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을 위한 망상 - 박경리 新원주통신 나남산문선 1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정말 좋아하는 작가!

아주 옛날 '길'이라는 잡지가 폐간되지 않았을 때 언제 한번 표지 가득 그의 겹쳐쥔 '손'이 나온 적이 있었다.
흙을 만지고, 땅을 파헤치는 노동의 일상을 한 눈에 보여주는 사진이었다.
'손'이란 때로 얼굴이나 다른 외양보다 훨씬 솔직하게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정직하고 진실한 손이란 생각을 했었다. 아마도 지금은 더 그러하겠지. 

'토지'를 완간하고 그 후의 잡다한 단문이나 소설을 모아놓은 책인 듯 하다. 중복되고 두서없는 내용이긴 하지만, 작가의 사상과 가치관을 들여다보기에 썩 부족하진 않다.

여든이 되는 나이에도 짱짱하게 살아있는 정신이 아름답다. 부럽다.
철저한 반일과 생명사상이 그의 사상의 주축인 듯 싶다.

그의 '반일' 부분에서 퍼뜩 뒤통수가 서늘해진다. 어쩌면 그가 보았던 진실한 면들을 지금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느슨하게 경계를 풀고 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서.

어느 누구의 생각이든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부분의 선택은 자유이기에 어느만큼 그의 생각을 수용할까 잠깐 고민할 수도 있지만, 문득 어렸을 때 할머니가 전해주던 얘기, 마을 유일한 우물이 있어서 길어다 먹곤 했던 마당집을 일본인이 차지하고는 아무도 대문 안에 들여주질 않았다던 옛얘기가 떠올랐다.

여전히 핍박받는 재일동포와 그들의 진실로 아파하고 반성할 줄 모르는 얇팍한 역사의식.
경계를 쉽게 늦출 일이 아니다...

삶을 말랑하지 않게 항상 날을 세우고 팽팽하게 살아내는 듯한 모습이 나를 자극한다.

더 예민하게, 더 고독하게, 더 깊이 있게 살아야 할 것 같은....

 <..나는 인생만큼 문학이 거룩하고 절실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구동의 뜨락은 꽤 넓었고 그것이 내 세계의 전부였습니다. 삶은 준열하고 나날의 노동 없이는 내 자신이 분해되고 말 것만 같았고 긴장을 푸는 순간 눈을 감은 채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모든 것을 거부하고 포기했으며 오로지 목숨을 부지한 것은 가엾은 내 딸, 손자의 눈빛 때문입니다. 그때 머리가 다 빠지고 철색으로 변한 딸아이의 얼굴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내 마음속의 피멍입니다. 그리고 언어가 지닌 피상적인 속성은 지금 이순간에도 절감하고 있습니다. 진실에 도달할 수 없는 언어에 대한 몸부림, 그럼에도 우리는 그 언어에서 떠나질 못합니다. 그게 문학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대목에서 전율한다...

날 잡아서 '토지'를 다시 읽고 싶은데 얼른 손이 가질 않는다. 무슨 다른 잡다함들이 가로막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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