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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1. 소아성애자 나보코프?
롤리타는 10대 소녀 '돌로레스'를 사랑하는 중년 남자 '험버트'의 이야기이다. 나보코프가 롤리타에서 다루는 소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비일상적이다. 더욱이 그의 시대에서는 이게 어떤 식으로 수용되었을지 상상이 잘 안된다.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나조차도 지하철에서 당당하게 읽지 못하게 만드는 그는 어떻게 이런 소재를 차용했을까? 혹시 그는 소아성애자인가?
2. 예술의 거짓말
롤리타는 소설이므로 거짓말이다. 얼핏 살펴보면 아주 자명한 이 명제가 실은 롤리타를 이해하는 실마리이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 실재처럼 공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처럼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보면서 울고 웃는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기묘한 능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한낱 허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롤리타의 묘미는 바로 이 지점을 공격한다. 그러니까 윤리적으로 불편한 소재가 실은 나보코프의 의도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롤리타는 다른 1인칭 시점 소설처럼 화자가 상황에 대하여 말한다. 그런데 그 도처에서는 언어의 수사 기법을 교묘하게 사용하여 화자가 말하는 것을 부정하는 해석이 가능하게끔 만들어졌다. 예컨대, 돌로레스는 험버거보다 햄버거를 좋아한다는 험버트의 말이라든지 작품 말미에 명백한 유죄(Clear Guilty)를 연상시키는 클레어 퀼티와 싸워서 이기는 험버트가 나오는 부분이 있다.
3. 거짓말의 예술
어떤 측면에서 소설의 허구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폭로하는 것은 예술성을 부정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오해를 사기 쉽다. 그러나 롤리타는 한편으로 거짓말의 예술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롤리타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해석 즉, 소아성애자의 변명이라는 해석은 그것의 참됨을 부정하는 것 만큼이나 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위에서 든 예시는 그가 자아낸 퍼즐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근사한 문이 있어서 다가가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고 보르헤스를 극찬하는 나보코프의 말은 자신의 소설관을 나타내는 말로도 보인다.
4. 후퇴하는 사실
그렇다면 롤리타는 앞서 논의한 것처럼 아동성애자의 변명인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세밀하게 독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동성애자의 사랑이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무엇인가? 정답은 "모른다"이다. 나보코프는 어쩌면 거기에서 그런 질문을 하는 독자를 조롱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잘 알다시피 소설은 전부 거짓말이니까.
5. Lolita, light of my life, fire of my loins.
지금까지 본 것처럼 롤리타는 굉장히 지적 서술을 추구해서 글이 다소 건조할 것이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런 비관주의를 무참히 짓밟는다. 롤리타는 놀랍게도 시의 함축성과 음성 언어의 아름다움을 가져서 장문의 시처럼 느껴진다. 나보코프의 표현력은 러시아에서 이주한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우아하다. 위에 언급한 몇몇 수사 기법을 통한 언어유희는 순간순간 불쑥 찾아와서 번개가 떨어지는 듯한 체험을 느끼게 해준다. 이러한 특징은 중간에 느리게 진행되어 살짝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서사 플롯을 어느 정도 잊게 만든다.
6. 상상하라 그러나 의심하라
혹자는 나보코프의 이러한 소설들을 가르켜 포스트모더니즘의 산파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 자체에 방점을 찍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축소 해석에 동의할 수 없다. 롤리타는 토머스 핀천이나 존 바스의 그것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의 낄낄거림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교묘하게 질주한다. 롤리타를 비롯한 그의 소설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두 요소 모두 충족하는 거의 불가능한 짓을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 소설의 이러한 복합적인 관점은 현대인이 살아가면서 갖추어야 할 두 요소의 '화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