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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쓰정류장
김비 지음 / 가쎄(GASSE) / 2012년 10월
평점 :
모두들 목적지를 찾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곳, 수많은 행인이 스치고 정차하거나 출발을 서두르는 버스들, 정해진 시간때문에 때론 그 곳을 향해 뛰기도 하고 새로 보게 될 풍경에 미리부터 가슴설레이는 내게 버스정류장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장소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버스정류장에서 아프고 쓰라린 기억의 샘을 끌어올렸다. 자신의 기억이 시작된 버스정류장을 찾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한 과거의 상처를 되짚으려는 한 여인과 불편한 다리로 힘겹게 현실을 버티는 그녀의 남편, 부부사이에서 남자와 여자의 경계를 아슬하게 오가는 이방인의 불안한 동행이 시작된다. 오로지 기억속에 존재하는 빠쓰정류장이란 간판과 그 곳의 풍경에 의지해 버스정류장을 찾기 위한 버스정류장 순례길.
남편의 다리가 사고로 절단되어 그가 절망에 빠졌을 때, 희망으로 밤잠을 설치며 시작했던 가게를 정리해야 했을 때도 순옥은 남편이 이야기한, 피안(彼岸)의 경지에 이르는 행복이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죽게 된다는 의사의 암선고에 그녀는 돌연 여행을 결심한다. 평온하게 웃기 위한 마지막 결행을 각오한 듯, 죽음이란 낯설고 두려운 과정을 준비하기 위한 듯 자신이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을 찾기 위해 그녀는 안간힘을 쓰며 버스정류장을 찾아헤맨다. 그녀가 찾아헤맨 장소, 그 곳엔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가 있다. 엄마, 그녀가 자신을 버린 순간부터 순옥의 삶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어두운 터널이었다.
꿈이란 원래 그런 것. 날개 없는 것들은 하늘을 날고,
사랑을 잃은 사람들은 사랑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가 되는
그런 것이 바로 꿈 속. 팍팍하고 칙칙한 현실을 살고 있는 것들에게는 언제나
보드랍고 환한 희망이던 것이, 그런 꿈 속. -p.19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기억 속 '빠쓰정류장'을 찾아헤매는 긴 여정동안 묵직하게 자신을 눌러왔던 죽음의 그림자를 벗어나고, 긴 터널의 끝에 소화되지 않는 불량식품처럼 차고 넘쳤던 '희망'의 비타민으로 밝게 웃을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이 여정에서 순옥을 비로소 웃게 만들어준 '리브'의 존재에 대해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남자로 태어나 여자로 살기 위해 순옥처럼 녹록치않은 인생을 살아온 이방인 '리브'. 남편보다 더 큰 덩치에 원피스와 하이힐을 신고, 거칠은 수염자국과 특유의 웃음소리로 순옥과 독자인 나조차 혼란에 빠뜨린 존재. 나는 그(혹은 그녀)를 이방인이라 칭했다. 다른 나라에서 왔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악의 존재가 아님에도 순옥처럼 자연스레 거부반응이 먼저 일어나는 '리브'의 존재는 낯섬 그 자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좀 다르다. 이제 트렌스젠더라 부르는 이들을 음지로만 내몰던 구시대적 고정관념은 어느 정도 포용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리브'가 더 낯설게 다가오는 건 거친 외모와 눈치없이 던지는 불편하고 직설적인 대사와 행동탓이었다. 그러나 최근 저자의 말을 들으니 '리브'는 실제 트랜스젠더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고 했다. -'리브'와 같은 입장의 저자를 생각했을때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리브'를 이방인이라 칭한 것조차 그들을 인정하는 관용을 베풀고 있다고 생각한 나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생각에 따라 삶의 모양은 바뀔 것이다. 냉수는 블루마운틴이 되고,
비명은 노래가 될 것이다. 희망의 미덕이란 그렇게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함이라고.
......(중략) 그러나 그건 우는 아이를 달래는 막대사탕 같은 것에 불과하다.
새빨간 단물을 쪽쪽 빨며 그걸 집어삼키리라 기대하겠지만, 나는 어린애가 아니다.
내가 받아든 불량식품 같은 희망은 이미 자루 하나에 차고 넘쳤다. -p.32
동행내내 '리브'를 이해할 수 없어 냉소적이었던 순옥의 태도는 조금씩 누그러든다. 곪은 채 아물지 못한 상처를 지녀 자기방어적일 수 밖에 없었던 자신과 '리브'의 상황을 조금씩 받아들인 듯 했다. 순옥의 남편 주열 역시 순옥과 마찬가지로 처음엔 '리브'를 거부하며 밀쳐내려 한다. 하지만 순옥의 웃음으로 인해 희망을 꿈꾸기 시작하면서 '리브'를 향해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연다. 그러자 위태롭게만 보이던 셋의 동행이 꽤나 재미있는 장면들을 연출했다. 버스정류장을 이동하면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풍경들이 정겨웠다. 그래서 이 책을 보고 나니 모두 엇비슷하고 을씨년스럽게 보이던 버스정류장들이 마치 거대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 다가왔고, 저자가 찍은 수십장의 버스정류장 사진을 통해 그런 생각이 뚜렷해졌다. 모두 어딘가로 떠나는 듯 보이는 정류장의 모습. 하지만 반대로 떠났다가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버스정류장 순례길을 떠난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여행의 끝에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오지만 그들의 삶도 조금은 평온해진 것 같았다.
또다시 우리는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아무리 먼 데를 보면서 걷고
또 걸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마는 시간. 그러나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삶이고, 시간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p.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