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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날들
정지아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2월
평점 :
해방 후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남북전쟁에서 북에 가담된 아버지로 인해 입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나가던 그녀는 이번 작품에서도 소멸할 듯 아파하는 상처 받은 사람들이 시간이라는 덧없음 위에 서 있었다. 인간은 시간에 비해 짧은 세월을 산다. 그렇게 짧은 시간을 지나치는 것은 사람이지만 시간의 자국을 새기는 것은 지나간 추억이다. 추억의 흔적은 우리가 살아온 삶의 흔적이고 삶에서 얻어진 상처를 바라보는 것은 시간에 기대어 있는 슬픔들이다. 누군가의 추억과 마주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생각과 흔적을 밟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의 나의 추억을 얹히는 것이다. 책을 펼치자 정지아 작가의 가슴 깊은 어딘가에 새겨져 있던 그리운 존재들, 사무치는 존재들, 좀 더 소중했어야 했던 존재들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숲의 대화'에서는 자신의 아이를 가진 순심을 자신의 종의 자식으로 태어난 운학에게 보내고 빨치산의 행렬에 가담하다 매복에 걸려 혁재는 죽음을 맞아했고, 혁재의 아이를 임신한 순심을 아내로 맞이한 운학은 평생 아내만 바라보며 살아왔으나 그녀의 마음은 언제나 혁재에게 향해 있었다. 젊었을 때 모습 그대로의 혁재의 영혼과 늙은 은학의 대화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서로의 '신념'을 이해하게 되고, 한국 전쟁을 남의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으로 인정할 때 이 전쟁의 비극은 진실로 극복될 수 있다는 믿음이 느껴졌다.
'천국의 열쇠'에서는 장애를 가진 주인공이 한국으로 시집온 옆집에 사는 베트남 여인 호아를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숨겨주게 된다.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몸으로 일구어낸 3000평의 헛개나무 과수원에서 현실의 고통에서 잠시나마 안식을 찾을 수 있었던 호아를 바라보며 헛개나무 과수원을 둘러싸 있는 철조망 문의 열쇠를 건네줌으로써 남편에게 구타당하면서도 아기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 돌아가야 하는 현실에서의 도피처, 즉 안식을 위한 공간의 공유로 타인의 아픔을 감싸주고 있었다.
'브라보, 럭키 라이프'에서는 23년간 식물인간 상태로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아들을 정성을 다해 돌보지만 경제적으로 사정이 좋지 않은 큰아들의 돕기에는 이미 재산은 바닥이 난 상태다. 자신의 생활마저 여유롭지 않은 상황에서도 식물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 아들을 포기할 수 없는 부모의 사랑은 어쩌면 미련하다고 말할 정도로 애처롭게 다가왔다. 큰아들은 소리 내어 원망하며 뛰쳐나가고 식물인간 상태에서 조금씩 호전을 보이던 아들이 자신의 처지를 괴로워하며 버둥거리자 그런 버둥거림마저 기적이 일어났다며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끼는 아버지라는 존재에 가슴이 매여왔다.
멀리 산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보지 못한 것이 가슴이 걸린다. 무슨 날에 보내드리는 액수가 세월만큼 많아진들 그게 어디 얼굴 내밀며 찾아뵙는 것에 비할까? 자식과 부모의 거리는 아무도 잴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작품이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히 흐르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시간을 살고 있으며 그 시간이 비록 상처와 비루함으로 점철된 것이라 할지라도 살아감이란 바로 그것들을 긍정하고 따뜻이 감싸 안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상처받아 아파하고 절망밖에 없는 삶이라도 그럼에도 자신의 상처와 마주함으로써 그 상처를 치유해 내는 모습은 자신의 상처보다 더 큰 사랑과 생명력으로 껴안아 극복하려는 정지아 작가의 모습 그대로이다. 평범한 듯 보이지만 아픔을 지닌 이들이 상처받은 현실과 능동적으로 화해하려는 작가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탄생된 이 소설들은 문학의 영원한 주제일 '구원'을 형상화한 한국문학 역사 속에서 빼어난 소설로 자리매김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