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한당들의 세계사 ㅣ 보르헤스 전집 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평점 :
1. 루이스 보르헤스
현대적인
소설가란 누구인가? 아마도 많은 지지를 받을 인물 중 하나에는 반드시 루이스 보르헤스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함께 세계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라틴 아메리카 작가로 손꼽힌다. 플로베르 이후 많은 작가들이 현실을 예술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 즉, 스타일에
대해 많은 천착을 보였다. 그러나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만큼 불필요한 이야기 나열을 최소화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색깔을 깔끔하게 열어젖히는 이야기도 드물 것이다.
2. 예술적 재구성의 대상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소설집 ‘불한당들의 세계사’는 그의 소설들 중에서 가장 이른 연대상에 위치한다. 그만큼 루이스
보르헤스의 스타일이 상당히 불완전하게 구현되어 있다. 실제로 필자의 경우, 그의 전집을 다 읽고 나서 가장 손이 가지 않는 소설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소설집에서조차 자신이 꿈꾸는 유토피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주로 사용된
그의 스타일은 예술 작품을 다시 예술적으로 재구성하는 패러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왜? 그가 보기에 모든 문학은 ‘다시 쓰기’에 불과하다. 새로운 소재 발굴과 묘사는 시대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데에 비하여 작가가 이야기로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모든
문학 작품들이 전부 고만고만해지는 결과를 암시한다. 이러한 측면은
20세기 구조주의의 발전에 따라 플롯을 분석하는 방법이 점차 극한에 달하면서 더욱 부각되었다. 그는
이러한 한계를 탈피하기 위하여 다양한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데 이 소설집에서는 그것이 패러디 기법인 것이다.
원작과 패러디를 모두 읽는 독자에게 패러디 기법은 그 특성상 한데 어우러져 다층적인 의미를 내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가가 글을
쓸 때에 스타일에 좀 더 치중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3. 불온당한 세계사와 온당한 소설의 한붓그리기
“루이스 보르헤스가 세계사라고 붙인 이 책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사와 같은 부분은 사실상 없다.”
만약 독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루이스 보르헤스가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한다. 모든
역사는 필자에 의해 세련되게 표현된 그러나 편향적인 기록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소설과
세계사는 하등 다를 바 없다. 혹자는 역사에 대한 이런 해석이 너무나 회의적이므로 그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지적 무정부주의가 아니며 오히려 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실용적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역사관은 역사를 무작정 거짓이라고 회의하면서 거부하고자 함이 아니라 재구성된 현실이라는 인식 속에서
그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발상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적합하다. 또한 이 소설집은
한편으로 온당한 소설의 역할도 한다. 이것을 읽는 내내 허구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들은 때때로 그의 소설답지 않게 이야기 살짝 늘어지는 측면도 있지만,
배경 설정이나 등장 인물들의 매력으로 보완하고 있다. 사실 그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버리고
소설을 읽으면 꽤 흥미로운 작품들도 몇몇 보인다. 오히려 그의 뛰어남에 대한 선입견으로 작품을 보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원작과 패러디, 불온당한 세계사와 온당한 소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재주를 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