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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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선풍기를 고정시켜 놓고 황석영의 신작 <바리데기>(창비, 2007)를 읽었다. 문단과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것처럼 놀랍다거나 흥미진진하다거나 새롭다는 느낌이 그다지 들지 않았다는 것이 첫 느낌이다. 확실히 <바리데기>는 '거장의 역작'이라 불리기엔 뭔가 부족한 듯하다. 기법상의 측면에서 보자면 <손님>에서 지노귀굿의 형식을 차용한 것보다 덜 효과적이다. <바리데기>는 무속 신앙을 중심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서사무가 '바리데기' 혹은 '바리공주'의 구조를 따왔다고는 하나 이것이 실험적인 측면에서 얼마나 각광받을 만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생긴다.

주인공 바리가 영혼을 보고 대화할 줄도 알며, 다른 사람의 몸에 손을 갖다 대기만 해도 그의 과거 일들을 낱낱이 알게 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설정은 그를 둘러싼 인물들과의 관계를 평범하게, 심하게 말하자면 단조롭고 지루하게 만들어 버렸다. 때문에 바리가 겪게 되는 고난은 인물들 사이의 갈등에 의해서라기보단 외적 환경, 그 사회 내부에 있음으로써 불가항력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데서 비롯된다. 북한에서의 가뭄과 산불, 탈북, 중국에서 영국으로 밀입국하게 된 계기, 영국에서 얻은 남편 알리와의 헤어짐 등등의 큰 사건들 속에서 바리는 보호자를 필요로 하는 어린 계집아이일 뿐이고 따라서 자연스레 수동적인 인물이 된다. 외부의 변화하는 환경에 대해 직접 맞설 수 없는 바리는 영험한 능력과 꿈속 이야기를 통해 자기 나름의 어떤 길을 따라 갈 뿐이다. 이는 소설의 긴장과 갈등을 한풀 꺾어 버리는 역할을 '톡톡이' 해낸다.

그 영험함이란 우리 삶에서도 때론 독이 된다. 20살도 안 된 여자 아이가 자기보다 훨씬 나이도 많고 우직한 나무처럼 보이는 남자의 청혼을 받고도 세상 만사 다 아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얼마나 까칠할까? 남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 그들과 교감하는 데 도움은 될지언정 치고박고 울고웃으며 쌓이는 감정따윈 기대할 수 없다. 극적인 전개도 없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휘말려 '흘러갈' 뿐이다. 바리는, 그래서 꿈속에서만 험난한 바다를 건너고 무서운 군졸들과 맞대면한다. 현실에서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과거며 현재를 다 알고 있는데 갈등 겪을 일이 뭐가 있느냔 말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바리가 찾으려는(찾아야 하는) '생명수'란 무엇인가에 초점이 모아진다. 내가 이해한 생명의 물은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분쟁, 전쟁과 학살, 기아와 환경 파괴 등의 원인인 인간의 분노와 이기심, 미워하는 마음 등을 해소시켜줄 무엇, 바로 화해와 용서이다.

   
  말 좀 해봐, 우리가 받은 고통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는 왜 여기 있는지.
누구 말을 빌려서 하는지 나는 저절로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변하며 공수가 터진다.
사람들의 욕망 때문이래. 남보다 더 좋은 것 먹고 입고 쓰고 살려고 우리를 괴롭혔지. 그래서 너희 배에 함께 타고 계시는 신께서도 고통스러워하신대. 이제 저들을 용서하면 그이를 돕는 일이 되겠구나.(282쪽)
 
   

그런데 바리가 생명의 물을 찾는 험난한 과정은 딸아이를 잃고 앓아 누운 며칠 간의 꿈속에서만 나타난 것으로 서술될 뿐이다. 바리의 험난한 삶이 세계의 부조리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해결의 방법이 고작 한갓진 꿈속에서 외치는 용서와 화해라면 너무 허탈하지 않은가. 언제부터 황석영이 이런 범우주적인 세계관을 갖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내겐 마치 저기 여의도에서 놀고먹는 치들이나 내세우는 '화합'처럼 들려왔으니 말이다.

기대에 훨씬 못 미쳤지만 초반부의 몰입도는 명불허전이란 말을 실감케 했다. 이래도 되나, 란 심정이 되어가면서 작품을 읽어가는 속도가 줄긴 했지만 북쪽 사투리를 사용하는 인물들의 생생한 묘사나 상황을 설정하는 디테일의 힘은 여전했다. 어쨌거나 소설만큼이나 허탈한 주말을 보내며, 몇 시간만 자면 다시 출근을 해야 하는 나도 대책없이 흘러가는 저 시계 초침을 '용서'해보록 노력해봐야겠다.

(용서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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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08-27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카로운 지적이시네요 보통은 "황석영"이라는 이름과 출판사의 대대적인 선전에 압도되어 '좋은책이려니'하게 되는데..저도 그랬구요 ^^;; 잘 읽었습니다 ^^

도서관 2007-08-27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반부의 엄청난 몰입을 끌어내는 힘에 동감, 저도 후반부에서 허탈함을 느꼈답니다...
 
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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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라서 그런가?'

마당에 아직 몽울져 있는 백목련을 내다보면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차마 발음 내뱉을 수 없는 울컥함에 기어이 쓰디쓴 눈물 몇 방울 책장 위로 떨어뜨린다. 절기상으론, 이미 깊은 봄인 것이다. 나는 저렇게 떨고 있는 목련을 바라보면서도 마음 가득 환한 봄볕을 느낀다. 아무렴, 깊은 봄 밤 노란 스탠드 하나 켜진 내 책상 위엔 제비 한마리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윤대녕의 새 소설집이 나올 무렵, 나는 미국의 사진작가 커티스가 찍은 호피 인디언 사진을 구해다 늘 볼 수 있도록 컴퓨터의 바탕화면에 깔아놨다. 이 사진은 무너질 듯한 건물 옥상에서 기이한 머리 모양과 복장을 하고 있는 세 명의 호피 인디언들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듯한 먼 곳 어딘가를 응시하는 뒷모습을 찍은 것이다. 본래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구해다 놓은 사진은 흑백이다. 옅은 갈색톤이 전체에 깔려 있는. 그들의 뒷모습은 위태롭다. 당장이라도 무너져버릴 것 같이 위태롭게만 보이는 허름한 건물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이 그렇게 그리웠는지 거기서 그대로 굳어버릴 것처럼 서 있는 그들의 모습 때문이기도 하다.

이 사진을 보면서 나는 빌리 할리데이의 음반을 걸었다. 아임 어 풀 투 원트 유... 그녀가 살아 있었더라면 정말 꼬장꼬장하고 고집 센 할머니가 돼 있을 거다. 이런 쓸데없는 말들을 늘어놓는 이유는 그 즈음 내가 자정 무렵만 되면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을 베껴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씩 그런 식으로 나를 달래곤 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까닭없는 그리움과 우울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경쾌함이 아니라 더 깊은 우울이라는 것을. 이럴 땐 그 누구의 위로도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런 나날들이 조금 더 지나고서 나는 겨우 윤대녕의 새 소설집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아랫목에 숨겨둔 군밤을 한 알씩 까먹듯이 매일 밤 딱 한 편씩만 읽기로 했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는 데는 8일이 걸렸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 지구에서 나 혼자만 깨어 있다고 느꼈던 그 시간에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한 편 한 편을 읽어나갔다. 가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 읽고 난 다음 사방을 둘러보면, "어찌된 일인지 어두운 방안에는 나 혼자뿐이었다."(95쪽)

이전까지의 윤대녕 소설들이 자기만의 고독을 어찌할 줄 몰라 상처주고 상처받는 이들의 단면을 이미지화했다면, 이 책에 등장하는 이들은 타인의 삶에 간여하면서 한 발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서려고 한다. 그가 더 이상 다가오기를 멈춘다면 "나머지는 내가 걸어서"(200쪽) 가면 되는 것이다. 이제 그 치열하던 고독과 그리움도 윤대녕에 의해 한없이 따사로운 위로를 받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는 윤대녕의 소설을 읽고 났을 때 허허로운 감정에 사로잡혀 지낼 때가 많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이번 소설집을 읽고 남 몰래 흘린 눈물이 많아서였을까. 지금 이 계절이 봄이기 때문일는지도 모르지만.

삶이 지속 되는 동안 어떤 그리움은, 고독은 어느새 자연스레 자기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것을 거부하려 했든, 전적으로 수긍하려 했든 간에 말이다. 일찍 끝장내버리리라고 다짐했던 내 생이 스물다섯해 이후로도 근근히 이어져오고 있는 것을 보면 삶이란 것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 쉽지 않은 시간을 버티며 윤대녕도 여기까지 기어이 오고야 말았다. 영원의 나라에서 돌아온 제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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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첸 2007-03-22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껴안고 보듬어 주며 살아가는 삶이 기쁘게 다가오는 이 봄에 딱 맞는 글.
좋은 느낌글 읽고 갑니다.
 
프랑스적인 삶 - 제100회 페미나 문학상 수상작
장폴 뒤부아 지음, 함유선 옮김 / 밝은세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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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이 처음 나를 끌어당겼던 매력은 단지 '프랑스적'이라 할 때의 '적'이란 표현 때문이었다. 나는 어렴풋이 몇몇 나라들의 '-적'인 풍경을 동경해왔었고 그러한 삶이란 과연 어떤 풍경들을 담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래서 처음 이 책을 집어들기 전까지(그리고 차례를 볼 때까지도) 나는 이것이 소설이란 장르에 속하는 책인지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이 책이 '프랑스적'인 삶이란 퐁네프 다리에서 키스를 할 수 있는 연애라든가, 독신자 예술가들의 지독히도 외롭고 낭만적인 우울과 열정으로 가득한 것이라고 말해주는, 일종의 깃털 같은 에세이여야만 한다고 미리 확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은 내 기대를 완벽하게 저버린 한 편의 장편소설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쩌면 우스울지도 모르겠다. <프랑스적인 삶>은 폴 블릭이라는 사람과 그를 둘러싼 가족들에 관한 한 편의 이야기다. 그것도 블릭의 유년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아주 긴 시간 동안의 이야기다. 형의 죽음, 성에 눈 뜸, 몇 번의 연애, 결혼, 외도, 자녀의 탄생, 성공, 부모의 죽음. 한 인간(또는 거의 모든 인간)이 겪는 삶의 모든 사건과 감정이 녹아들어 있다.

프랑스의 정치가들이 어떠한 평가를 받아왔으며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얽혀 있는지 잘 몰랐지만 블릭과 그의 가족들의 생각들로부터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처음 끌렸던 '프랑스적'이란 표현보다는 그저 '삶'이란 말이 이 소설에 더 어울린단 생각이 든다.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주인공의 어머니인 클레르 블릭의 마지막 나날과 어머니의 죽음 뒤에 느끼는 여러 감상들은 나의 가슴을 적시기에 충분했다. 어머니라는 한 존재의 죽음에 이르러 블릭과 나의 머릿속에는 앞에서 읽어온, 그리고 그가 겪어온 삶의 파편들이 한순간에 하나의 커다란 화폭에 그려진 그림으로 끼워맞춰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다시 산산조각나버린다.

'프랑스적'인 삶이라고 해서 그 밖의 다른 존재들의 '삶'과 다를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건 단지 내가 가지고 있는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블릭이 지나간 삶에 대해 후회하거나 뭔갈 되돌리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지 않는 것은 '프랑스적'이라기보단 그 자신의 성향인 탓이 큰 것 같다. 블릭은 단지 그때마다 주어진 자신의 삶과 자기를 둘러싼 '가족'이란 존재들 사이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해야 할 일을 찾아낼 뿐이다. 이걸 쿨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열정적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작가는 그 어떤 냉정함도, 그 어떤 열정도 없으며 흘러가는 것은 다만 삶이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연애와 은밀한 비밀들, 그리고 천천히 사그라드는 존재를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가장 가슴 아프게 읽었던 부분을 몇 자 옮긴다.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클레르 블릭과 폴이 함께 있던 장면이다.

"이걸 이해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 와서도 내가 늙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거나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거의 팔도, 다리도, 심장도, 폐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모든 것을 발견하고 인생을 향해 바쁘게 달려가는 열여덟 살의 나를 본단다. 이처럼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서 죽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네 형과 아버지, 안나는 너무나 일찍 떠났다."
그때 무엇인가가 어머니 눈 앞으로 지나갔다. 어떤 그림자가, 어떤 생각이, 어떤 고통의 가는 선들이. 그리고 어머니의 얼굴이 변했다. 어머니는 나를 향해서 몸을 돌리더니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나는 무섭단다. 알겠니? 너무나 무서워."(363~364)

그리고 이 소설의 마지막,

내 딸을 두 팔로 안았다. 죽은 나무를 얼싸안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기 앞을 똑바로 응시했다. 우리는 세상 꼭대기에서 겨우 균형을 잡고 허무의 끝에 서 있었다.
내 가족 모두를 생각했다. 그 의혹의 순간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나와 함께 있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에, 그들은 나에게 어떤 도움이나 위안도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놀라지도 않았다. 인생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묶어놓고서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존재의 시간에,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기보다는 차라리 단지 그 무엇이라는 것을 믿게 하는 보일 듯 말 듯한 가는 줄에 지나지 않으니까.(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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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픽션
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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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서의 소설을 읽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경로가 있었다.

가끔씩 들르는 어느 작가의 홈페이지가 있는데 어느날인가 게시판에 "<현대문학> 9월호에 박형서의 소설이 실렸는데 근래에 읽어본 소설 중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소설"이라는 글이 올라와 있었다. 그 소설은 이 단편집 안에도 실려 있는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달걀을 중심으로>란 소설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난 한겨레에 실린 <'개콘'보다 웃기는 소설>이란 제목의 기사를 보았다. 관심은 증폭되고 기대는 가을하늘 끝까지 가 닿았다. 그런데 <현대문학>9월호는 그때 이미 품절 상태였다(때는 9월 말에서 10월 초였는데...). 헌책방에 갈 시간을 내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정말 읽고 싶어서,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어서 안절부절 못했다) 그 단편이 함께 묶인 소설집이 나왔단다. 아무튼 그랬다. 소설은 충격적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나는 박형서가 누군지 몰랐다. 그래서 이 소설집을 읽고 나선 알았냐고? 모르겠다. 그런데 '개콘'보다 웃기는 소설을 쓴 사람인 건 분명해졌다. 나는 출퇴근하는 길에 이 책을 읽었는데 이 리뷰를 만약에라도 누군가 읽게 된다면 왠만해선 공중장소에선 읽지 않기를 권하고 싶다. 나는 이 책을 읽다가 '너무너무 웃겨서'('너무' 한 번으론 부족하니 한번 더 쓰겠다) 하마터면 지하철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그건 너무 힘든 상황이었다. 크게 웃고 싶은데 주변의 눈초리를 의식하느라 그러질 못하고 참다 보니 나중엔 눈물이 찔끔찔끔 흘러나왔다. 힘들었다. 웃음을 참는 것도 큰 고통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직도 가끔씩 멍하니 차 안에 있을 때 그놈의 "가금류의 뇌를 가진" 데다 "흑사병 수준"의 문장을 구사하는 비평가의 이미지나 "붕산칼슘처럼 생긴 문학평론가"(<'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 "오리랑 오리너구리도 구분 못" 하는 당직 장교가 당황해서 하는 말 - "인디언이라면..." .... "시베리아 북동부의 초원 지대에 오순도순 화목하게 살다가 갑작스런 기후의 변화로 삶의 터전인 초원 지대가 황폐해지자 지금으로부터 약 삼만 년 전에 북미대륙으로 이동하여 안데스 산맥을 중심으로 머리에 깃털을 꽂고 야호야호 신나게 사냥과 수렵을 하던 몽골로이드 계통의 그 아메리카 인디언이란 말씀입니까?" - 이나 뒤통수를 겨냥하고 있는 권총에 잔뜩 쫄아선 "백 미터 앞에서 우회전입니다."(<두유전쟁>) 하고 운전병같이 말하는 새신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곤 한다.

읽고 또 읽어보고 떠올리고 또 떠올릴수록 '그놈 진짜 골때리네'란 생각이 쉽게 가시질 않는다. 꼴에 이 소설집을 다 읽고 나선 작가의 의도나 알레고리를 짚어내려고도 했는데 그것조차도 무의미한 짓인 듯싶다. 그렇게 하기엔 내가 출퇴근길의 지하철과 만원버스 안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참아냈던 눈물들이 너무 아깝단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웃기다. 그냥 웃긴 게 아니라 "골때리게" 웃긴다. 그런데 동생에게 부모의 관심과 사랑이 모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기 자신을 투신하는 아이(<물속의 아이>)의 사악하고 비열한 표정이 내 얼굴에도 투영되는 듯한 이 느낌은 도대체 무얼까. 그게 좀 궁금하긴 하다. 이기호의 "순덕 씨"가 주었던 안타까운 웃음과도 또다른 무엇이 박형서에겐 존재한다. 아무튼 그렇다는 얘기다.

(+) 초판 143페이지 아래 달려 있는 '각주 10번'이 잘려나간 듯한데 이걸 어째야 하나? 149페이지 맨 위 한줄이 떨어져 있는 건 그렇다 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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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26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위트'가 있는 소설인가 봅니다.


daytripper 2006-12-11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 작가 홈페이지에서 소개글을 보셨나보네요..^^
땡스투 누르고 갑니다..
 
어머니의 수저 - 윤대녕 맛 산문집
윤대녕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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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끼고 퇴근했을 때 나의 어머니는 지독한 감기로 밥 한술 제대로 못 떠드시고 자리에 누워 계셨다. 어머니는 누우신 채로, 들어온 나를 향해 감기가 다 나으면 김치라도 몇 포기 담가 먹자고 하셨다. 방으로 들어와 가방만 내려놓고 남은 몇 페이지를 마저 읽었다. "나는 이렇듯 매양 속절없이 살아왔답니다, 어머니." 그의 사무치는 고백을 조용히 소리 내어 세번 쯤 읽고 책장을 덮었다. 안방에서 간헐적으로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뒤 어머니는 그 전의 몸상태를 어느 정도 회복하셨고 어느 날인가 퇴근을 해보니 식탁 위에는 정말로 갓김치와 깍두기가 올라와 있었다. 어머니는 감기에서 다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간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며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때 나는 다시금 책을 떠올렸다. <어머니의 수저>.

이따금 어떤 기대는 적잖은 실망이나 안타까움으로 다가오곤 한다. 그건 일상에서 자주, 잘 일어나므로 그닥 새삼스러운 깨달음은 아니다. 윤대녕의 '맛' 산문집의 처음 어떤 부분들은 내가 가졌던 기대와는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뭔가 기대한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 산문집이 '음식'이 아닌 '맛'에 관한 것이니만큼 정보보다는 이야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음식이나 맛이나 뭐가 그리 다를 게 있겠냐마는 아무래도 시시콜콜하고 식상해 보이기까지 하는 '음식기행'류가 아닌 한 그 정도 기대는 해도 되지 않을까. 게다가 이 책이 어머니 앞에 차려드리는 소박한 밥상이라면 굳이 각각의 음식들이 가지고 있는 유래나 역사를 늘어놓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런 약간의 불만스러움을 가지고 읽는데 문득 윤대녕의 다른 글에서 묘사되었던 정갈하고도 맛깔스럽던 음식들의 이야기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내가 기억해낸 것은 <열두 명의 연인과 그 옆 사람>에서 '스물세 개의 계단으로 오는 가을' 편에 등장했던 된장찌개 먹는 장면, 그리고 단편 <은항아리 안에서>에 등장했던 여인이 찌개를 끓이던 장면 등이었다. 그러고 보니 윤대녕의 이야기에는 음식과 연애가 서로 뒤엉켜 있는 연인의 관능적인 이미지처럼 자주 등장했던 것 같다. 이 책에서도 당연히 연애에 관한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갈치빛에 반한 처녀와 처녀의 깨금발에 반한 총각의 이야기는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어떤 이가 차려주던 밥상의 맛을 기억하는 것은 그 언젠가 나를 스치고 지나갔던 여인을 그리워함이고, 추운 겨울 뜨끈한 온돌마루에 당신과 함께 마주앉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쌀밥을 뜨는 것은 나의 속절없던 시절에 대한 여인의 푸근한 위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밥을 함께 먹자는 말은 곧 나와 연애합시다,란 말과 동의어일지도 모른다는... 그럼 윤대녕이 어머니에게 내미는 밥상은? 이 땅의 모든 아들에게 영원한 여인은 어머니라고만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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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20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대녕씨는 해남에 몇번 온적이 있지요.
그의 친구가 해남에 산답니다.
그의 친구는 저의 후배..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