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 어머니, 내 학업, 그리고 다시 아버지 등등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를 써서 그녀에게 매주 보냈다. 그것은 홀가분하게 짐을 덜어버리자는 식이었으므로 아주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어쩌면 답이 없다는 그녀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밑천이라곤 아무것도 없었고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이야기를 꾸며냈기 때문이다. 나는 화장기 거의 없는 늘씬한 금발 머리의 여인, A. E.와 닮은 여인을 본 적이 있는 카페에 매일 저녁 들른다고 꾸며댔다. 나는 항상 그녀 정면에 자리잡고 앉았고, 그녀는 다리를 꼬고 앉아 내게 은근한 미소를 던지곤 했다. 그녀의 치마 아래로 검은색 스타킹이 눈에 띄었다. 편지를 쓰면서 나는 내 입으로는 차마 고백할 수 없는 욕망을 A. E.에게 불러일으킬 심사로 그녀의 대체물인 여자를 통해 에로틱한 장면을 상상했다. 그리고 끝내는 A. E.에게 만나자는 요구를 적고 편지를 봉한 다음 침대 속에 들어가 자위행위를 했다. 훗날 나는 이런 내용의 편지를 쓴 것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편지를 부치기 전에 잠깐 망설였다. 그런데 그 순간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렸다. 그것은 단지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내게 무슨 일이고 일어나길 바라는 생리적 욕구와도 같은 것이었다. 첫사랑을 겪어 보고 싶은 욕망. (14)

사랑을 나누면서 그녀는 몇 번인가 "난 당신 부인이야"라고 외쳤는데 그녀의 말엔 아무 뜻도 없었다. 사실 그녀는 진짜 내 부인이 되기보다는 부인 연기를 좋아했다. 그때 그 상황이 실패처럼 느껴졌다는 기억만 남았다. (42)

어머니는 그 다음주에 이사를 갔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원하는 가구는 모두 가져가도록 했고 심지어 트럭에 짐 싣는 것을 거들기까지했다. 나는 그 사이 내 손으로 처음 한 빨래들을 빨랫줄에 널고 있었다. 마치 오래 전부터 다들 이 일을 마음속으로 대비한 사람들처럼, 모든 게 차분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자갈길 위로 떠나는 트럭 소리가 났고 뒤이어 긴 정적이 내려앉았다.
저녁에야 아버지는 어머니가 떠났다는 것을 실감하고 어린 아이처럼 울었다. (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