성격상 집단의 모든 사람이 누린다. 따라서 공공재를 생산하는 것은 경제 주체로서 집단에 속한 모든 사람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모든 개개인은 집단이기에 앞서 가장 기본적인 경제 주체이다. ‘나 한명쯤은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만약 한 개인이 효용을 극대화하고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경제적 인간이라면, 공공재 생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공공재를 획득하려는 도덕적 헤이에 빠지게 된다. , 스스로 무임승차자(Free Rider)가 되려는 욕구에 시달린다.

 

4. 집단행동의 논리

 결국 올슨은 이 불가피한 사태를 줄이려면 별도의 경제적 유인(Incentive)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의 이 유명한 통찰은 조금 익숙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중요성이 줄어든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이론은 현재 구글 스칼라의 논문 피인용 지수 기준으로 무려 37457회이다. 전 분야 통틀어서 이보다 더 풍부하게 인용되는 저서는 상당히 드물 것이다.

 

5. 더 나은 사회를 위한 통찰

 이 리뷰의 제목은 팀 프로젝트에서 꿀 빠는 사람이 생기는가?‘이다. 열심히 프로젝트를 수행한 어떤 이에게는 그저 화내고 끝냈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올슨에게 그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고 평생에 걸친 연구주제였다. 그의 뛰어난 혜안은 평범한 일상에서부터 국가 단위의 비효율성을 규명하고 이를 극복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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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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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아성애자 나보코프?

 롤리타는 10대 소녀 '돌로레스'를 사랑하는 중년 남자 '험버트'의 이야기이다. 나보코프가 롤리타에서 다루는 소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비일상적이다. 더욱이 그의 시대에서는 이게 어떤 식으로 수용되었을지 상상이 잘 안된다.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나조차도 지하철에서 당당하게 읽지 못하게 만드는 그는 어떻게 이런 소재를 차용했을까? 혹시 그는 소아성애자인가?


2. 예술의 거짓말

 롤리타는 소설이므로 거짓말이다. 얼핏 살펴보면 아주 자명한 이 명제가 실은 롤리타를 이해하는 실마리이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 실재처럼 공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처럼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보면서 울고 웃는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기묘한 능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한낱 허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롤리타의 묘미는 바로 이 지점을 공격한다. 그러니까 윤리적으로 불편한 소재가 실은 나보코프의 의도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롤리타는 다른 1인칭 시점 소설처럼 화자가 상황에 대하여 말한다. 그런데 그 도처에서는 언어의 수사 기법을 교묘하게 사용하여 화자가 말하는 것을 부정하는 해석이 가능하게끔 만들어졌다. 예컨대, 돌로레스는 험버거보다 햄버거를 좋아한다는 험버트의 말이라든지 작품 말미에 명백한 유죄(Clear Guilty)를 연상시키는 클레어 퀼티와 싸워서 이기는 험버트가 나오는 부분이 있다.


3. 거짓말의 예술

 어떤 측면에서 소설의 허구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폭로하는 것은 예술성을 부정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오해를 사기 쉽다. 그러나 롤리타는 한편으로 거짓말의 예술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롤리타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해석 즉, 소아성애자의 변명이라는 해석은 그것의 참됨을 부정하는 것 만큼이나 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위에서 든 예시는 그가 자아낸 퍼즐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근사한 문이 있어서 다가가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고 보르헤스를 극찬하는 나보코프의 말은 자신의 소설관을 나타내는 말로도 보인다.


4. 후퇴하는 사실

 그렇다면 롤리타는 앞서 논의한 것처럼 아동성애자의 변명인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세밀하게 독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동성애자의 사랑이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무엇인가? 정답은 "모른다"이다. 나보코프는 어쩌면 거기에서 그런 질문을 하는 독자를 조롱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잘 알다시피 소설은 전부 거짓말이니까.  

 

5. Lolita, light of my life, fire of my loins.

 지금까지 본 것처럼 롤리타는 굉장히 지적 서술을 추구해서 글이 다소 건조할 것이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런 비관주의를 무참히 짓밟는다. 롤리타는 놀랍게도 시의 함축성과 음성 언어의 아름다움을 가져서 장문의 시처럼 느껴진다. 나보코프의 표현력은 러시아에서 이주한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우아하다. 위에 언급한 몇몇 수사 기법을 통한 언어유희는 순간순간 불쑥 찾아와서 번개가 떨어지는 듯한 체험을 느끼게 해준다. 이러한 특징은 중간에 느리게 진행되어 살짝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서사 플롯을 어느 정도 잊게 만든다.


6. 상상하라 그러나 의심하라

 혹자는 나보코프의 이러한 소설들을 가르켜 포스트모더니즘의 산파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 자체에 방점을 찍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축소 해석에 동의할 수 없다. 롤리타는 토머스 핀천이나 존 바스의 그것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의 낄낄거림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교묘하게 질주한다. 롤리타를 비롯한 그의 소설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두 요소 모두 충족하는 거의 불가능한 짓을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 소설의 이러한 복합적인 관점은 현대인이 살아가면서 갖추어야 할 두 요소의 '화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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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논고 해제 - 비트겐슈타인 세계로의 초대
조중걸 지음 / 북핀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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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새로운 지평

 비트겐슈타인은 TIME지가 선정한 20세기의 인물 중 유일한 철학자이다. 왜 하필 그인가? 그것은 그가 19세기까지의 서양철학의 진리를 가장 유효하게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그 진리는 바로 로고스(Logos)이다. 그리스어인 로고스는 언어, 진리라는 뜻이다. 플라톤 이래 모든 철학자는 바로 로고스를 사용하여 자신의 철학을 확립하고 비판한다. 그런데 이들은 로고스 자체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다. 청년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철학의 문제들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데에서 발생하는 무의미(Non-Sense)에서 기인한다고 진단한다.


2. 20세기의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언어의 표상으로서의 세계'

 플라톤은 세계를 그려내는 언어를 말한다. 인간만이 사용하는 로고스는 절대적 진리 그 자체이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이 언어가 그려내는 세계만을 볼 수 밖에 없다고 반박한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 소크라테스의 후계자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은 무의미한 언어를 제거하는 학문이다. 무의미한 언어는 인과 관계에 대한 독단적인 명제이다. 이러한 명제를 토대로 둔 윤리학, 미학, 종교, 수학, 과학은 모두 무의미한 명제이며, 다만 과학은 실증적인 근거를 통해 일시적으로 정당화될 뿐이다.


3. 비윤리적인가?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일견 당황스럽고 한편으로는 매우 불편하다. 특히 윤리학에 대한 그의 비판은 수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비판한 것은 정확하게는 '윤리 명제'이다. 윤리는 다만 언어의 세계 너머에 있을 뿐이다. 그는 거짓된 언어가 만들어낸 모든 만능주의를 혐오한다. 그는 어떠한 미신의 지배에서도 벗어나 풀 한 포기처럼 그저 묵묵히 살아가야 할 '일상의 인간'을 구원한다.


4.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

 때때로 우리는 너무 쉽게 말하고 너무 쉽게 믿는다. '안아키'를 신봉하는 자는 현대 과학보다 더 심한 자연주의적 오류를 발견하지 못해 애먼 아이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IS는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도덕주의적 오류를 발견하지 못해 교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있다.  모두 헛된 인과명제의 맹신에서 나온 불행이다. 물론 그렇다고 비트겐슈타인처럼 방에 코끼리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지를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의 반성적 성찰은 언어를 사용하여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가길 원하는 사람에게 어떤 시선을 견지할 필요가 있는지 밝혀준다. 너 자신을 '제대로'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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