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꿈 트리플 16
양선형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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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면서 없는 대상만큼 낯설고 기이한 것은 없다. 평범하게 존재하고 있지만 말이 안 되는 사건의 흐름이 우리에게 친숙하다는 것은, 의식으로 의식의 세계를 볼 때 또는 무의식으로 무의식에 대응할 때의 느낌일 뿐이다. 그의 세계에서 가장 낯익은 것들이 그것을 뒤집어 놓은 시선에서 포착되는, 자기 자신마저에 대해서까지 느끼는 낯설음. 무의식 혹은 잠재된 의식으로 바라볼 때 친숙해 온 모든 것들이 이질감, 이물감, 낯설음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을 확인한다.

 

그는 여전히 실종된 말을 찾을 수 있다는 관념이 무척이나

황당하게 여겨진다는 사실과 싸우는 중이었다.

 

꿈에서 만난 말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써 내려간 이 작품은 활주로에서 도주한 말을 찾는다는 목표로 떠나는 도중 신비롭고 이상한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오로지 주관이 경험한 바에 따라서만 때로는 극사실적으로, 때로는 초현실적이라는 관형어로는 충분치 않을 만큼 꿈결같은 이 작품은 종잡을 수 없는 진행과, 현실과 꿈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오가며 이완 없는 긴장 상태를 오래 유지해야 하는 피로가 독서 과정 내내 나를 괴롭혔다.

 

<말과 꿈>을 느끼면서 느꼈던 양선형 작가의 정밀한 묘사는 하성란 작가의 마이크로 묘사를 떠올리게 했다. 모든 사물의 동작과 내면의 움직임이 세밀하게 포착된 관찰자의 시선은 그의 상상에서, 자신의 의식세계 안에서 주관적으로 기록한다. 그러나 여기서 묘사된 모습과 행위 자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흔하게 해 보고 타인의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매우 상투적이고 친숙한 것들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전혀 낯선 장면을 본듯하고 거기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몇 해가 흐르고 그 나라에 큰 지진이 있었소. 지반이 침하해 도로가 갈라지고 가옥들이 붕괴했소. 대피하지 못한 사상자들이 속출했소. 가족과 집을 잃은 난민들이 거리로 나앉았고, 도시는 와해된 판자와 어마어마한 규모로 내려앉은 돌무더기 사이에서 어수선한 폐허가 되어 있었소. 나는 매일이 절박한 심정이었소. 대사관에 전화해 뒤늦게 오열하며 딸의 소식을 물었다.

"나는 딸의 안부를 규명할 수 없었소. 나는 뉴스를 보았지. 황톳빛 얼굴로 미간을 찌푸린 어린아이의 굶주림, 현장에서 시신을 운구하는 어깨가 가냘픈 승려들, 바닥에 모포를 깔고 김이 나는 양철통 주위에 둘러앉아 수프를 끊이는 낯선 사람들을 보았소. 딸이 살고 있는 나라의 사람들이었소. 그들에게 분배된 비탄과 절망이 내가 기억하는 딸의 얼굴에 환영처럼 드리워졌다오. 그래도 나는 딸이 재해에 휩쓸렸으리라는 가능성은 상상하지 않았소. 그것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언제든 딸이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오. 나는 구호 작업을 벌이는 사람들과 황폐한 거리에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퍼더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보았소. 나는 나를 안심시킬 긍휼한 착각을 갈망했다오. 그들 사이에서 혹여 딸을 닮은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거나 희박한 확률임을 예감하고 있었소. 애통한 수심과 계속되는 여진으로 인한 공포와 불면이 켜켜이 퇴적된 그들의 얼굴을 녹화된 비디오의 일시정지 화면 속에서 일일이 헤아리며 뚫어져라 바라보았소. 나는 그렇게 딸의 실마리를 찾아다녔소. 그들은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딸이 그곳에서 짓고 있을 어떤 표정의 그림자를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오. 이내 기사 할아버지는 트럭 적재함에 쪼그려 앉은 난민들 사이에서 딸의 뒷모습을 본 것 같다고 말했다. 노후한 적재함 안쪽으로 헐벗은 난민들과 암소나 노새 같은 가축들이 더불어 바글거렸소. 석회 분진에 오염된 자줏빛 벙거지를 쓴 여자가 카메라를 등진 채 털이 민둥한 작은 원숭이에게 노란 참외를 먹이고 있었소. 저 나라에도 참외는 노랗구나. 나는 생각했다오. 이내 기사 할아버지는 그 사람이 딸이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무사했던 것처럼 그 사람과 닮은 자신이 딸이 무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p.79

 

시각적으로는 평범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사변적이며 지극히 주관적이기도 한 문장들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평범한 의식에서 무언가를 사유하게 되는 것이 정상의 상태이며 우리에게 안도감을 주는 계기이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처럼 의식과 무의식이 착종하여 위치가 뒤바뀔 때는, 사유를 한다는 것은 긴장의 끊김이다. 그것은 잠에서 깨어나기 전 내던져 저 무한한 하강을 시작하는 순간의 그것과도 다르지 않다.

 


죽어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

죽어서 싱그러운 바람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이고요?



누군가에 의해 깨어났지만 그 깨어남조차 의심되기 시작했다. 꿈인지 현실의 상태인지 모를 세계에서 받은 죽음이란 질문은 어떤 의미인 것인가. 그가 얻은 깨달음이란 말을 찾기 위한, 활주로로 가기 위한 그 여행이 결국엔 제자리, 곧 삶이 시작되기 이전의 죽음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혹시 죽음만이 우리를 자기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은 아닌가. 여행 내내 등장했던 뱀의 존재도 죽음의 다른 모습이며 인간 내면에 공존하는 다양한 시간 체험을 통해 '영원한 죽음'을 꿈꾸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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