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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ㅣ 보르헤스 전집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평점 :
1. 두번 읽게 만든 책
루이스 보르헤스는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거의 반드시 들어볼만한 인물이다. 나 역시 그랬으며 지금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지만 그 놈의 좋아하는 것의 완전 정복에 대한 갈망때문에 처음부터 가장 유명하고 난해한 것으로 알려진 '픽션들'에 도전하였다. 그의 소설집을 처음 읽는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나의 경우에는 '두려움'이었다. 그 감정은 소설이 가지는 난해함이나 생경함이 아니라 주제가 가지고 있는 힘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당시 픽션들이 가지는 극도의 유명론적 사고관에 대해 어떤 공포심을 느꼈다. 그 때에 나는 생각에 대한 훈련이 전혀 되어있지 않았으므로 무의식적으로나마 학교에서 배운 대로의 지식을 보편타당하게 생각하였다. 이러한 나의 충격은 과거에 이 책을 도저히 완독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몇 년 후 나는 알레프를 경유하고 나서야 진정으로 보르헤스 월드의 시민이 되는 첫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2. 허구들
픽션들. 한편으로는 이 얼마나 건방진 제목인가. 아니 소설이 허구인지 모르고 읽는 독자들이 과연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은 허구들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것은 그 이야기들이 유래 없이 현실을 기만하는 재미를 주기 때문이다.
3. 허구들 속 허구들
메타 픽션들은 픽션들인가. 픽션들을 읽고 이 문장에 대해 고민에 빠지게 된다면 당신은 루이스 보르헤스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상자 속의 상자는 바깥 상자로만 인식될 수도 있다. 또한 상자 속의 상자는 상자 속의 상자라는 두 상자의 의미로 정의할 수도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독자가 바라보고자 하는 지평 만큼 보여지는듯 하다가 사라진다. 루이스 보르헤스의 픽션들에서는 무한 개의 상자가 주어져 있다. 하얀 종이 위에 까만 글씨로 드리워진 문자를 통해 어떻게 무한한 허구의 현상이 발생하는가? 그것은 소설에서 허구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달려있다. 그것은 바로 소설이 전부 사이비 명제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4. 동일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에서 사용한 소설 장치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내가 읽는 판본의 '픽션들'과 동일한 판본들의 그것은 모두 적혀있는 문자가 일치할 것이다. 이것은 이 책들이 모두 동일한 공정을 거쳐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모두 같은 픽션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아마 보르헤스는 아니라고 지적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5. 모순에 기초한 다리는 무너지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서점에 있는 '픽션들'을 보고 모두 그렇게 부르며 동일한 책이라는 생각을 가지 있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가 '동일한 공정을 통해 생산되었다고 말하는 한 판본의 책은 모두 동일하다.'라는 모종의 언어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진리에 의해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언어 사용을 통해 확립되기 때문이다.
6. 픽션들과 인간들
어릴 적 엘리베이터의 양면 거울을 보면서 저기 비치는 내 모습이 어디까지 이어질까 두려워한 적이 있다. 알고 보니 그건 실로 간단하였다. 바로 내가 보고자 하는 곳까지 볼 수 있다. 이 예시에서는 거울과 '나'만 있기 때문에 유아론적인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소설집으로 발표되어 이미 수많은 독자들과 작가의 언어게임으로 확장된 '픽션들'의 경우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픽션들은 그 의미를 파악할 때에는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해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대놓고 명시한다. 그것이 픽션들을 우아한 신전의 기둥으로 보이게 만드는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