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
시리 허스트베트 지음, 김선형 옮김 / 뮤진트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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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믿지 말았어야 했어!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

원제 <The blindfold>도 잘 지은 제목이라고 생각이 들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는 한국어판 제목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이다. 많고 많은 책 중에 이 책에 눈길이 간 건, 작가 이름이 아니라 제목 때문이었으니까. 왜 당신을 믿고 '추락'했을까?애초에 당신을 믿지 않았다면, 추락하지 않았을까? '나'를 추락하게 한 당신도 '나'와 같이 추락했나 안 했나?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은 '추락한' 밤과 다르리라,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상태일까? 제목 자체만으로 궁금증이 폭발한다.



밤이 되면 남자가 되는 여대생의 자아찾기,

그런데, 대체 난 누구지?


미네소타를 떠나 뉴욕으로 온 아이리스는 남자친구와 그의 친구, 교수를 포함해 심지어 병원에 입원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서도 이상한 사람들과 맞닥뜨린다. 아이리스와 이들과의 관계는 조지가 찍고 멋대로 트리밍한 사진이나 소설의 원제인 눈가리개(blindfold), 또 패리스가 지적한 조르조네의 그림 <폭풍>에서도 엿볼 수 있다. 타자의 시선에서 찍혀 제멋대로 트리밍된 사진이 불쾌감을 주듯, 아이리스는 타자를 만날수록 피해의식이 커지고 자기 내면의 공격성을 발견하게 된다. 또, <잔인한 아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번역하면서부터는 바짝 깎은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친구 동생의 양복을 빌려 입고, 비속어와 원색적 동사를 즐겨 쓰는 소설 족 주인공 클라우스 행세를 하고 다니며 성적 정체성마저 의심하게 된다.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은 주인공이 만나는 사람마다 눈가리개처럼 두 눈을 가려 자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스스로 충분히 또 제대로 알고 있다고 믿어온 것이 사실은 불완전하고 잘못됐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자기 정체성을 의심하고 되찾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아이리스의 음침한 주변인물들,  

"이상한 애 옆에 또 이상한 애,    

그 옆의 애도, 그 옆의 옆의 애도 

온통 이상해."


아이리스의 주변 인물은 죄다 이상하다. 모두 아이리스에게 무언가 숨기고 진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도저히 뿌리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라는 남자친구 스티븐은 "다만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을 뿐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라는 황당한 주장을 펴고, 아무 때나 아무에게 카메라를 들이미는 그냥 '사진가' 아니라 '사진 찍는 예술가'라는 스티븐의 친구 조지는 음흉스러운 구석이 있고, 정신병원에서 같은 병실에 묵던 O 부인의 돌발 행동은 황당하다 못해 두렵고, 극단적인 발언을 잘하는 평론가 패리스와 제자와 바람을 피우다 과하게 집착한 나머지 폭력을 행사하다 울음을 터뜨리는 혐오스러운 교수까지 모두 기분 나쁠 정도로 음침한 기운을 풍긴다. 어떤 면에서는 잔인하게 살해당한 여성의 소지품을 가져다주고 이를 묘사해달라던 작가 모닝 씨보다도 더. 이상한 사람이라며 피했더니, 아까와는 또 다른 이상한 사람이 한 명 기다리고 있다. '이 사람은 또 뭐야?!' 하면서 달아나면, 그곳에 또 다른 사람이 기다리는 모양새다. 하긴 소설을 번역하던 여대생이 소설 속 남자 주인공 행세를 하고 다니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고 볼 수는 없으니까. 




미스테리 심리 스릴러 (feat. 에로티시즘)

특별히 관능적으로 보이는 인물도 없고, 딱히 에로틱한 장면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에로틱하게 느껴지는 데다 긴장감 넘치는 전개와 인물들 간의 도발적인 대화는 모범적인 심리 스릴러답다. 또 시간순으로 구성하지 않은 4편의 이음새는 흥미를 고조시킨다. 다만, 시종일관 유지되는 긴장감과 음침함이 왠지 모를 찝찝함으로 남기도 한다. 




유명 작가의 아내의 외침,

"여보, 나도 이제 소설 쓸래!"


'좋아하는 사람의 아내가 쓰는 글은 어떤 스타일이고, 그녀는 얼마나 잘 쓸까?' 궁금해서 읽은 책이다. 여기서 '좋아하는 사람'은 미국 작가, 폴 오스터(Paul Auster)이고, (그의 두 번째) 아내는 시리 허스트베트(Siri Hustvedt)다. 사실 시리 허스트베트는 단순히 '소설가의 아내'라고 부를 수 없는 사람이다. 전방위 인문학자이자 비평가로, 이 작품으로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에는 시집도 냈다.  


시리 허스트베트는 데뷔작에 "폴 오스터(남편)를 위하여"라고 써넣었다. 이야기를 읽기 전에는 '남편이 폴 오스터라니, 부러워!'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녀의 데뷔작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하나다. '이런 글을 쓸 수 있으니 폴 오스터와 같이 살겠지.' 조만간 시리 허스트베트의 작품을 더 읽어야겠다. 



,,, 그때 나는 클리셰로 말하는 게 얼마나 쉬운지 모르겠다고, 싸구려 대중소설에서 대사 한 줄 훔쳐서 뚝 떨어뜨리는 게 참 쉽구나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하긴 우리의 말들로는 어쨌든 형용할 수 없는 것의 언저리를 부유할 수밖에 없고, 예전에 어디선가 들어본 말을 하면 마음이 편하기는 하니까. p.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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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쏜살 문고
이지원 지음 / 민음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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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는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번역가로도 활동 중인 이지원의 산문집으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한 번쯤 느껴봤을 만한 크고 작은 이슈를 다룬 책이다. 아래는 이 책에서 다루는 불만의 몇 가지 예다. 당신도 분노한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 매일 같이 스팸 메일을 보내오는 "거지 같은" 회사에 불만을 느낀 적이 있나요?

· 제대로 뜯어지지 않는 과자 봉투에 분노해 회사로 전화를 걸고 싶었던 적이 있나요?

· 자기 연민의 질척한 감정을 즐기는 변태적 성향을 반영하는 말, '멘붕'이 듣기 싫은가요?

· "바퀴벌레처럼 무분별하게 증식하는" 넘쳐나는 멘토들과 그들의 강연에 회의적인가요?

· 대형마트나 버스정류장처럼 공공장소에서 기본예절조차 지키지 않고, 

 타인과의 시간약속을 우습게 저버리는 사람들을 참을 수 없나요?

· 동네 주민들이 뭘 좋아하는지 관심도 없다가 프랜차이즈에 사라진 동네 마트가 답답하게 느껴지고, 

  그 덩치에 고작 골목 상권을 위협하는 대기업의 작태가 혐오스러운가요?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는 일단 재미있다. 탁월한 형용사 선택과 자주 튀어나오는 비속어 퍼레이드에 입이 떡 벌어지고, 시각디자인과 교수는 원래 욕도 이렇게 고급스럽게 하나 싶을 정도로 우아한 디스의 향연에 넋이 나갈 지경이다. 또 대기업은 물론이고 특정 이해집단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오히려 실명까지 모두 공개하는 어디서도 보기 힘든 울트라 초특급 '모두까기'에는 감탄이 절로 난다. 좀처럼 보기 힘든 실명공개에 속이 다 시원하다. 정말 말 그대로 '교수님, 개간지!'난다. 



물론 이런 식의 글이나 화법 또는 이런 화법을 구사하는 인물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저자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다 좋은 게 좋은 건데 왜 그리 매사에 불만이 많냐?'며 불편해한다. 그러나 '다 좋은 게 좋은 거야'라는 말의 허점은 두 가지다. 첫째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만) 집단 구성원 모두에게 좋다고 해도 각자에게 좋은 정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형평성의 문제이고, 둘째는 그 '다'가 누구의 시점에서 본 '다'냐는 것인데, 반드시 고의로든 실수로든 누락되는 인물이 있을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그러니 반박을 해도 좋으니, 일단은 이들의 주장을 들어본 다음에 하면 좋겠다. 



사실 문제 제기는 문제 묵인보다 훨씬 수고스럽다. 좋은 소리는커녕 욕 안 들으면 다행이고, 더러는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보다 질적으로 더 나은 사회, 헬조선에서 헬이란 글자를 떼어버리기 위해서는 저자처럼 수고스러움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아니 많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가 그랬다. 오늘날 우리는 만든 사람 없이 만들어진 물건에 둘러싸여 살아간다며 사람과 사물의 관계를 올바르게 맺어 주는 배려가 귀한 세상이라 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의견이 다르다고 서로를 비난하고 공격하는가 하면, 우리를 둘러싼 물건은 최대이윤 추구라는 목표 아래 사용자의 목숨을 우습게 보고 위협한다. 하루에도 수도 없이 멘붕에 빠지고 힐링을 찾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고급스러운 디스를 선보이는 디자인과 교수의 모두까기는 다음 두 가지를 위한 것이 아닐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식, 그리고 사람과 사물 사이의 배려. 자칫하면 '명치 맞을' 만큼 비상식적이고 배려 없는 행동을 알아서 하지 않는 것, 이 두 가지만으로도 우리는 헬조선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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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혁명 2030 - 제4차 산업혁명이 변화시킬 업[業]의 미래
박영숙.제롬 글렌 지음, 이희령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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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년이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 우리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지금 하는 일? 아니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일? 혹시 이미 내 일자리가 없어진 건 아닐까? 



어제 발표된 뉴스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년층 체감실업률은 22.9%다. 지금도 부족한 일자리는 앞으로도 로봇과 인공(일반)지능과 머신 러닝 등으로 계속 대체될 것이니 불안감과 위기감이 더 커진다. 그런데 구글이 선정한 미래학자 토머스 프레이의 말에 따르면 "미래 일자리 중 60%는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았다"고 하니, 다행인 건가?



미래 기술 예측 기관인 태크캐스트 글로벌TechCast Global은 2030년까지 에너지 산업과 로봇공학, 바이오 및 의료산업이 최대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 책에서는 '지금 주목해야 할 12개의 혁신 기업'을 소개하는데 그들 모두는 '죽음 없는 사회', '쓰레기 없는 세상'처럼 강력한 미래 비전을 제시한다. 앞으로 이 기업들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지 주목하는 게 좋겠다. 



<세계미래보고서> 시리즈의 저자인 박영숙 교수와 제롬 글렌 밀레니엄 프로젝트 회장이 함께 펴낸 이 책 『일자리 혁명 2030』에도 '보편적 기본소득'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핀란드는 올해 1월부터 정부가 무작위로 선정한 실업자 2천 명에게 매달 기본소득 70만 원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무려 2년 동안 진행되는 프로젝트다. 우리나라 역시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가 분분하다. 기술적 실업이 증가하고 부와 소득의 불평등이 심화돼 기존의 복지제도로는 어렵다는 판단으로 최저임금을 올리고,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것인데 필요한 예산 확보 문제 등으로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는 상황이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마저 일자리를 잃고 소득원이 없어지면, 마땅한 다른 대안이 또 있을까? 


링크 참고: http://newatlas.com/apis-cor-3d-printed-tiny-house/48231/


기본소득을 받으며, 생계유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아실현을 위해 일하는 시대가 곧 펼쳐진다니! 우리가 꿈꾸던 시대라며 환호하는 게 맞을까, '나는 내 꿈이 뭔지 몰라요'라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게 보다 사실적일까? 미국 회사는 3D 프린터로 하루 만에 집 한 채를 만들어 천만 원에 팔고(아래 사진), 중국 회사는 15평짜리 주택을 500만원에 만들어 판다. 


상상해보자. 이렇게 하루만에 집을 만들어내면, 건축가나 공인중개사가 필요 없다. 가정마다 3D 프린터로 각자가 쓸 물건을 직접 만드니 대형공장이나 아웃소싱이 필요 없고, 수입이나 수출이 없으니 물건을 실을 화물선도 필요 없다. 다소 섣부른 가정이기는 하지만, 일자리를 잃을 사람들이 벌써 꽤 많다.   




미래 예측 전문가가 말한다. 한 분야에 많은 지식을 갖춘 전문가보다 여러 분야의 지식을 갖춘 전문가가 더 필요하다고. 흔히 말하는, '융합형 인재'다. 더 이상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역동적인 미래 사회 환경을 가리켜 뷰카 VUCA라고 부른다. 변동성Volatility의 V, 불확실성Uncertainty을 가리키는 U, 복잡성Complexity의 C, 모호성Ambiguity의 앞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뷰카 시대에 필요한 리더는 다음과 같다. 불확실하고 모호하고 변동이 많아 복잡한 미래 사회에는 SF적 상상력이 있고, 인간 중심적 사고와 스토리텔링이 발달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연구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직접 체험할 줄 알며, 지속가능한 세상을 위해 애쓰는 스스로 변화하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융합형 리더'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지금부터 인공지능을 공부해 창업할 게 아니라면, 현실적으로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 게 맞을까? 세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주목하면서 어떻게 하면 융합적 사고와 판단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거듭날지를 고민하는 게 아닐까? 융합적 인재들이 지금 이 순간을 비롯해 내일과 모레도 고군분투하며 만들어낼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40%의 일자리 중에 나에게 가장 어울릴 만한 일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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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그 나이 먹은 당신에게 바치는 일상 공감서
한설희 지음, 오지혜 그림 / 허밍버드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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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슬픈 제목이 또 있을까? 나 역시 이제 '막돼먹은 영애씨'와 제법 비슷한 처지가 되어가니 『나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가 그저 남의 얘기로만 읽히지 않는다. (미혼) 남성 독자나 기혼 여성이라면 어떻게 읽을지 살짝 궁금해질 만큼 이 에세이에는 대한민국 3~40대 싱글 여성이 겪을 법한 감정이 거의 다 들어 있다.  




예를 들어, 결혼을 재촉하던 부모님은 어느새 "우리 딸은 독신이다"라고 대외적으로 발표해서 놀라게 한다거나(#2, 막상 결혼의 압박이 사라지면) 결혼해서 애 낳고 사는 친구로부터 혼자 사는 게 최고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거나 (#7, 다시 태어나면 누가 되고 싶어?) '유부녀 - 이혼녀 - 노처녀'의 서열에 대한 의문을 비롯해 신체 노화에 따른 당혹스러운 감정, 그리고 '그 나이에'라는 말로 모든 걸 정리하려 드는 자들에 대한 불편함까지 모두 다 담아냈다.




우리 사회는 유난히 "나이"에 대한 압박이 강하다. 획일화된 삶을 강요하고 또 강요받는 우리에게는 그 나이에 지켜야 하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그 나이에 맞지 않는 그런 옷을 입어서는 안 되고, 그런 머리를 해서도 안 되고, 그런 화장을 해도 안 되고, 더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그 암묵적인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나잇값 못하는 인간'이 되는데, 간혹 로맨틱 판타지가 더해지면 '영애씨'나 '브리짓 존스'가 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한다. 물론 현실성이 떨어지는 가정이기는 해도 말이다. 




동년배가 '아무 일'을 수차례 겪는 동안, 그것들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이들'은 '그 나이에 왜 그러냐?'는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설희 작가는 말한다. 자신처럼, 영애씨처럼, 그 나이에도 여전히 남들 다 겪는 일을 겪지 못하거나 겪지 않고 불완전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래도 느긋하게 살자고. 물론 어떤 상황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위축되지도 않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아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이에 대한 짐을 내려놓고, 나만의 페이스대로 늦으면 늦은 대로 그렇게 살아도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평생 뭐든 남보다 느리게 살아왔다면, 남들 다 겪는 일 역시 좀 늦게 겪거나 더러는 건너뛰면 어떤가? 그게 원래 본인의 페이스인 것을.




그러니 쫄지 말고, 당당히 고개 들고 삽시다. 그리고, 옆에서도 '그 나이에 왜 그러고 사냐?'고 무안하게 말하지 맙시다. 알아서 살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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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온도 (100만부 돌파 기념 양장 특별판) -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
이기주 지음 / 말글터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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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온도』보다 한 해 먼저 선보인 『여전히 글쓰기가 두려운 당신에게』보다 확실히 디자인이나 편집이 더 세련돼졌다. <말·글·행>으로 이어지는 구성은 깔끔하나 분량이 많아서인지 가슴으로 이어지지 않고 그냥 눈으로만 읽히는 글들도 종종 눈에 띈다. 저자는 서문에서 '적당히 뜨거운 음식을 먹듯 찬찬히 곱씹어 읽어달라' 하지만, 만약 어느 신문이나 잡지에 한 꼭지씩 연재된 글이었다면, '오늘 글은 좀 심심한걸'이라고 반응하는 날도 있었겠다. 





SNS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느라 바쁘다. '잘 말하기'와 '잘 쓰기'를 가르치는 책이 쏟아져 나오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먼저 남의 이야기를 잘 듣고, 남이 쓴 글을 많이 읽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다만,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남의 글을 정독할 만한 시간적 그리고 심리적 여유를 잃어가는 게 문제다.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 가슴에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기 때문 (p. 63)'에 그렇다. 이기주의 『언어의 온도』는 우리 가슴에 나 있는 그 커다란 구멍을 인지하게 하고, 나의 이야기를 넘어 너, 그,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완곡하게 말한다. 왜? 세상 사람 누구나 우주만 한 크기의 사연 하나쯤은 가슴속 깊이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사연은 무엇일까? 이 책을 읽는 동안, 나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질 것이다. 가깝게는 부모님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친구들, 동료 및 선후배들, 게다가 오늘 하루 나를 스쳐 지나간 이들까지도. 



『언어의 온도』에서 반복되는 몇 가지 키워드


1. 위로_헤아림이라는 땅 위에 피는 꽃

어떤 환자와 보호자 아내의 대화를 듣고, 이기주는 논어에 나오는 한 구절 '애지욕기생愛之欲其死, (사랑은 사람을 살아가게끔 한다)'을 떠올렸다 했다. 그의 글을 읽고 나니 사랑만큼이나 사람을 살게 하는 건, 위로인 듯하다. 위로가 사람을 살아가게끔 한다. 때로는 사랑보다 더. 




2. 어머니_신이 선사한 첫 번째 기적

『언어의 온도』에는 저자의 부모님, 좀 더 정확히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여기저기 묻어난다. 당장 내일이 어버이날이라 더 그렇지만,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고마움을 자극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잘 지내냐? 한 번 걸어봤다" 시집간 딸이 잘 지내나 궁금해 전화해 놓고 그냥 걸어봤다는 아버지의 말뜻을 어떻게 모를 수 있겠나? 아버지의 "한 번 걸어봤다"는 흡사 이석원의 『언제 들어도 좋은 말』에서 석원의 속을 태우던 여인의 "뭐 해요?"만큼이나 가슴을 가득 채운다. 



저자가 5월을 제일 좋아한다 했던가?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그리고 성년의 날까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주변 사람들을 챙기느라 바쁜 달이다. 미루고 미루다 5월에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의 온도』는 여러모로 5월과 잘 어울리니까. 




3. 틈_채우고 메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그것

작은 사찰 마당 한가운데에 세워진 석탑에 세월과 비바람을 견딘 흔적이 가득하다. 주지 스님이 말씀하신다. 탑이 오히려 너무 빽빽하거나 오밀조밀하면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폭삭 내려앉는다고. 스님 말씀대로 채우고 메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건, 틈을 만드는 일이다.



소란스러운 것에만 집착하느라, 모든 걸 삐딱하게 바라보느라 정작 가치 있는 풍경을 바라보지 못한 채 살지 말고, 가슴을 쿵 내려앉게 만드는 그 무엇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 가지 말라 했다. 



중요한 건, 틈이요, 공백이다. 정말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무언가 소중한 걸 잊고 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 공백이 필요하단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진정한 '나'를 만나기 위한 것이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또한 사실은 '나'를 알기 위함이라 했던가. 바쁘게 살면 살수록 '나'는 보이지 않고, 빽빽한 하루에 정작 '나'를 위한 시간이 없다. 그럴 때면, 잠시 쉬어가도 좋다. 너무 빽빽하게 살다 보면, 곧 지나갈 비바람에도 맥을 못 추고 쓰러지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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