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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 미암일기 1567-1577
정창권 지음 / 사계절 / 2003년 1월
평점 :
진작부터 내용이 궁금했던 책인데, 참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미암 유희춘의 개인일기를 바탕으로 16세기 조선시대 풍경을 풀어 쓴 책입니다.
엮은 이의 말마따나 고리타분하고 폐쇄적이며 가부장적인 사회로만 인상지워진 조선시대에 관한 인식을 가볍게 튕겨버리는 상큼하고 유쾌한 책입니다.
소소한 일상이나 사회적 풍경을 통해 보이는 모습들이, 지금 우리 시대나 마찬가지거나 오히려 더 당당한 남녀 평등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물론, 양반 사회에 한정지어진 것이긴 하지만요.(책속에서)
미암과 그의 아내 덕봉이 지닌 각각의 재산과 노비 등은 말로만 부부개별채산이니 뭐니 떠드는 현대인의 농담 따위를 도리어 무색케 합니다.
덕봉의 노비를 미암이 첩에게 보내주자, 자신의 뜻을 묻지도 않고 줘버렸다고 (첩에게 주었다는 것보다, 자신의 노비를 미암이 맘대로 보내버렸다는 것에 대해) 노여워하는 덕봉에게 '옳으신 말씀!' 하는 의미로 미안해하는 미암의 모습이 과거 속의 인물이 아니라, 그냥 주변에서 친숙하게 보여지는 그런 인물처럼 살갑게까지 느껴집니다.
그 시절에는 양반이라면 의례껏 수십칸 집에 모든 가족이 같이 살고 있는 줄만 알았는데, 이 책을 보니 미암은 벼슬하느라 혼자서 한양에서 집을 얻어(빌려) 따로 살고, 아내인 덕봉 혼자서 고향에서(담양, 장성 등지) 식솔 거느리고, 가산 늘리며 살아가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러다가 지금의 숱한 주말부부들처럼 '이렇게는 못살겠다'고 아내를 불러올려 같이 살게 되기도 하구요. 올라와 엉망인 살림을 보며 덕봉은 남편에게 아무리 무심하기로 살림이 이게 뭐냐는 식의 잔소리를 해댑니다. 영 옛날 얘기같지가 않습니다.
한양생활을 혼자 하던 미암이 수개월 동안 여색을 멀리하였음을 자랑하는 서신을 덕봉에게 보내자, 덕봉은 그게 어찌 아내에게 자랑할 일이냐고, 성현의 가르침을 본받으려는 자의 당연한 처신이 아니느냐고 준엄하게 꾸짖고, 그렇다면 자신 또한 미암에게 자랑할 일이 어찌 없겠느냐, 당신 어머니 돌아가실 때 수발을 내 혼자 지성으로 다 하지 않았느냐,.....모쪼록 잡념을 끊고 기운이나 보양해라, 는 단호한 답장을 보냅니다.
지하철에서 이 대목을 읽다가 유쾌하고 재밌어서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그런 아내의 답장들이 구구절절 옳은 소리라며 써놓은 미암의 일기가 소박하고 순진하게 보입니다.
남편의 부모(시부모)를 내 부모보다 공경해야 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기보다는, 당신 부모 내가 이렇게 받들지 않았느냐고 아내가 남편에게 내세울 정도였다는 게 새삼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사람 사는 모습이, 다만 시대적 배경을 조금씩 달리할 뿐 그 안에 들어 있는 자잘한 부대낌 따위는 결국 모두 같은 모양새가 아닌가 싶습니다.
막연히 고리타분할 것같은 조선시대에 관한 책, 이란 이미지를 떨쳐주는 재밌는 책이네요.
줄지어 나온, 조선시대 풍경 이야기들을 읽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