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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연금술 - 바슐라르에 관한 깊고 느린 몽상
이지훈 지음 / 창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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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게는 기쁨과 눈물을 흘리도록 감동을 주는 한 그루의 나무가 다른 사람의 눈에는 공연히 쓸데없이 갈 길을 방해하는 하나의 푸른 물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 그러나 상상력이 있는 인간에게 자연은 상상력 그 자체입니다.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근대 과학이 낳은 합리성과 객관성은 인간의 사고를 보다 이성적으로 형성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지만 그 반대편에 자리 잡고 있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은 점차 도외시되기 시작했다. 그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란 사물의 본질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객관적이지 않은 직관, 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 상상력이다. 이들과 관계된 예술이란 부분은 결국 인간의 삶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고 근대 사회가 만들어 놓은 토양 위에서 멸시의 대상으로 규정되었다. 그리하여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는 일종의 기술로서 치부되었고 심지어는 일부 귀족들에 의해 향유되는 모조품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근대 사회가 가진 특성에 정면 도전이라도 하듯 저자는 책의 부제를 “바슐라르에 관한 ‘깊고’ ‘느린’ 몽상”이라 지었다. 그것이 설사 기획된 의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바슐라르가 말하는 예술과 연금술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로서 다가오고 있는지에 대한 답은 어쩌면 이미 나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구 비학(秘學)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연금술이 비금속성의 물질로부터 귀금속인 금을 얻어내는 과학적 시도였다는 것은 누구나 흔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은 연금술을 실패한 과학으로만 보지 않고 오히려 성공한 시학(詩學)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엠페도클레스(Empedocles)가 만든 ‘사물의 네 뿌리’라는 개념을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의 시학과 더불어 (제목 그대로)깊고 느리게 이야기하고 있다. ‘사물의 네 뿌리’는 바로 물, 불, 공기, 흙 네 원소를 지칭하는데, 이들은 자연을 구성하는 동시에 인간의 삶에 항상 관여하고 있으며 상호 작용을 통해 신적(神的) 직관에 다를 수 있게 한다. 이와 더불어 바슐라르가 말한 네 원소의 상상력은 곧 예술의 상상력과 일치하며 이들은 자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연금술의 핵심 관념 중 하나인 ‘대립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ion)’는 이들 네 원소의 동시 발생과 공존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대립의 일치는 단순히 동일성이나 통일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이들은 본래가 일자(一者: to hen)로부터 발생했으며 결국엔 다시 회귀, 상승의 운동을 거쳐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비주의적 언어관이나 연금술의 언어는 역설적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립의 일치-대극의 합일은 물, 불, 공기(바람), 흙(대지)의 상호 작용과 그들만의 독특한 성격, 그리고 그들의 상상력을 살펴봄으로써 가능하게 될 것이다. 자연과 교감하여 이루어지는 상상력이야말로 오래도록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달랠 만한 생명력이 있다는 말은 예술의 상상력이 가야 하는 방향을 지시해준다. 그것은 울림, 즉 자연과 교감함으로써 얻어내는 공명(公明)이다. 바슐라르는 상상력의 알맹이가 “이미지의 형성이 아니라 변형(deformation)에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여기서 변형은 연금술에서 말하는 사물의 본래 속성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몸을 얻는 것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버리는 일을 뜻한다. 그리하여 질료적 상상력은 내적 자기 갱신을 통해 육화(肉化)한다.

샘물을 바라보는 일(narcissism)-명상적 관조-을 통해 우주적 자기애를 획득하는 물의 상상력, 화산으로 뛰어든 엠페도클레스를 통해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얻게 됨을 말하는 불의 상상력, 상승과 하강의 대립이 일치하는 상승 벡터에 대해 말하고 있는 공기의 상상력, 밝은 빛(흰 그늘)과 어울려 음예(陰翳)의 무늬를 만드는 어둠으로써의 대지의 상상력. 바슐라르가 말하는 네 원소의 상상력은 저마다 대립의 일치를 꿈꾸고 있으며 존재의 밖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려는 연금술의 노력을 보여준다.

책에서는 바슐라르의 네 원소의 꿈과 관련된 이야기만을 시론(試論)으로 다루고 있지만 남겨진 문제는 보다 광대하다. 왜냐하면 저자도 말하고 있듯이 후대에 바슐라르에게 가해진 비판이 사회성의 결여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이 삶과 연관되는 길은 편협한 일원론과 양자택일의 틀을 벗어나는 것, 그리고 네 원소의 상상력이 보여준 것처럼 자연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근대 사회의 불안과 건조함은 대립항에 놓인 것들의 불균형으로부터 기인한다. 현실적으로 양립이 불가능해진 것에 공생의 기회를 주는 것이야말로 앞으로 우리가 세워나갈 문화의 지표가 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사물이 가진 형상적 의미뿐만 아니라 질료적 의미까지 통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무의미 속에서 참된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 세계 창조의 과정을 수없이 많은 상징의 언어들로 보여준 연금술 속에 그 과정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예술을 통해 우리 앞에 하나씩 나타날 것이다.

"예술은 가장 개성적인 방식으로 자기 매듭을 짓는다는 뜻에서 최고의 자기 실현이며, 온 자연의 끈을 가장 독특한 방식으로 자기 속에 끌어들인다는 뜻에서 최고의 통합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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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이섭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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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를 잘라낸 나무는 뿌리 근처에서 다시 새로운 싹이 움터 나온다. 이처럼 왕성한 시기에 병들어 상처입은 영혼 또한 꿈으로 가득 찬 봄날 같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마치 거기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어 끊어진 생명의 끈을 다시금 이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뿌리에서 움튼 새싹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나지만,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생명에 불과할 뿐, 결코 다시 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본문에서..)

한 총명한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마을 사람들의 총애를 한몸에 다 받으면서 그 뛰어난 능력으로 마울브론 수도원의 초급 신학교에 당당히-그러나 자신으로서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을 법한-2등으로 입학하게 된다. 이제 이곳에서 충실하게 학식을 쌓아 나가기만 한다면 평생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경애를 받으며 돈 걱정 따위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자신이 초급 신학교에 2등으로 합격했다는 기사가 나있는 마을 소식지를 주머니에 꽂아 넣고 한가하게 낚시를 다닐 때만 해도 이 아이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고 순수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인간은 때때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또는 기대했던 어떤 것들의 예상치 않은 빗나감으로 인해 남은 삶에 대한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리기도 한다. 그 잃어버린 삶은 누구에게서도 보상받을 수 없다.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인연은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자신을 떠나버리고 진실한 사랑이라 믿었던 순간의 달콤함은 결국엔 한갓 나른한 오후의 짧은 꿈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아이, 한스 기벤라트는 헤르만 하일너라는 범상치 않은 인간을 통해 변화와 시련의 과정을 밟아가기 시작한다. 세상의 온갖 부조리한 일상과 자유롭게 날아오르고자 하는 깨끗한 영혼의 날개짓을 방해하는 낡아빠지고 냄새나는 시선들을 하일너라는 아이와의 관계를 통해 느끼고 동시에 상처받는다. 그 충격은 도대체 얼마나 가공할 만한 것인지. 이럴 때면 어린 시절 깨끗한 창문 너머로 보이던 파란 강물과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인 마을의 목사와 구둣방 아저씨 플레이크의 인자한 웃음이 떠오른다. 그 모든 것은 그대로이지만 자꾸만 넋이 나간 사람처럼 행동하며 신경쇠약 증세에 빠져버리게 되는 자신의 모습에서 더없는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한스는 결국 지나친 신경쇠약으로 어렵게,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입학한 신학교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어린 영혼이 받은 상처를 그 누가 치료해줄 수 있을까.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대장장이 견습공이 되겠다던 결심은 상처받은 영혼의 자기 치유를 위한 첫걸음이었을까. 그것이 과연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기 위한 방법이었는지. 

마지막 7장까지 다 읽고 나면 이 어린 아이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결코 치유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건 정말이지 우울하기 짝이 없는 결말이다. 그가 기어이 일으켜내려고 했던 삶에의 의지와 진정한 자아 찾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헤세의 소설은 이런 식이다. 그러나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이 우리의 삶에서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절망감을 안겨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뿌리의 근처에서 다시 자라난 새싹은-비록 나무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마치 잘려지기 이전의 나무를 굳건히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삶 속에 내정되어 있는 지켜야만 하는 약속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헤세의 소설을 세 편 이상 읽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사귈 필요도 없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난다. 자아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타인에 대한 존엄성, 생명의 고귀함, 그 사이에서 움터 나오는 삶의 숨 가쁜 절정. 헤세의 소설을 읽고 나면 항상 그런 느낌을 받는다. 내가 고귀하고 총명한 영혼을 가진 완벽한 삶을 다시 한 번 산 것만 같은 그런 느낌. 그 안에는 예술가의 타고난 본성과 생애 첫 키스의 후덥지근한 느낌과 서로의 이빨이 부딪히는 소리가 스며 있다. 

한스는 자아가 강한 아이였다. 자아가 강하다는 얘기는 그가 더 이상은 어떠한 관계로든지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 상처받기 두려워한다는 뜻이리라. 그것은 곧 잘려나간 나무로의 회귀, 일상적 삶과의 불협화음, 어떤 방법을 써도 활짝 열리지 않는 마음과 시작부터 예감하는 실패에 대한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결국 스스로를 깊이 감추고자 하는 연약한 자아의 소유자만이 강인하고자 하는 자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수레바퀴와도 같은 세상의 힘겨운 시선을 등에 짊어진 채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안에 존재하는 이상과 그 바깥에 존재하는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고 상처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는 삶의 본질이며 인간이 생을 다 바쳐 극복해야 할 무게다. 그런 점에서 헤세는 절망보다는 절망의 극복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나에겐 아직도 한스의 절망에 가득 찬 흥얼거림이 귀에 선하게 들려온다.

"아, 나는 피곤합니다.
아, 나는 지쳤습니다.
지갑에는 돈 한 푼 없고,
주머니에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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