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꿈 트리플 16
양선형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있으면서 없는 대상만큼 낯설고 기이한 것은 없다. 평범하게 존재하고 있지만 말이 안 되는 사건의 흐름이 우리에게 친숙하다는 것은, 의식으로 의식의 세계를 볼 때 또는 무의식으로 무의식에 대응할 때의 느낌일 뿐이다. 그의 세계에서 가장 낯익은 것들이 그것을 뒤집어 놓은 시선에서 포착되는, 자기 자신마저에 대해서까지 느끼는 낯설음. 무의식 혹은 잠재된 의식으로 바라볼 때 친숙해 온 모든 것들이 이질감, 이물감, 낯설음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을 확인한다.

 

그는 여전히 실종된 말을 찾을 수 있다는 관념이 무척이나

황당하게 여겨진다는 사실과 싸우는 중이었다.

 

꿈에서 만난 말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써 내려간 이 작품은 활주로에서 도주한 말을 찾는다는 목표로 떠나는 도중 신비롭고 이상한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오로지 주관이 경험한 바에 따라서만 때로는 극사실적으로, 때로는 초현실적이라는 관형어로는 충분치 않을 만큼 꿈결같은 이 작품은 종잡을 수 없는 진행과, 현실과 꿈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오가며 이완 없는 긴장 상태를 오래 유지해야 하는 피로가 독서 과정 내내 나를 괴롭혔다.

 

<말과 꿈>을 느끼면서 느꼈던 양선형 작가의 정밀한 묘사는 하성란 작가의 마이크로 묘사를 떠올리게 했다. 모든 사물의 동작과 내면의 움직임이 세밀하게 포착된 관찰자의 시선은 그의 상상에서, 자신의 의식세계 안에서 주관적으로 기록한다. 그러나 여기서 묘사된 모습과 행위 자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흔하게 해 보고 타인의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매우 상투적이고 친숙한 것들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전혀 낯선 장면을 본듯하고 거기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몇 해가 흐르고 그 나라에 큰 지진이 있었소. 지반이 침하해 도로가 갈라지고 가옥들이 붕괴했소. 대피하지 못한 사상자들이 속출했소. 가족과 집을 잃은 난민들이 거리로 나앉았고, 도시는 와해된 판자와 어마어마한 규모로 내려앉은 돌무더기 사이에서 어수선한 폐허가 되어 있었소. 나는 매일이 절박한 심정이었소. 대사관에 전화해 뒤늦게 오열하며 딸의 소식을 물었다.

"나는 딸의 안부를 규명할 수 없었소. 나는 뉴스를 보았지. 황톳빛 얼굴로 미간을 찌푸린 어린아이의 굶주림, 현장에서 시신을 운구하는 어깨가 가냘픈 승려들, 바닥에 모포를 깔고 김이 나는 양철통 주위에 둘러앉아 수프를 끊이는 낯선 사람들을 보았소. 딸이 살고 있는 나라의 사람들이었소. 그들에게 분배된 비탄과 절망이 내가 기억하는 딸의 얼굴에 환영처럼 드리워졌다오. 그래도 나는 딸이 재해에 휩쓸렸으리라는 가능성은 상상하지 않았소. 그것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언제든 딸이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오. 나는 구호 작업을 벌이는 사람들과 황폐한 거리에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퍼더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보았소. 나는 나를 안심시킬 긍휼한 착각을 갈망했다오. 그들 사이에서 혹여 딸을 닮은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거나 희박한 확률임을 예감하고 있었소. 애통한 수심과 계속되는 여진으로 인한 공포와 불면이 켜켜이 퇴적된 그들의 얼굴을 녹화된 비디오의 일시정지 화면 속에서 일일이 헤아리며 뚫어져라 바라보았소. 나는 그렇게 딸의 실마리를 찾아다녔소. 그들은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딸이 그곳에서 짓고 있을 어떤 표정의 그림자를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오. 이내 기사 할아버지는 트럭 적재함에 쪼그려 앉은 난민들 사이에서 딸의 뒷모습을 본 것 같다고 말했다. 노후한 적재함 안쪽으로 헐벗은 난민들과 암소나 노새 같은 가축들이 더불어 바글거렸소. 석회 분진에 오염된 자줏빛 벙거지를 쓴 여자가 카메라를 등진 채 털이 민둥한 작은 원숭이에게 노란 참외를 먹이고 있었소. 저 나라에도 참외는 노랗구나. 나는 생각했다오. 이내 기사 할아버지는 그 사람이 딸이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무사했던 것처럼 그 사람과 닮은 자신이 딸이 무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p.79

 

시각적으로는 평범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사변적이며 지극히 주관적이기도 한 문장들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평범한 의식에서 무언가를 사유하게 되는 것이 정상의 상태이며 우리에게 안도감을 주는 계기이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처럼 의식과 무의식이 착종하여 위치가 뒤바뀔 때는, 사유를 한다는 것은 긴장의 끊김이다. 그것은 잠에서 깨어나기 전 내던져 저 무한한 하강을 시작하는 순간의 그것과도 다르지 않다.

 


죽어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

죽어서 싱그러운 바람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이고요?



누군가에 의해 깨어났지만 그 깨어남조차 의심되기 시작했다. 꿈인지 현실의 상태인지 모를 세계에서 받은 죽음이란 질문은 어떤 의미인 것인가. 그가 얻은 깨달음이란 말을 찾기 위한, 활주로로 가기 위한 그 여행이 결국엔 제자리, 곧 삶이 시작되기 이전의 죽음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혹시 죽음만이 우리를 자기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은 아닌가. 여행 내내 등장했던 뱀의 존재도 죽음의 다른 모습이며 인간 내면에 공존하는 다양한 시간 체험을 통해 '영원한 죽음'을 꿈꾸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별의 시간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릇 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만들 때에는 작품 속에 얼마나 심오한 사상을 담을 것인가가 중심 과제이지만 작가의 사상을 보다 잘 표현하기 위한 그릇으로서의 형식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작가는 문학적 전통을 완전히 파괴하는 경우에도 실은 그가 문학적 전통을 숙지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새로운 사상을 파격적으로 새롭게 묘사하기 위해 문학적 전통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그녀의 글들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그러하다. 기존의 문학과는 전혀 다른, 예측할 수 없는 전개, 상투적이고 공허한 요소들, 이러한 요소들은 작가로 하여금 자신의 인물들의 의식이 사회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들이 비인간적 사고 및 감각에 얽매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에 대해 쓰는 작가인 나만이 그녀를 사랑한다.

나는 그녀 때문에 고뇌한다.


그녀의 마지막 작품<별의 시간>에서는 자신을 숨긴 채 한 사람의 남자 내레이터로서 등장한다. 그는 리스펙토르 또 다른 자신이며, 이 소설을 쓴 작가이면서 마카베아이기도 하다. 그녀는 원인도 알 수 없는 그러한 사건 진행을 혐오하지만 철저히 거기에 관여하지 않는다. 이것은 연극에서의 중개자의 위치와도 닮아 있다.

브라질 북동부 지방 알라고아 출신의 너무나도 어리석고, 순수한 주인공 마카베아. 허황된 거짓말쟁이에, 독단적이고, 정형화되고 유형적인 상투어들을 말하는 올림피쿠와의 강력한 대비는 소설을 읽는 내내 눈을 사로잡았다. 닮아있는 것 같지만 상반된 인물들의 대비를 통해 극적 효과를 도출해 냈다. 그녀는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을 형상화하는 경우는 대게 자신의 전체적이고도 개별적인 방식들, 모순적 성향들, 그리고 개인적인 인상들을 포함하여 실제적인 것을 폭넓게 재현하려는 욕구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여자 주인공 마카베아가 태어난 알라고아는 리스펙토르 가족이 브라질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배경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자전적인 성격은 리스펙토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큰 특징 중 하나이다.



난 세상에서 혼자이고 난 아무도 믿지 않아요.

모두가 거짓말을 해요, 때론 사랑을 나눌 때조차도 그러죠,

난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진실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진실은 꼭 내가 혼자일 때만 찾아오는 거예요.



리스펙토르의 작품 전반에서 등장하는 여성들을 이해하려면 당시 브라질 사회의 역사와 그녀의 전기를 어느 정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20년 12월 10일, 영하 20도에 이르는 혹한과 끔찍한 질병, 잔인한 학살을 피해 달아나는 난민 가족의 매독에 걸린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난 리스펙토르. 그녀는 여성으로서, 작가로 경제적 독립을 이루기 어려웠는데 당시 브라질은 보수적인 남성 중심의 사회였으며 리스펙토르가 글을 쓰기 위해 외교관인 남편과 헤어져 브라질로 돌아왔을 당시에는 이혼이 합법도 아니었다. 만성적인 불안과 불면에 시달리다 수면제 복용 후 불붙은 담배를 손에 쥔 채로 커튼이 쳐진 창가에서 잠이 들었고 불붙은 담배로 인한 화재로 전신에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그녀의 드라마틱한 인생은 허황된 희망을 품은 체 죽음을 맏이 하던 마카베아의 인생 그 자체이며 당시 남성 우월주의의 부조리한 사회를 비판하는 모든 여성들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마침내 자신으로부터, 우리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두려워 말라, 죽음은 순간이며,

그러니 순간 속에서 지나가는 것이다.


<별의 시간>에 등장하는 소시민적 인물들이 개인적 본질을 지닐 수 없기 때문에 진정한 언어적 본질을 지닐 수 없으며, 그래서 그 인물들은 진정한 소통 능력을 상실한 채 고독하고 격리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음을 노정시킨다. 그녀의 모든 작품들이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아무것도 미화하거나 과장하여 만들지 않았다. 전통적인 것을 거부하고 그녀만의 문학으로의 완성을 꿈꾸며 기존의 문학을 파괴하고, 우상을 무시하며, 기존 질서를 파괴하려는 리스펙토르의 몸부림은 아름답고 따뜻하고 가슴 뭉클한 문학과는 거리가 먼 작품으로 귀결되었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계속 읽어 나가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신비하며 고귀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그녀의 위대함을 아는 모든 이들을 대표해 <야생의 심장 가까이>의 빅뱅과 함께 탄생한 그녀의 문학적 우주가 언어의 벽을 넘어 독자들과 함께 계속 팽창해가기를 소망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아름다운 날들
정지아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해방 후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남북전쟁에서 북에 가담된 아버지로 인해 입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나가던 그녀는 이번 작품에서도 소멸할 듯 아파하는 상처 받은 사람들이 시간이라는 덧없음 위에 서 있었다. 인간은 시간에 비해 짧은 세월을 산다. 그렇게 짧은 시간을 지나치는 것은 사람이지만 시간의 자국을 새기는 것은 지나간 추억이다. 추억의 흔적은 우리가 살아온 삶의 흔적이고 삶에서 얻어진 상처를 바라보는 것은 시간에 기대어 있는 슬픔들이다. 누군가의 추억과 마주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생각과 흔적을 밟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의 나의 추억을 얹히는 것이다. 책을 펼치자 정지아 작가의 가슴 깊은 어딘가에 새겨져 있던 그리운 존재들, 사무치는 존재들, 좀 더 소중했어야 했던 존재들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숲의 대화'에서는 자신의 아이를 가진 순심을 자신의 종의 자식으로 태어난 운학에게 보내고 빨치산의 행렬에 가담하다 매복에 걸려 혁재는 죽음을 맞아했고, 혁재의 아이를 임신한 순심을 아내로 맞이한 운학은 평생 아내만 바라보며 살아왔으나 그녀의 마음은 언제나 혁재에게 향해 있었다. 젊었을 때 모습 그대로의 혁재의 영혼과 늙은 은학의 대화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서로의 '신념'을 이해하게 되고, 한국 전쟁을 남의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으로 인정할 때 이 전쟁의 비극은 진실로 극복될 수 있다는 믿음이 느껴졌다.


'천국의 열쇠'에서는 장애를 가진 주인공이 한국으로 시집온 옆집에 사는 베트남 여인 호아를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숨겨주게 된다.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몸으로 일구어낸 3000평의 헛개나무 과수원에서 현실의 고통에서 잠시나마 안식을 찾을 수 있었던 호아를 바라보며 헛개나무 과수원을 둘러싸 있는 철조망 문의 열쇠를 건네줌으로써 남편에게 구타당하면서도 아기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 돌아가야 하는 현실에서의 도피처, 즉 안식을 위한 공간의 공유로 타인의 아픔을 감싸주고 있었다.


'브라보, 럭키 라이프'에서는 23년간 식물인간 상태로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아들을 정성을 다해 돌보지만 경제적으로 사정이 좋지 않은 큰아들의 돕기에는 이미 재산은 바닥이 난 상태다. 자신의 생활마저 여유롭지 않은 상황에서도 식물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 아들을 포기할 수 없는 부모의 사랑은 어쩌면 미련하다고 말할 정도로 애처롭게 다가왔다. 큰아들은 소리 내어 원망하며 뛰쳐나가고 식물인간 상태에서 조금씩 호전을 보이던 아들이 자신의 처지를 괴로워하며 버둥거리자 그런 버둥거림마저 기적이 일어났다며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끼는 아버지라는 존재에 가슴이 매여왔다.

멀리 산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보지 못한 것이 가슴이 걸린다. 무슨 날에 보내드리는 액수가 세월만큼 많아진들 그게 어디 얼굴 내밀며 찾아뵙는 것에 비할까? 자식과 부모의 거리는 아무도 잴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작품이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히 흐르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시간을 살고 있으며 그 시간이 비록 상처와 비루함으로 점철된 것이라 할지라도 살아감이란 바로 그것들을 긍정하고 따뜻이 감싸 안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상처받아 아파하고 절망밖에 없는 삶이라도 그럼에도 자신의 상처와 마주함으로써 그 상처를 치유해 내는 모습은 자신의 상처보다 더 큰 사랑과 생명력으로 껴안아 극복하려는 정지아 작가의 모습 그대로이다. 평범한 듯 보이지만 아픔을 지닌 이들이 상처받은 현실과 능동적으로 화해하려는 작가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탄생된 이 소설들은 문학의 영원한 주제일 '구원'을 형상화한 한국문학 역사 속에서 빼어난 소설로 자리매김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법정의 얼굴들
박주영 지음 / 모로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류 역사의 흔적들을 살펴보면 무시할 수 없는 특색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류는 공동생활을 위해 필요한 룰을 만들면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특히 근대 이후의 인류 생활을 들여다보면 이 점은 더욱 명확해진다. 비록 국가 단위의 제한적인 경험이기는 하였으나, 인류는 역사의 각 단계마다 고난 극복을 위한 새로운 룰을 헌법에 새기면서 발전해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법이란 국민의 생활 문제와 직결된다. 생활이 공간적으로 확대되면서 사회가 되는 것이고, 시간적으로 확대되면서 역사가 된다.



나는 판단자임과 동시에 관찰하고 기록하는 자다.

내가 기록하지 않으면 내가 본 세상의 일부가 사라진다.



법이라는 규정 아래 누군가의 판단으로 중재를 하며, 옳고 그름을 정하는 일은 우리가 태어나가 훨씬 이전부터 정해져 내려온 일이다. 그 안에서 새로운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헌법적 대응으로 공공의 안녕과 질서유지에 힘쓰는 사람들. 그중 법이라는 규정과 함께 관찰하고 기록하는 판단자인 판사라는 직업의 무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인간으로서의 연민과, 공정한 판사로서의 정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괴로워해야 하는 판사라는 직업의 무게를. 더 나은 세상으로의 한 발자국을 위해 그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으로 사회의 질서는 유지되어 왔다.

박주영 판사는 판단자로서의 공정함을 유지한 채 법의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안타까운 사연들과 구원되고, 처벌받아야 할 사건들을 실체를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며 진실에 다가가고 있다.

책에서는 태어난 지 이틀 만에 부모에게 버림받아 평생을 보육원에서 자라다 홀로서기를 준비하던 고등학생의 자살, 사랑받아야 할 부모에게 구타당해 생명을 잃은 아이, 돈이 없어 일부러 불을 질러 교도소에 들어가려는 노인 등 가슴 아픈 사연들이 등장한다. 아버지의 입장이라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지만 아이를 살해하는 부모의 범죄행위는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사람마다, 개인마다 틀린 가치관을 가지고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도, 고군분투하는 목적도, 따지고 보면 모두 아이를 낳고 키우는 데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는 자식이 언제나 축복으로만 인식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이 세상의 가장 기본적인 갈등인 부모와 자식 사이의 갈등은 부모가 노력과 사랑을 어떻게 배분하는가와 관계가 있다. 자식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랑과 부모가 만족하는 사랑은 항상 다르기 때문이다.

살인은 인간이 저지르는 범죄 가운데 가장 극악무도하고 책임이 무거운 범죄다. 그런데 실제로도 그렇게 취급되고 있을까? 우리 사회에는 처벌받지 않는 살인자들도 있으며, 사람을 죽이고 비난조차 받지 않는 이들도 있다. 심지어 어떤 살인은 박수와 환호를 받기도 한다. 사회에는 살인을 정당화하는 이유는 다양하고, 정상참작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유책성, 즉 어떤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죄가 있는가'는 비난받을 만한가, 응분의 벌을 받아야 하는가를 따지는 도덕적 쟁점이다. 죄가 있는 사람은 자신이 잘못한 행위를 대가로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어떤 사회에서든 상식적인 성인이라면 모두가 이러한 평범한 도덕을 이해하고 지킨다. 처벌의 도덕적 정당성을 둘러싼 다양한 입장들을 종합하고, 분석해 올바른 판결을 실천하는 것은 이 책을 써 내려간 박주영 판사의 일생의 바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재판이란 지나가버린 사건에 대해 증거를 통하여 그러한 사실이 존재하였음을 추론하고 법리를 적용하여 결과를 내놓는 과정이다. 지나간 과거의 일을 적합한 증거를 찾아서 진실을 밝히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과정에서 법 해석의 유연성을 갖고 자유와 평등, 인권이라는 법의 본질에서 공정한 판단을 해나가는 일이야말로 법관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다. 박주영 판사의 이상대로 사법권이 가진 모든 이들이 법이 전부라는 생각을 갖지 않고, 사회문제와 사회의 여망을 이해하며, 사법은 권력이 아니라 봉사임을 깨닫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줄 아는 법관을 이상으로 꿈꾸며 홀로 외로이 싸우는 개인을 방치하지 않는, 단 한 명도 희생시키지 않는 법관으로의 삶을 이어나가길 희망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
오혜선 지음 / 더미라클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윤순례 작가의 <여름 손님>,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 등 디아스포라 작품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나 역시 갈 곳을 잃은 채 배회하는 존재들을 그린 <여름 손님>을 읽고 적지 않은 감정의 변화를 겪으며 인간의 존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세계화가 진전되고 인구 이동이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국민국가의 문턱이 차츰 낮아져 결국 소멸하리라는 관측이 회자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섣부른 낙관론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날 점점 많은 사람들이 디아스포라가 되어 세계를 유랑하고 있지만, 국민국가의 장벽은 여전히 견고하다. 근대 국민국가의 틀로부터 내던져진 디아스포라야말로 근대 이후 가장 비참한 인류에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계를 배회하는 그들이 그들 편에 선 인류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 앞으로 얼마나 더 곤란한 길을 거처야 만 할 것인가.



권력은 그 힘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안전하지 않았다




<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는 북한의 어두운 면을 섬세하게 보여주었다. 만성 식량난에 시달리며 북한의 주민들과 그들의 인권 유린, 한순간에 사라지는 덧없는 신기루 같은 북한의 권력도 북한에서의 참혹한 삶을 여실히 표현하고 있었고 김일성 일가의 충신이었던 아버지의 그늘 아래에서도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으며 살아가야 할 현실은 그야말로 참담했다.

평양으로부터 어수선한 내부 소식도 연속 들려왔다. 하룻밤 자고 나면

어느 시에서 몇 천 명이 굶어 죽었다.

너무 배가 고팠던 엄마가 순간에 정신이 혼미해져 어린 아들을 잡아먹었다.

애들이 사라졌다가 피를 다 뽑히고 나타났다는 등

온갖 믿기 어려운 소문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불안한 삶의 한줄기 희망이었던 차분하고 책임감 강한 남편의 만남과 아들 주혁이의 탄생은 그녀를 일으키는 한 가닥 밝은 빛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신장병을 가지고 태어난 주혁이로 인해 어려운 삶을 이어나간다. 천운이었는지 남편의 덴마크 대사관 발령으로 아들 주혁이와의 외국 생활로 주혁이의 병은 호전되기 시작하고 둘째 금혁이의 건강한 탄생은 하늘에서 내려준 커다란 축복이었다. 그들의 꿈이었던 영국 외교관 생활의 기회가 찾아오고 영국에서의 의료복지정책으로 주혁의 신장병은 완치하게 된다. 주혁이를 살리려는 저자의 모성애가 글 곳곳에서 느껴지며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글에서 느껴지는 어머니는 누구에게나 부동의 위치를 차지하는 너무 큰 존재이다. 반만년 역사를 통하여 한국의 어머니들이 수행해 온 역할은 결코 아버지들의 그것에 못지않았다. 부계사회의 그늘 밑에서, 그것도 북한이라는 특수한 국가 아래에서 인내를 미덕으로 강요당하는 이중고, 삼중고의 악조건을 디디고 버텨온 큰 역할이기 때문에 어머니라는 존재는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 자식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해 나가며 여자로서의 자신의 욕망을 철저히 억누르면서 자신의 전 생애를 불살라 스스로 밑거름이 되고자 한 마르지 않는 샘처럼 풍성한 생명력과 어떤 역경 속에서도 지켜나가겠다는 믿음은 사실상 온갖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가족이라는 연을 연면히 이어 나온 힘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강요에 의한 출연이라고 생각하지만 북한에 있는 저자의 어머니가 TV에서 그녀를 원망하며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총으로 쏴 죽였을 거라는 대목이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인권이 존재하지 않는 북한에서의 삶을 과연 '그리운 조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그들에게 '조국'은 향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국'이란 국경에 둘러싸인 영역이 아니다. 혈통과 문화의 연속성이라는 관념으로 굳어버린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지배와 인종 차별을 강요하는 모든 부조리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곳을 의미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