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인데." 그녀가 설명했다. "넌 이미 태어날 때부터 조숙한 애늙은이였어." 그녀가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어루만졌다. "넌 더는 경험할 일이 하나도 없어. 한갓 회상할 일만 남았을 뿐이지. 넌 더 만나야 할 사람도 없어. 이별을 나누기 위한 예외적인 만남을 제외하곤. 그리고 넌 한나절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할 거야. 같은 날 저녁이나 밤에 찾아올 종말을 예기하지 않고선 말이야." (50)
나중에 산 자들을 차차 더 잘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죽은 자들이 그들과 별로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침통한 묵묵무언의 성향도 죽은 자들과 서로 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58)
‘아저씨들의 세계가, 온갖 사물을 일목요연하게 자리매김해 둘수 있는 아저씨들의 안전한 세계가 사라졌기 때문에 겁이 나는 거지요. 사물이 매 순간 스스로를 재창조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지금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에 아저씨는 겁이 나는 거예요. / 아저씨들은 당신네들의 세상만이 진정한 세계라고 항상 자만에 차 있었지요.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진정한 세계는 나의 세계예요. 그건 일차적이고 가시적인 현실 즉 실제로 만져 볼 수 있고 또 움직이는 삶의 이면에 자리한 삶이에요. 아저씨가 보는 것은, 아저씨와 같은 아저씨들이 직면하는 것은 하나같이 죽음이에요. 죽음." (83)
중국인 소녀를 찾아 곳곳을 헤맸지만 그녀를 놓쳐 버린 나, 그녀를 찾아 헤매지 않았지만 대신 나를 만나고 맞이해 준 그들. 그들은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고 있었고, 나는 유유자적한 삶을 살며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해 깊이 사유하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세속을 너무나 많이 겪어 버렸다. 내가 인생을 잘못 이해하고 그것을 낭비했기에 거리는 불안과 동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인생, 결과는 매한가지이다. (130)
난 그저 그들에게 무척 샘이 났어. 어쩌면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들은 늘 자아의식의 범주 밖에 존재함을 원칙으로 했던 반면 나는 그 범주를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야. (174)
주택 단지의 외곽에 있고, 지금은 이용하는 아이들이 없는 정사각형의 놀이터는 거울에 의해 굴절되어 타원형으로 보였다. 하지만 거기에, 적막한 가운데 오랫동안 흔들리고 있는 그네 하나가 보였다. 그러다 아이가 그네를 다시 흔들었고, 눈바람 속에서 그넷줄만이 홀로 몸을 떨었다. "공허, 나의 기본 원칙. 공허, 나의 애인." (81)
그는 가게 안의 어느 자리에 앉아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불현듯 이들 각자에게 어떤 특이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적지 않은 사람들의 삶을 통째로 알아버리곤 했지만, 다음 날 대부분을 잊어버렸다. 반면에 그가 가슴에 간직한 것은 특정한 관용적 표현, 외치는 소리, 몸짓과 말투였다. (85)
현실이 이러한데 그가 예술가라는 것을, 그의 안에 세계의 내부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누가 입증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질문에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할 수 있다.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이미 오래전에 나를 격리시키고 옆으로 밀어 놓으면서 사회인으로서 나의 패배를 시인했다. 나는 평생 동안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제시켰다. 그들의 비밀을 잘 알고 있는 내가 환영받고 포옹받으며, 여기 사람들 사이에 끝까지 앉아 있을지라도 나는 결코 그들에게 속하지 않을 것이다. (97)
그리고 그는 또한 이런 맹세를 하기도 했다. 일에 실패하지 말자고, 다시는 언어를 잃어버리지 말자고, 그러면 언덕 아래 양로원의 조그마한 관현악단은 찌릉거리는 점심 연주 대신에 그럴듯한 종소리를 울릴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그는 지나간 오후를 회상했고, 그때 일어난 일을 기억에 되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카젬메의 커튼 틈새로 흔들리는 가지들과 마우스피스를 입에 문 채 복서처럼 이빨을 드러내며 그 앞을 맴도는 개만이 나타날 뿐이었다. (122)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127)
작년 11월, 난 카트와 함께 줄을 서 있던 어느 매장 계산대에서 나의 옛 제자를 알아보았다. 다시 말해서 그녀가 5-6년 전에 내 제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녀가 어떤 반에 있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난 별다른 뜻 없이 <잘 지내요? 여기 일은 재미있나요?>라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네, 네, 그래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통조림이며 음료 등의 가격을 입력한 후에 <기술학교 들어가서 잘 풀리지 못했어요>라고 말하는 거였다. 그녀는 내가 아직도 자신의 진로를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그녀가 왜 기술학교로 가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분야로 들어갔는지 까맣게 잊어버린 후였다. 난 그녀에게 <또 봐요>라고 인사를 했다. 그녀는 벌써 왼손으로 다음 손님의 물건들을 집어 들면서, 오른손으로는 숫자판을 쳐다보지도 않고 두드리고 있었다. (128-129)
나는 아버지, 어머니, 내 학업, 그리고 다시 아버지 등등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를 써서 그녀에게 매주 보냈다. 그것은 홀가분하게 짐을 덜어버리자는 식이었으므로 아주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어쩌면 답이 없다는 그녀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밑천이라곤 아무것도 없었고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이야기를 꾸며냈기 때문이다. 나는 화장기 거의 없는 늘씬한 금발 머리의 여인, A. E.와 닮은 여인을 본 적이 있는 카페에 매일 저녁 들른다고 꾸며댔다. 나는 항상 그녀 정면에 자리잡고 앉았고, 그녀는 다리를 꼬고 앉아 내게 은근한 미소를 던지곤 했다. 그녀의 치마 아래로 검은색 스타킹이 눈에 띄었다. 편지를 쓰면서 나는 내 입으로는 차마 고백할 수 없는 욕망을 A. E.에게 불러일으킬 심사로 그녀의 대체물인 여자를 통해 에로틱한 장면을 상상했다. 그리고 끝내는 A. E.에게 만나자는 요구를 적고 편지를 봉한 다음 침대 속에 들어가 자위행위를 했다. 훗날 나는 이런 내용의 편지를 쓴 것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편지를 부치기 전에 잠깐 망설였다. 그런데 그 순간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렸다. 그것은 단지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내게 무슨 일이고 일어나길 바라는 생리적 욕구와도 같은 것이었다. 첫사랑을 겪어 보고 싶은 욕망. (14)
사랑을 나누면서 그녀는 몇 번인가 "난 당신 부인이야"라고 외쳤는데 그녀의 말엔 아무 뜻도 없었다. 사실 그녀는 진짜 내 부인이 되기보다는 부인 연기를 좋아했다. 그때 그 상황이 실패처럼 느껴졌다는 기억만 남았다. (42)
어머니는 그 다음주에 이사를 갔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원하는 가구는 모두 가져가도록 했고 심지어 트럭에 짐 싣는 것을 거들기까지했다. 나는 그 사이 내 손으로 처음 한 빨래들을 빨랫줄에 널고 있었다. 마치 오래 전부터 다들 이 일을 마음속으로 대비한 사람들처럼, 모든 게 차분한 가운데 이루어졌다.자갈길 위로 떠나는 트럭 소리가 났고 뒤이어 긴 정적이 내려앉았다.저녁에야 아버지는 어머니가 떠났다는 것을 실감하고 어린 아이처럼 울었다. (80)
아니 에르노와는 또 다르게 순박하게 진실하다. [단순한 열정]을 기준으로 생각하자면 청년의 투박한 열정 버전이랄까. 아니 에르노는 사랑이란 정념만을 깔끔하게 얘기했다면 이 청년은 자기 삶을 얘기한다. 그 정념에 덕지덕지 붙은 삶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