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시간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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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만들 때에는 작품 속에 얼마나 심오한 사상을 담을 것인가가 중심 과제이지만 작가의 사상을 보다 잘 표현하기 위한 그릇으로서의 형식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작가는 문학적 전통을 완전히 파괴하는 경우에도 실은 그가 문학적 전통을 숙지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새로운 사상을 파격적으로 새롭게 묘사하기 위해 문학적 전통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그녀의 글들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그러하다. 기존의 문학과는 전혀 다른, 예측할 수 없는 전개, 상투적이고 공허한 요소들, 이러한 요소들은 작가로 하여금 자신의 인물들의 의식이 사회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들이 비인간적 사고 및 감각에 얽매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에 대해 쓰는 작가인 나만이 그녀를 사랑한다.

나는 그녀 때문에 고뇌한다.


그녀의 마지막 작품<별의 시간>에서는 자신을 숨긴 채 한 사람의 남자 내레이터로서 등장한다. 그는 리스펙토르 또 다른 자신이며, 이 소설을 쓴 작가이면서 마카베아이기도 하다. 그녀는 원인도 알 수 없는 그러한 사건 진행을 혐오하지만 철저히 거기에 관여하지 않는다. 이것은 연극에서의 중개자의 위치와도 닮아 있다.

브라질 북동부 지방 알라고아 출신의 너무나도 어리석고, 순수한 주인공 마카베아. 허황된 거짓말쟁이에, 독단적이고, 정형화되고 유형적인 상투어들을 말하는 올림피쿠와의 강력한 대비는 소설을 읽는 내내 눈을 사로잡았다. 닮아있는 것 같지만 상반된 인물들의 대비를 통해 극적 효과를 도출해 냈다. 그녀는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을 형상화하는 경우는 대게 자신의 전체적이고도 개별적인 방식들, 모순적 성향들, 그리고 개인적인 인상들을 포함하여 실제적인 것을 폭넓게 재현하려는 욕구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여자 주인공 마카베아가 태어난 알라고아는 리스펙토르 가족이 브라질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배경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자전적인 성격은 리스펙토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큰 특징 중 하나이다.



난 세상에서 혼자이고 난 아무도 믿지 않아요.

모두가 거짓말을 해요, 때론 사랑을 나눌 때조차도 그러죠,

난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진실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진실은 꼭 내가 혼자일 때만 찾아오는 거예요.



리스펙토르의 작품 전반에서 등장하는 여성들을 이해하려면 당시 브라질 사회의 역사와 그녀의 전기를 어느 정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20년 12월 10일, 영하 20도에 이르는 혹한과 끔찍한 질병, 잔인한 학살을 피해 달아나는 난민 가족의 매독에 걸린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난 리스펙토르. 그녀는 여성으로서, 작가로 경제적 독립을 이루기 어려웠는데 당시 브라질은 보수적인 남성 중심의 사회였으며 리스펙토르가 글을 쓰기 위해 외교관인 남편과 헤어져 브라질로 돌아왔을 당시에는 이혼이 합법도 아니었다. 만성적인 불안과 불면에 시달리다 수면제 복용 후 불붙은 담배를 손에 쥔 채로 커튼이 쳐진 창가에서 잠이 들었고 불붙은 담배로 인한 화재로 전신에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그녀의 드라마틱한 인생은 허황된 희망을 품은 체 죽음을 맏이 하던 마카베아의 인생 그 자체이며 당시 남성 우월주의의 부조리한 사회를 비판하는 모든 여성들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마침내 자신으로부터, 우리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두려워 말라, 죽음은 순간이며,

그러니 순간 속에서 지나가는 것이다.


<별의 시간>에 등장하는 소시민적 인물들이 개인적 본질을 지닐 수 없기 때문에 진정한 언어적 본질을 지닐 수 없으며, 그래서 그 인물들은 진정한 소통 능력을 상실한 채 고독하고 격리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음을 노정시킨다. 그녀의 모든 작품들이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아무것도 미화하거나 과장하여 만들지 않았다. 전통적인 것을 거부하고 그녀만의 문학으로의 완성을 꿈꾸며 기존의 문학을 파괴하고, 우상을 무시하며, 기존 질서를 파괴하려는 리스펙토르의 몸부림은 아름답고 따뜻하고 가슴 뭉클한 문학과는 거리가 먼 작품으로 귀결되었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계속 읽어 나가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신비하며 고귀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그녀의 위대함을 아는 모든 이들을 대표해 <야생의 심장 가까이>의 빅뱅과 함께 탄생한 그녀의 문학적 우주가 언어의 벽을 넘어 독자들과 함께 계속 팽창해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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