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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 그의 생애와 사상
이수정 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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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 하이데거를 논하기에 앞서

 먼저 이 책의 장점을 밝히겠다. 내가 이 책을 읽을 당시에는 뤼디거 자프란스키가 쓴 하이데거 평전이 나오지 않았었다. 따라서 인간 하이데거의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책은 박찬국이 쓴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나 지금 해설하고 있는 이 책 정도이다. 그 중에서는 이 책은 좀 더 하이데거의 인생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술하였다. 하지만 이 책에서 설명하는 하이데거 사상에 대해서는 너무 함축적으로 적어놓아 처음 하이데거를 접하는 사람에게는 조금 버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책의 분량 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본다.

 

2.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철학자들

 20세기에 후세에 압도적으로 영향을 많이 남긴 (이제는 너무나 낡은 용어인)대륙철학자는 단연컨대 마르틴 하이데거이다. 그에게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진 철학자들만 해도 장 폴 샤르트르, 한나 아렌트, 칼 야스퍼스와 같은 실존 철학자부터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 엠마누엘 레비나스, 알랭 바디우, 자크 라캉, 슬라보예 지젝 등이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리처드 로티 등 일부 분석 철학 계열에서도 하이데거를 주목한다. 이제 그는 어디에서나 재해석되는 상당히 중요한 철학자로 인식된다.

 

3. 나치옹호주의자 하이데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의 철학 외적인 생활에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이러한 이야기는 나치 독일 시대에 대학 총장을 맡을 때부터, 자신의 유태인 스승 후설을 교수직에서 쫓아낼 때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정도 소강 상태를 보였던 이 논쟁거리는 최근에 발견된 하이데거의 비밀 일기장인 검은 노트에서 반유태주의적 태도가 나와 다시 하이데거와 나치즘의 관계에 대해서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이런 분야는 내가 하이데거 전문가도 아닐 뿐더러 어느 한 입장을 취해 딱 잘라 평가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결국 나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다. 다만 나 역시 그가 후기 사상에 가까워질수록 드러나는 독단적인 면모를 조금 느꼈다. 이러한 예화 중 하나는 하이데거가 존재자가 말을 걸어올 때 사용하는 언어는 오직 독일어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4. 20세기 서구 사회의 유태인에 대한 일반적이라고 간주되는 시선

또한 당시 유태인들은 서구 사회의 이방인으로서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기에 상업이나 금융업 같은 천대받던 직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유럽인들의 관점에서 유대인은 계산에 밝고 욕심이 많은 이미지였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나오는 유명한 유태인 등장인물 샤일록의 성격은 유럽인들의 그런 편견을 엿볼 수 있다. 하이데거 후기 철학의 내용 상 계산적인 사고를 한다고 믿어지는 유태인의 행동은 곧 존재자를 은폐하고 무시하는 행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이 존재자로서 유태인을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하는 것으로 보인다.

 

5. 풍요로운 삶을 살아내는 것에 대한 하나의 예시

정리하자면 하이데거는 유래 없는 독특한 철학으로 많은 이들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나치를 옹호하는 그의 태도가 따라서 하이데거 철학 자체의 문제점으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발생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하이데거의 생각은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마땅하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비판적 견지를 유지할 때, 하이데거의 철학은 상상과 반성이 어느 정도 훌륭한 예시라는 답을 남기고 싶다. 나는 리뷰나 페이퍼에 대한 관점을 개설하는 글에서 풍요로운 삶의 조건으로 상상과 반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이데거는 사물을 숨겨진 존재자에 대해 상상하였다. 이 짧은 문장 안에 담겨 있는 그의 작은 발걸음이 80권에 육박하는 하이데거 전체 사유의 출발점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후기 철학에서 과학 기술의 시대에 살아가는 인간이 어떤 반성을 하여야 하는가에 대해 잘 풀어놓았다. 이런 시선에서 그는 내가 중요시 여기는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성취했다고 바라본다. 비록 앞에서 찾아본 그의 무비판적 시선을 감안하더라도 이런 점을 완전히 무시하긴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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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과 논문 이학문선 3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이기상.신상희.박찬국 옮김 / 이학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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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만국의 인간이여, 사유하라

 철학 책을 읽다 보면 사유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대체 그 놈의 사유란 무엇인가? 사유에 대한 가장 간단한 정의는 아마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생각에 대한 생각'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특정 학문이나 과목에 대한 메타적인 생각을 말한다. 철학이 사유하는 것이라면, 철학은 일종의 메타 학문이라 칭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생각을 가졌던 사람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는 후기 철학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부터 세상 사람들에게 사유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경고를 분명히 하고 있다. 불행히도 하이데거의 저서는 소제목 패러디에 써먹은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마음 편하게 들여다보기를 시도할만큼 그리 달달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분홍색의 이 예쁘장한(?) 하이데거의 국역본에서 발견한 그의 독특한 기술철학을 생각하면 그 만한 가치가 가진다고 말하고 싶다.


2. 존재 망각 현상

 하이데거가 후기 철학을 설파하던 20세기 초중반은 세계 대전에 거쳐 눈부신 과학 발전을 이루던 시기이다. 당시에 비하여 다소 주춤하는 감도 있지만 오늘날 역시 과학의 시대라고 부를만하다. 따라서 그는 이 시대가 가진 문제점으로 사유가 부재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한 실마리는 그의 전기 철학을 대표하는 저서인 '존재와 시간'에서 이미 얻을 수 있다. 그는 거기서 사용 중인 도구에 대한 존재 망각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가 부각되는 것은 그 도구가 고장나거나 훼손될 때라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이 글을 노트북을 사용하여 작성 중이다. 보통 노트북을 사용 중에는 도무지 노트북에 대해서 큰 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된다. 그러다가 나는 혹시 노트북이 말을 안 듣는다면 비로소 여기에 불만을 가지면서 그 존재에 대해 인식할 것이다. 하이데거가 추상적으로 말한 해설은 바로 이와 같은 특징을 말한다. 


3. 무사유의 과학 기술 시대

 이를 좀 더 확장하면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인간은 더 이상 존재에 대한 고찰 없이 단지 도구로서 사물과 생명체를 바라볼 뿐이다. 지구의 모든 것들은 전부 가공해서 사용해버려 마땅하게 되버린 것이다. 그는 심지어 여기서 홀로코스트를 가능하게 만든 철학의 부재를 찾는다. 헛된 이상에 눈이 먼 게르만 인들에게 타 인종들은 모조히 희생되고 파괴되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나는 이러한 생각이 21세기가 된 오늘날에도 조금씩 변형되어 아주 강하게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GMO식품이나 동물 생체 실험, 고래 불법 남획과 같은 생명윤리에서부터 열정페이, 갑질과 같은 인간경시사상까지 폭넓게 적용될 수 있다.


4. 진정한 공감의 연대를 위하여

 하이데거는 존재가 시(詩)적으로 속삭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한다. 처음 그의 언어를 따라 가다보면 얼핏 신변잡기처럼 들리지만, 나는 그가 공감을 위한 상호존중의 필요함을 강조한다고 본다. 인류의 역사는 공감의 확장을 통해 발전하였다. 인간은 서로의 견제를 통한 초기 국가 성립에서 어느덧 공동체를 상상하고 애국심이라는 감정을 발명했다. 이제 인간은 지구촌을 꿈꾸며 한편으로는 인권의 범위를 넘어서는 동물권을 주장한다. 이처럼 공감은 라포(심리학), 사회적 자본(정치학), 신용 등급(금융) 등 다양한 학문에서 조금씩 다른 의미로 사용할 만큼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은 종종 공감을 잘못 이해하여 그것이 다른 사물이나 생명체에게 투영해야 할 헤게모니로 이용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즉, 당사자의 지평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우리가 족같이'를 강요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문제는 남을 헐뜯는 행위부터 조직 내 집단 따돌림, 자신의 만족을 위한 학대 및 살인 등 일일히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부지기수이다. 서로를 존경하는 문화는 상대방의 지위나 능력이 나보다 뛰어나서 우상으로 모시는 게 결코 아니다. 존재 하나만으로 서로 존중할만한 가치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대화하기를 시도하는 삶의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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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철학의 정원 19
박찬국 지음 / 그린비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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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 이전의 철학자들 가운데에는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가 있었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공간)에 대하여 생각하던 철학자이다. 반면 헤라클레이토스는 시간을 사유하는 철학자이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와 같은 유명한 격언을 남긴 것도 바로 그이다. 엘레아학파에 의해서 두 철학자는 서로 대립하는 관계로 여겨졌다. 이것을 해소하고자 시도했던 두 인물이 있으니 바로 헤겔과 하이데거이다. 이 중에서 하이데거에 대해 논해보자. 하이데거는 자신의 전기 철학의 대표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바로 이러한 시도를 한다. 존재와 시간은 비록 미완성작(후에 다른 저서에서 부족한 부분을 이래저래 보충하긴 한다)이지만 이 주제에 대해서 가장 심도있게 고민한 저서로 꼽힌다.


2. 존재와 시간

 마르틴 하이데거는 한국 학계에서 상당히 인기 있는 철학자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발간된 번역서나 연구서의 수만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쇼펜하우어만 보더라도 그의 대표 저서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상당히 최근에 번역되었음을 볼 때 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물론 단순히 인기 하나로만 이런 현상의 원인을 환원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박찬국을 비롯한 뛰어난 하이데거 연구자들의 노고에서 비롯되는 부분을 축소 해석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어떤 철학자의 생각이든 그렇지 않겠냐만은 이런 좋은 현상에도 불구하고 흔히 하이데거의 철학은 매우 어렵다고 간주된다. 번역어 자체가 한자로 만들어진 용어가 많을 뿐만 아니라 평소에 고민하지 않은 두 주제인 존재와 시간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박찬국의 이 강독이 없었더라면 하이데거에 대해서 영영 거리를 두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3. 존재

 하이데거는 가장 자명하다고 여겨지는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인간 A은 자신의 존재 혹은 다른 사물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지곤 한다. 특히 인간에게 이따금씩 찾아오는 불안감(sorge)은 이런 물음을 가지도록 종용한다. 데카르트만 보더라도 확실한 것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지 않았나? 하이데거는 존재를 나타내는 존재자는 세계-안에 있는-존재라고 말한다. 여기서 존재를 나타내는 존재자란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자 즉, 앞의 인간 A가 된다. 이러한 물음을 던지는 존재자는 오직 인간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다른 존재자들과 구분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주어진 세계 안에 던져진 존재인 동시에 세계를 구현하는 존재자이다.


4. 시간

 하지만 대다수의 인간은 이런 존재 물음을 가지지 못한 채 자신의 존재에 대해 망각하며 살아간다. 이들에게 시간은 지금의 연속으로 받아들여진다.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를 자신이 나타내고 있음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에게 죽음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사건이다. 때때로 우리는 외부적인 원인으로부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는데 이것이 흔히 일컫는 자명하다고 믿었던 존재를 잃어버렸다(=실존한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병마를 비롯한 각종 인생의 무상을 경험하게 만드는 시련을 가리킨다. 박찬국은 하이데거가 해석하는 이런 현상에 대해 잘 서술한 소설로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존재를 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은 어떤가? 그런 인간은 자신의 세계를 자기 자신이 밝히고 있기 때문에 생과 죽음을 포함한 삶의 모든 것이 이미 주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즉, 과거-현재-미래가 함께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음마저 이미 선행한 것으로 인식하고 이러한 현실에 대해 온 몸을 던지며 살아간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시간 이해는 얼핏 현대 물리학에서의 시간 설명과 흡사해보인다. 물론 하이데거의 시간 이해에서 과거와 미래는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을 말하는 전적으로 인간적인(Personal) 시간 이해이다.


5. 죽어감, 태어남, 살아냄

 하이데거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만큼 충분히 늙었다고 언급한다. 물론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필립 로스가 말하는 노년은 대학살이라는 절망적인 한탄을 완전히 머릿 속에서 지워버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죽어감은 분명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이데거 역시 이를 부정하기 위해 앞의 말을 한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죽어감은 태어남은 하나이다. 생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으로 서로 함께한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를 모두 품고 담담히 살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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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jungil94 2019-03-24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에 대하여 고민하던 중 좋은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뤼미에르 2019-03-24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움이 되셨다니 저도 뿌듯하네요. 즐거운 독서 되시길 바랍니다.

뤼미에르 2019-03-24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박찬국 교수님의 강의가 궁금하시다면 네이버 열린 연단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신의 바라봄 가톨릭문화총서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지음, 김형수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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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의 이해

 신의 존재는 신념의 영역인가? 그렇다. 신의 존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속하기 때문이다. 일단 신은 세계에서 표상하고 추론할 수 있는 대응물이 없다. 무한자인 신은 인간의 유한한 인식 능력(=오성)으로 포착할 수 없다. 과학처럼 수많은 실험을 통해 신의 존재의 실증성을 담보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Non-Sense)하다. 물론 신은 특정 언어 사용자들의 언어 게임 안에서는 모순으로 무너질 수 없는 다리처럼 말해질 수는 있다. 이 경우 신은 언어 사용자들의 사적 언어로써 필요에 의해 사용되는 개념이 될 것이다. 새로운 언어 사용자에게 신이 필요 없다면 다리는 무너진다. 이러한 신은 무한자라고 말할 수 없다.


2. 신의 입장에서 존재의 평등함

 무한자인 신은 전지전능해야만 한다. 전지전능한 신은 물질과 시간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신의 바라봄은 모든 거리와 방향을 무시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풀 한 포기와 인간 한 명의 신과의 거리는 서로 동등하다. 다시 말해, 신의 입장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 혹은 인간과 생물 사이의 우위는 존재할 수 없다. 어떠한 지식과 지위를 가지든 자신의 위대함을 주장하여서는 안 된다.


3. 인간의 입장에서 존재의 평등함

 인간이 만든 모든 지식과 지위는 임의로 정해진 사회의 인정을 근거로 한다. 이 지식과 지위에는 '인간 A는 인간 B보다 뛰어나다' 내지는 '인간은 어떤 생명체 A보다 뛰어나다'가 해당한다. 이런 사회의 인정은 인간의 인식능력에 의해 종합된다. 즉, 사회의 인정은 종합 명제이고 인간의 인식능력은 분석 명제이다. 한편 종합 명제는 수많은 분석 명제를 분석하여 정초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분석 명제는 말의 의미를 근거하여 참인 명제이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순환적이다. 결국 의미를 가진 모든 명제를 경험적인 명제들만으로 환원하여 정당화하려는 발상은 실패한다. 모든 명제는 새로운 경험에 의해 반증될 수 있다. 따라서 분석 명제의 옳음(참)으로 종합 명제를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디에서도 인간의 뛰어남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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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 : 진리를 향한 주체
피터 홀워드 지음, 박성훈 옮김 / 길(도서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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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바디우에 대한 회상

 어린 시절 니체주의자였던 나는 막연하게 현존하는 최전선의 철학자가 궁금해졌다. 한국 학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수용되는 현대 철학이라고 여겨졌던 것은 프랑스 철학이었고, 그 때 접한 것이 바로 바디우였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바디우는 현대 프랑스 철학이라고 곧잘 불리는 포스트 구조주의 안에서도 특이한 지점에 속한다. 피터 워홀드가 쓴 이 해설서는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에 최고의 저서임은 분명하다. 바디우의 주요 저서인 '존재와 사건'이 품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번역 역시 최악이기 때문이다. 철학을 위한 선언은 그나마 볼만하다. 지금은 그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독특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2. 플라톤과 라캉의 기묘한 만남

 바디우는 철학자 플라톤과 바디우가 정의한 반철학자 라캉의 후예이다. 현재 내가 그의 철학을 수용할 수 없는 것은 나의 생각이 플라톤의 인식론과 정반대에 속하고 특히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애초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플라톤적인 면모는 현대 집합론으로 해석하는 그의 존재론에서 잘 드러난다. 이를테면 존재의 실존을 모두 무한 집합의 원소로 보았다.


3. 정치, 과학, 예술, 사랑의 진리들

 플라톤과 바디우가 다른 점은 바디우는 하나의 이데아로부터의 진리가 아닌 다수의 진리'들'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그는 정치, 과학, 예술, 사랑이 진리를 생산하는 영역이라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진리들은 후기 하이데거에게서 영향을 받은 용어인 '사건(철학에의 기여 국역본에서 쓰인 새로운 번역어에 따르면 생생한 고유화)'을 통해 출현한다. 철학은 이 영역들을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솔직히 나는 아직도 그가 정치, 과학, 예술, 사랑만이 진리를 생산한다고 보는 당위성을 알 수 없다. 지금으로서는 그의 철학이 Ad Hoc(라틴어로 그것에 대해서)을 설명하는 함정에 빠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Ad Hoc 자체는 정말로 대안을 없을 경우에 논증을 사용하기도 한다. 하긴 라캉을 인정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의 수용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프로젝트가 아닐까 싶다.


4. 사랑의 단상

 이런 비관적인 관점에도 사랑에 대한 바디우의 사유는 인상적이었다. 즉, 사랑은 하나로 합일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마치 둘이서 춤을 출 때 짝을 이루면서 움직이는 것과 같다. 이것은 하나로 보이지만 전적으로 '둘'이라는 것이다. 사랑에 있어서 겸손한 그의 태도는 한번쯤 곱씹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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