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박석무 엮음 / 창비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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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난 여름 휴가 때 나는 "남도 답사 일번지"라 불리우는 전남 강진과 해남 땅을 돌아다녔다. 혼자 떠났던 답사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며 유독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풍경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다산이 유배되었을 때 머무르던 '다산초당'이었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옛길'을 따라 쉬엄쉬엄 올라가다 보면 가파른 비탈길은 어느덧 울창한 나무들에 둘러싸여 음습해진다. 서늘한 기운을 느끼면서 약 20여 분을 오르면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어둠침침한 다산의 유배지, 다산초당이 시야에 들어온다. 막판의 가파른 경사를 오르느라 숨이 턱 아래까지 차올라 있어도 다산초당이 시야로 들어오면 턱 하고 숨이 막혀 버린다.

유배된 사람이 머물렀던 집이라 하기엔 너무나 잘 지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아무튼 나는 땀도 식힐 겸 넓다란 다산초당의 툇마루에 걸터 앉았다.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실제 조그만 초당이 있었으나 무너지는 바람에 폐가가 된 것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지어놓은 것이라 한다. 그 뜻은 대견하나 이루어 놓은 방법이 사려깊지 못했구나, 란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반대로 옛 모습 그대로 번듯하지도 않고 지푸라기 몇 단을 엮어 얹은 지붕 그대로를 복원해 놓았다 해도 가슴이 아프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의미는 다르지만. 참고로 정다산이 묘사한 다산초당의 본래 모습은 이러했다 한다.(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에서 발췌)

무진년(1808) 봄에 다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축대를 쌓고 연못을 파기도 하고 꽃나무를 벌여 심고 물을 끌어다 폭포를 만들기도 했다. 동서로 두 암(庵)을 마련하고 장서 천여 권을 쌓아두고 저서로서 스스로 즐겼다. 다산은 만덕사의 서쪽에 위치한 곳인데 처사 윤단의 산정(山亭)이다. 석벽에 '정석(丁石)' 두 자를 새겼다.

아무튼 그 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오래도록 읽어야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을 뿐 손에 잡아보지 못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내가 툇마루에 앉아서 눈을 감았을 때 귓불을 훔치고 지나간 서늘한 기운은 비단 위에서 불어내려오는 바람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다산의 유배지에 올라 툇마루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을 때 내가 언뜻 들었던 것은 "천여 권의 장서"가 서로 부스럭거리는 소리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예상치 못한 다산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기년아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산은 <기년아람>이 기대했던 수준에 못 미침을 말하고 이어서 그 책의 잘못된 부분을 예를 들어 설명한다. 그런데 편지의 말미에 다산은 다른 말로 끝을 맺는다.

"<탐진악부>(다산이 유배되어 있는 동안 강진의 민요 등을 채집해 한시로 옮겨 놓은 시집의 이름)를 네가 이토록 칭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칭찬하는 법이 아니다."(46쪽)

글쎄 나는 편지의 이 마지막 두 줄에서 다산의 따뜻한 마음씨를 다 봐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웃고 또 웃었다. 내가 보기에 이 대목은 자신의 책을 칭찬한 아들 앞에서 좋아하는 마음을 차마 다 표현하지는 못하는-그렇다고 아주 감추지도 못하는-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순수한 인간다움과 열정이 다산을 유배지의 고독한 생활 속에서 버티게 만들어주었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한 대목은 다산이 둘째 아들 학유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술 마시는 법도에 대하여 설명할 때다.

"나는 아직까지 술을 많이 마신 적이 없고 나의 주량을 알지 못한다. 벼슬하기 전에 중희당(重熙堂)에서 세번 일등을 했던 덕택으로 소주를 옥필통(玉筆筒)에 가득 따라서 하사하시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다 마시면서 혼잣말로 "나는 오늘 죽었구나"라고 했는데 그렇게 심하게 취하지 않고 또 춘당대(春塘臺)에서 임금을 모시고 공부하던 중 맛난 술을 큰 사발로 하나씩 하사받았는데 그때 여러 학사(學士)들이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정신을 잃고 혹 남쪽을 향해 절을 하고 더러는 자리에 누워 뒹굴고 하였지만 나는 내가 읽을 책을 다 읽어 내 차례를 마칠 때까지 조금도 착오 없게 하였다. 다만 퇴근하였을 때 조금 취기가 있었을 뿐이다."(93쪽)

아마도 학연과 학유 두 아들은 다산의 이 편지를 읽고 술 마시는 법도도 법도겠지만 아버지의 주담(酒談)에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그러니까 다산이 자신의 주량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잘 마신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던 셈이다. 물론 잘 마시는 사람도 법도를 지키며 마시는 것이 올바른 자세라는 것이 편지의 요지이지만, 내 얼굴엔 왜 또 그 따스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는지...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다산이 홀로 외로이 살던 남도의 강진땅을 다시 찾아가고 싶어졌다. 올 여름에 그랬던 것처럼 초당의 툇마루에 기대 앉아 눈을 지긋이 감고 있으면 그때는 다산의 웃음소리도 바람에 묻혀 들려오겠지,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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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15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땅끝 해남에 산답니다.
다산의 외가가 해남윤씨댁이니 다산과 해남의 인연이 각별하지요.
휼륭한 서평 잘 감상했습니다.

 
풍경 외 - 2006년 제7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정지아 외 지음 / 해토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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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무슨무슨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우리 문학의 행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좌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매년 매시기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우수' 단편들은 언젠가부터 내게 그다지 큰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걸 내 줄어든 독서량으로 탓한다면 별로 할 말이 없지만, 어쨌거나 여기에 실린 작품이 저기에 가서 또 실리고 거기에 실렸던 작품이 나중에는 다시 작가 한 명의 단편집에 실리고 하는 등의 모양새가 그닥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솔직한 심정으로 그건 "나무에게 죄를 짓는 일이야"라고까지 되뇌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이 수상 작품집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정지아'라는 이름 하나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번 역시 출간이 되자마자 리스트에 올려뒀다가 한참이 지난 뒤에야 구입했다.) 수상작인 "풍경"은 이미 현대문학상 수상작품집에도 실린 바 있는데, 이제야 이 소설을 읽은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단 내 검색 실력이 뛰어나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는 듯싶다.

아무래도 내가 그동안 정지아를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그의 단편집 <행복> 때문이 아닌가 한다. "경쾌한", "발랄한", "기존의 서사적 문법을 뒤집는" 등의 수식어가 난무하는 요즘 소설들 사이에서 정지아의 <행복>은 오랜만에 만난 수작이었다. 그의 문장은 짧고 경쾌해서 단숨에 읽히는 것도 아니고, 뭔가 특이한 형식상의 기교를 부려서 새롭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는 단지 자기 자신 안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자연스런 문장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대신 거기에는 우리 가족들에게도 있을 법한 일들이 존재하고 그 관계들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을 법한 고민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정지아의 소설에서는 톡 쏘는 나프탈렌 냄새가 아니라 따뜻한 인간의 냄새가 난다. 이를테면 '강된장'이나 '묵은 김치' 같은...

<풍경>도 그렇다. 백석 식으로 말하자면 정지아가 풀어놓는 이야기들은 어느샌가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하는 것이다. 거기에 귀기울여 보면, 평생을 어머니 곁에서 살아온 한 남자가 있고 그 자신도 이제는 늙어가는 중이다. 시작이 어디였는지 알 수조차 없는 외로움은 낯모르는 아낙이 깨끗이 빨아놓고 간 이불에서 맡아지는 냄새마저도 피하게 만든다. 겨우내 강된장과 묵은 김치만으로 밥술을 뜨시는 어머니는 평생을 함께한 막내가 아니라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린 두 형들만을 기억 속에 남겨두고 있다. 벙어리로 불리던 하우댁이 그렇게 말 많은 아낙으로 바뀔 만큼 세상은 변해가는데 두 모자만이 아직 영원의 저 너머에 존재하는 기억 속에 머무르고 있다.

꽤나 적막한 풍경이지만 <풍경>은 그 옛날 멍석 위에서 콩을 패던 어머니와 어린 그의 모습을 비춰주며 "영원처럼 느리게 그러나 쏜살같이 빠르게" 지나간 그네들의 삶을, 그리고 우리네 삶의 풍경을 그려낸다. 나는 소설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을 읽고 난 그날 밤, 창밖에 스친 빗방울이 서글프고도 정겹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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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생각의나무 우리소설 10
윤대녕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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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윤대녕이 어디로 가든 나는 아무 말 않기로 했다. 지난 수년 간 그가 보여준 글쓰기의 행보와는 관련 없이 이번 신작을 읽고 난 뒤의 간략한 느낌이다. 그러나 분명히 이건 무책임한 삿대질, 혹은 비난을 위한 비난이 아님을 밝히고 싶다. 호랑이가 바다로 갔다고? 바다로 간 것은 정작 그 자신이었음을...

내 느낌은 늘 그랬다. 윤대녕 소설이 가장 찬란하게 빛을 발하던 때는 「은항아리 안에서」나 「상춘곡」이 실려 있는 단편집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가 나왔을 즈음이었다. 윤대녕의 (단편)소설이 정점에 도달한 그때. 그때는 그의 한 문장 한 문장이 가슴을 치며 지나갔고 나는 가끔씩 어둔 불빛에 의지해 그의 소설을 필사해 나가기도 했을 것이다. 뿐인가, 술에 취한 날이면 나는 그의 소설 속 등장인물처럼 초점 없는 발걸음으로 거리를 깊은 물 속을 헤엄치듯 휘저어 나가기도 했다. 윤대녕은 아팠고, 아름다웠고, 나는 한없이 멍청이가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우연으로부터 시작된 만남이 순간 필연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그 시작을 알 수 없던 존재의 잃어버린 시원. 그 상류를 찾아 올라가는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같은 주제가 수없이 다양한 빛의 스펙트럼처럼 변주되고 있다 해도 나는 그것이 도무지 싫지가 않았다. 그러나 윤대녕의 소설을 두고 누군가가 맨날 똑같은 얘기만 하는 것도 이젠 지겹다고 말했을 때, 무심코 동의를 해 버린 것은 당시의 나 자신도 까닭 모를 우울과 고독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거기서부터 나는 의도적으로 그의 작품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다. 자기 존재에의 함몰과 필연으로의 귀결을 상정해 둔 지리멸렬한 자기 연민. 그의 소설에서 유독 몇몇 이미지만이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어쩌면 정설처럼 인정(해석)되고 있는 그의 詩적인 문장 때문만이 아니라 주인공의 넘치는 자의식과 세계에 대한 독단적 시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비껴 생각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그들 자신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세계로부터 일정 정도 간격을 둔 채 살아가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 남기 위한 방법이란 끊임없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뿐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 모든 것들이 아파 보였고 애써 그들을 외면하려 했다.

아침 저녁으로 지하철에서 시달리면서도 나는 이 소설을 힘겹게 읽어내려갔다. 소설 한 편을 다 읽는 데 일주일이라는 긴 시간이 소비된 것은 덜컹거리는 지하철의 소음과 참기 힘든 피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소설은 늘 그래왔듯 힘겨웠다. 단숨에 해치울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닌 것이다. 윤대녕의 이번 신작 장편이 출간되기 전까지 나는 그의 새 소설이 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어왔었다. 이를테면 시간성과 관련이 있는, 그러니까 시대를 외면하지 않는 글쓰기에 다가가려 했다는 등의 어찌보면 시시콜콜한 입소문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내가 읽은 것은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윤대녕은 이전보다 더 깊이 자기 안으로 침잠하려 하고 있었으며 내 자신에게 화가 날 정도로 깊은 고독은 배려 없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가령 이런 풍경이었다. 나는 출근길의 지하철 안에서 영빈과 해연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힘겹게 읽어내려간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나는 내려야 할 역에서 읽던 페이지에 손가락 하나를 끼워 넣은 채 책을 들고 내린다. 계단을 올라 바깥으로 나왔는데 하늘이 불현 곧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잔뜩 표정을 구기고 있다. 나는 예상치 못한 거대한 우울에 사로잡힌다. 바람은 불고 나는 이제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한다. 내 감정을 이따위로 만들어 놓은 그가 원망스럽다. 몇 걸음을 걷다 나는 우연히 한 젊은 문학 평론가를 만나 횡단보도 앞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잠시 얘기를 나눈다. "도대체가 윤대녕은 변한 게 없더군요. 왜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고독에 몸부림치는지 모르겠어요. 계단을 지나 밖으로 나왔을 때 갑자기 우울해져서 숨막혀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정말 그랬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너무 화가 났다. 영빈은 왜 그토록 고독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걸 숨기려 하지 않는가. 고독한 존재는 타인에게 상처만 줄 뿐이다. 나는 영빈에게 비꼬듯 말해주고 싶었다. "왜? 그렇게도 고독하다면 누군가에게 가서 차라리 널 죽여달라고 그러지 그래?" 그러나 그건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아니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그렇게 쏘아 붙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말이었다. 그토록 애써 외면하고 싶었는데, 얼마나 피해 다녔는데... 영빈은, 아니 윤대녕은(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윤대녕의 모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유독 허구가 아니라 작가 그 자신인 듯 느껴진다) 그걸 대놓고 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누가 감히 그렇게 "대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사랑을 멈춘 지 이미 오랩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저지르고 싶지도 않고요. 더 이상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131쪽)

나는 벌거벗겨진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부끄러움보다는 내가 애써 숨기려 했던 것을 그는 다 까발려 놓고 얘길 한다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영빈 씨한테는 고독이 늘 그렇게 사나운 짐승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나요?"
"고독? 그래, 그것도 고독의 일종이겠지.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고독은 흐린 거울이 걸려 있는 어두운 카페 한구석에 앉아 밤늦도록 혼자 위스키를 마시며 애꿎은 담배를 죽이고 있는 중년 신사의 모습같은 거야. 호랑이하고는 좀 다르지." (27~28쪽)


그가 그렇게 얘기해도 상관 없었다. 내게는 그가 소설 내내 호랑이처럼 울부짖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굳이 지나간 시대의 아픔과 가정사의 불운함을 들먹이지 않아도 그-윤대녕에게 존재는 늘상 고독과 아픔에 시달리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태초에 받았던 상처가 여전히 기억 속 어딘가에 살아서 호랑이처럼 신음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상처를 준 걸까요?"
"상처는 스스로 받는 거야." (82쪽)


나는 여전히 안타깝고, 안타깝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지만 끝까지 그를 미워하지는 못할 것 같다. 아픔을 느끼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아버지를 찾아가는 영빈처럼 말이다. 책장을 덮으면서 나는 부모님 몰래 못된 짓을 한 아이처럼 냉큼 책장 한 구석에 이 책을 꽂아 버렸다. 이제는 그가 더 달라진 소설을 쓴다 해도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어설프게나마 읽어 낸 이러한 주제 밖의 다른 것들까지 건드려 문학 외적으로 그가 지탄 받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게 내 작은 바람이다. 이제는 육지로 돌아와 글을 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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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24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05-11-27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윤대녕 같은 글을 싫어하는 편입니다.
읽다 보면 괜히 정신과에라도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리... ㅋㅋㅋ
근데, 닉네임이 좀 웃기네요. ㅎㅎㅎ
 
7번 국도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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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창비, 2005)에 나타난 김연수 글쓰기의 다양한 형식이나 문헌 자료를 통한 (표현의 방식에 있어서의)현학적 취향에 대해 느낀 매력은 그의 초기작에 대한 궁금증으로 곧장 이어졌다. <7번 국도>와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는 약 10년 정도의 간격을 가진 작품들이기 때문에 이것으로 김연수의 소설이 지니는 시간적 진폭이랄까, 그러한 연결성(또는 단절성)을 찾아내고 단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심산은 아니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그간의 다양한 시도(작품)들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보니까.

어쨌든 <7번 국도>는 지금의 김연수와 약간은 어긋나 있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속도감있게 술술 잘 읽히는 소설이다. 이것은 문체의 경제성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의 형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시간적 순서나 인과관계에 구애받지 않고 주인공의 파편화된 기억들이 부분적으로 나열되고 있는 이 독특한 형식은 각각의 짧은 사건들을 완벽한 하나의 이야기로서, 또는 커다란 그림을 이루는 개별적인 퍼즐조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그밖에 김연수는 다른 문학 텍스트와 문화적 코드들을 끌어들여 와 중간중간에 삽입하고 있는데, 일단 이성복의 <그 해 여름>이란 시를 소설에 맞게 변형시켜 인용해 놓은 첫 부분은 <7번 국도>가 낭만과 여행이라는 환상으로 다독거려진 달콤쫍쪼름한 소설이 아니라는 불길한(?) 느낌을 받게 만든다. 그뿐이랴, 읽다가 밑줄을 쳐 놓은 부분이 장정일의 <강정 간다>란 시의 첫행에서 단어 하나만 바꿔 놓은 것이란 사실을 알고 나서는 원작과 패러디를 제대로 구분해 내지 못한 자신을 탓해야만 했으니.

<7번 국도>는 네 남녀의 사랑과 그로 인한 상처를 7번 국도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는 우리가 지난 90년대 소설에서 보아 왔던 바와 같이 상처와 응시(또는 치유)라는 구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공의 친구 재현은 서연과의 이별에서 비롯된 상처를 난폭한 자기 파괴라는 방법으로 일삼다가 주인공이 먼저 꼬신(?) 여자인 세희로부터 그 치유의 방법을 얻어나가려 한다. 그러나 세희 역시 기억 속에 정체되어 있는 상처를 가진 여자였고 결국 주인공과 재현은 7번국도를 자전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들만의 치유 방법을 깨달아 나가게 된다. 상처가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것, 그리고 더 이상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들의 '자전거로 7번국도 거슬러올라가기'란 궁극적으로 정체된 기억, 자신들을 사로잡고 있는 방해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으리라. 결국 세희는 일본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하고, 주인공은 (뒈져버린 7번국도라고 불리는) 죽어버린 나무에 물을 주기로 결심했으며, 재현은 다시 밴드를 결성한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린 때문일까. 연인과 함께 양철 지붕 처마 아래 나란히 서서 그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삶에 대한 애착과 진정성이 어쩐지 지금의 세태와 불협화음을 이루는 것만 같아 아쉽다. 90년대 일군의 소설들이 앞선 시대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뼈아픈 절망감, 그리고 허무라는 관념의 질척임을 연인과의 사랑과 상처라는 일련의 과정으로 치환시켜 나타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7번 국도> 역시 그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괴변일까. 어쨌든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김연수가 본격적인 다음 세대의 새로운(그러나 생에 대한 진정성을 담보한) 글쓰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창작된 모호한 소설인 것 같다.

정체된 무언가로부터 탈피하는 것은 곧 기억 속의 상처를 치유하고 희망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은 <7번 국도>의 주인공들이 새로운 삶의 의지를 갖게 됨과 동시에 앞으로 다가올 시대(물론 그것은 지금이 돼버렸다)를 준비하기하기 위한 또 한 번의 자기갱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용의 진정성과 일관성 속에서 구축되는 형식의 다채로움이야말로 김연수의 글쓰기를 계속해서 지켜보게 만드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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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경계 - 풍요로운 세계에서의 빈곤과 굶주림의 역설
프란시스 무어 라페 외 지음, 신경아 옮김 / 이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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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런 가정을 해보자. 지금으로부터 몇 세기가 지나지 않은 지구에 커다란 재앙이 닥친다. 그것은 대기 오염이나 방사능 오염 물질, 또는 민족국가 간의 대규모 전쟁 때문이 아니라 바로 먹을 것-식량의 수급량 부족에서 오는 인류의 멸망이다. 그런데 이것이 가정에 그칠 수 있을까? 전 세계의 학자들, 특히 생명 공학과 식량에 관계된 조직을 책임지고 있는 인사들은 가정에 그칠 문제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아프리카 어느 지역에서 굶어 죽어가는 어린 아이의 사진을 들먹이면서, 이미 식량 부족으로 인한 폐해가 전세계 도처에서 수시로 발생되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새로운 품종의 개발과 이로 인한 식량의 확보를 위해 유전 공학이 속속 발표해내는 결과들은 이미 '경이'의 차원을 넘어섰다. 그런데도 여전히 지구의 한 귀퉁이에서는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는 아이들이 존재한다면, 그들의 연구-품종의 개량, 유전자 변이, 살충제에 강한 옥수수, 성장촉진호르몬이 투여된 젖소의 우유-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지구의 한편에서는 비만과 그로 인한 합병증 등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하루에 한끼 먹을 량의 곡식이 없어서 사망한다. 그들은 어쩌면 식량 확보가 우선이 아니라 잘살고 풍요로운 나라와 그들의 계급을 위한 특별한 다이어트용 식량을 개발 중인지도 모른다.

저자인 프란시스 무어 라페와 그녀의 딸 안나 라페는 세계 여러 나라를 순례하면서, 안전하고 민주적이며 첨단 과학이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탁월한 자체 식량 수급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사람들과 만난다. 라페 모녀가 만난 이 작은 행성에 발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식량을, 민주주의를, 그리고 그들이 조금씩 넓혀가고 있는 희망의 경계를 얘기한다. 이 책은 단순히 "왜 식량인가?"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관념의 함정, 그리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선택"과 "희망"에 관해 말하고 있다.

라페 모녀의 여행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이 제시한 "우리를 가로막는 다섯 가지 생각들 - 하나, 우리의 적은 결핍이다. 생산만이 우리의 구세주이다. 둘, 우리의 이기적인 유전자에 감사하라. 셋, 시장이 결정하게 내버려두라. 전문가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넷, 문제는 분리해서 풀라. 다섯, 역사의 종언을 환영하라."라는 다섯 항목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증명해보이기 위한 기나긴 여정이다. 그리고 두 모녀는 우리의 상상력을 가로막고 희망의 경계를 확장하는 일을 방해하는 관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식량의 "안전한" 확보와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유기농법들, 그리고 보다 나은 농작물을 위한 건강한 토지의 분배 및 재생산 등은 미국 뿐만아니라 브라질과 방글라데시, 인도, 케냐와 중앙아메리카 등지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올바른 민주주의와 간섭받지 않는 상상력으로 이 작은 행성에서 희망의 경계를 밖으로밖으로 확대시켜나가는 표본이었다.

지금은 라이프 스타일 전반에 걸친 문화적 차원의 웰빙이 되었지만, 처음으로 '웰빙'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음식, 즉 식량의 차원에서였다. 그렇듯 인간에게 있어서 '먹을것'이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유전자 변이에 의한 신종 작물의 탄생에 대해서는 그저 "바로 지금" 일신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등한시 한다. 그것은 현재의 풍요와 궁극적인 빈곤에 대한 안이한 사고에서 비롯된다. 9장 <파리에서의 마지막 미각>에는 "레조 아그리콜 뒤라블Reseau Agricole Durable)", 즉 "지속 가능한 농업 네트워크"라는 말이 나온다. 연약한 우리의 사고에 "뒤라블"(견고함)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다.

라페 모녀는 여행을 마치고 "우리를 해방시키는 관념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알고는 있지만 우리가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 현재의 삶에 안주하려 하고 문제의 본질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기 위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 이러한 틀에서 해방되는 다섯 가지 관념. 그것은 이 책 안에, 그리고 이 작은 행성에 존재하는 여러 나라의 곳곳에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를 더 확장된 가능성의 영역으로, 희망의 영역으로 안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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