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
오혜선 지음 / 더미라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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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윤순례 작가의 <여름 손님>,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 등 디아스포라 작품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나 역시 갈 곳을 잃은 채 배회하는 존재들을 그린 <여름 손님>을 읽고 적지 않은 감정의 변화를 겪으며 인간의 존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세계화가 진전되고 인구 이동이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국민국가의 문턱이 차츰 낮아져 결국 소멸하리라는 관측이 회자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섣부른 낙관론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날 점점 많은 사람들이 디아스포라가 되어 세계를 유랑하고 있지만, 국민국가의 장벽은 여전히 견고하다. 근대 국민국가의 틀로부터 내던져진 디아스포라야말로 근대 이후 가장 비참한 인류에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계를 배회하는 그들이 그들 편에 선 인류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 앞으로 얼마나 더 곤란한 길을 거처야 만 할 것인가.



권력은 그 힘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안전하지 않았다




<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는 북한의 어두운 면을 섬세하게 보여주었다. 만성 식량난에 시달리며 북한의 주민들과 그들의 인권 유린, 한순간에 사라지는 덧없는 신기루 같은 북한의 권력도 북한에서의 참혹한 삶을 여실히 표현하고 있었고 김일성 일가의 충신이었던 아버지의 그늘 아래에서도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으며 살아가야 할 현실은 그야말로 참담했다.

평양으로부터 어수선한 내부 소식도 연속 들려왔다. 하룻밤 자고 나면

어느 시에서 몇 천 명이 굶어 죽었다.

너무 배가 고팠던 엄마가 순간에 정신이 혼미해져 어린 아들을 잡아먹었다.

애들이 사라졌다가 피를 다 뽑히고 나타났다는 등

온갖 믿기 어려운 소문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불안한 삶의 한줄기 희망이었던 차분하고 책임감 강한 남편의 만남과 아들 주혁이의 탄생은 그녀를 일으키는 한 가닥 밝은 빛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신장병을 가지고 태어난 주혁이로 인해 어려운 삶을 이어나간다. 천운이었는지 남편의 덴마크 대사관 발령으로 아들 주혁이와의 외국 생활로 주혁이의 병은 호전되기 시작하고 둘째 금혁이의 건강한 탄생은 하늘에서 내려준 커다란 축복이었다. 그들의 꿈이었던 영국 외교관 생활의 기회가 찾아오고 영국에서의 의료복지정책으로 주혁의 신장병은 완치하게 된다. 주혁이를 살리려는 저자의 모성애가 글 곳곳에서 느껴지며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글에서 느껴지는 어머니는 누구에게나 부동의 위치를 차지하는 너무 큰 존재이다. 반만년 역사를 통하여 한국의 어머니들이 수행해 온 역할은 결코 아버지들의 그것에 못지않았다. 부계사회의 그늘 밑에서, 그것도 북한이라는 특수한 국가 아래에서 인내를 미덕으로 강요당하는 이중고, 삼중고의 악조건을 디디고 버텨온 큰 역할이기 때문에 어머니라는 존재는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 자식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해 나가며 여자로서의 자신의 욕망을 철저히 억누르면서 자신의 전 생애를 불살라 스스로 밑거름이 되고자 한 마르지 않는 샘처럼 풍성한 생명력과 어떤 역경 속에서도 지켜나가겠다는 믿음은 사실상 온갖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가족이라는 연을 연면히 이어 나온 힘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강요에 의한 출연이라고 생각하지만 북한에 있는 저자의 어머니가 TV에서 그녀를 원망하며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총으로 쏴 죽였을 거라는 대목이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인권이 존재하지 않는 북한에서의 삶을 과연 '그리운 조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그들에게 '조국'은 향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국'이란 국경에 둘러싸인 영역이 아니다. 혈통과 문화의 연속성이라는 관념으로 굳어버린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지배와 인종 차별을 강요하는 모든 부조리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곳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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