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도 어김없이 납량특집드라마가 나오고 공포영화가 개봉하고 있다. 우선 납량특집하면 나는 가장 먼저 유명한 TV시리즈인 '전설의 고향'이 떠오른다. 아마 나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할 것 같다. 전설의 고향 각 에피소드에 등장해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역시 귀신이다. 하얀 소복과 길게 풀어헤친 머리에 푸른 조명을 받으면 더 기괴한 모습으로 비춰져 주변사람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여자귀신. 한을 품은 귀신의 모습은 외국의 어떤 유령이나 괴물보다 심리적인 위협과 공포를 품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렇게 귀신이 등장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패배자로 낙인찍힌 여자귀신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이 있다. 속담이 말해주듯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특유의 한의 정서와 역사가 있다. 그 중에서도 뿌리깊은 유교사상과 가부장제에 억눌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여인들의 삶은 죽어서도 한을 풀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 되어 사람들에게 그늘을 드리웠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남자보다 많은 많은 성비의 여자귀신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 사대부의 능력이나 관리의 유능함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유희나 도구로 이용됐을수 있다는 해석은 나의 고정관념을 전복시켰다. 일단 귀신이야기가 많이 등장한 야담의 주요 독자층이 사대부 남성이었고, 그들의 관심사에 맞게 변형되고 꾸며낸 이야기속에는 어김없이 억울한 사연을 간직한 채 죽은 귀신들이 등장한다. 귀신의 호소에 귀기울이는 담력과 배짱을 가진 관리가 등장하고 그는 귀신의 억울함을 정의롭게 해결해주는 능력과 지혜를 가졌다. 귀신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조용히 물러나고 관리는 유능한 존재로 급부상한다. 야담이라는 장르가 사대부들이 여가에 읽는 독서물이라는 것과 관련된다. 후대로 가면서 독자층이 확대되기는 했지만, 야담의 주요 독자층은 여전히 사대부 남성이었다. 야담에 관리의 일화가 그토록 많이 등장하는 것, 왕과의 일화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은 주된 독자층인 사대부와 관리들의 관심사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p.79 예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귀신이야기속에서 문제가 제기되는 순간이었다. 완전한 죽음으로 끝맺지 못한 생의 그들을 패배자, 금기를 깬 아웃사이더, 불온의 상징으로 여겨 바로잡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여자귀신들이 품은 원한조차 결국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떳떳해지려는 노력이었다. 많은 야담속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자귀신이 등장하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남자귀신들이 이승을 떠도는 이유는 여자귀신과 달리 한이나 원한이 아닌 일상적 대화였다고 한다. 죽어서도 가장이나 남편, 주인으로서 역활을 행사하고 현실을 간섭하고 지배하려 했다는 대목에서는 남성우월주의의 전형을 보는 듯해 씁쓸했다. 결국 귀신이야기를 향유하고 소비하는 문화조차 남성위주였기 때문에 그들의 입맛에 맞게 씌어진 것이었다. 여자귀신의 죽음과 등장 이면에 보수적인 사회시각과 냉대, 선택이 아닌 강요에 의한 자살 역시 사회의 폐쇄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 했다. 여자 귀신 이야기는 원한 맺힌 여인의 자살담 형태로 구성되어 귀신의 한을 공포로 전이시키는 방식을 채택해왔다. 그 과정에서 귀신이 등장한 배경으로서의 문화 논리는 은폐되었다. 이야기가 그들이 왜 여귀가 되었는가에 주목하기보다는 귀신의 등장이 가져오는 공포와 파괴적 속성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또한 귀신의 '한'에 귀기울이기보다는 귀신을 물리친 '똑똑한 남성'의 문제 해결력에 주목하는 서사 논리가 관여되었기 때문이다. -p.28 조신시대 여성에게 '열'은 죽음을 불사하고 지켜야 할 윤리적 가치였다. 따라서 과부들이 자결을 택해 '열녀'가 되었던 현상의 이면에는, 여성의 정조에 대한 정치적 통제가 작동하고 있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여성의 목숨은 개인의 몫이기 이전에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관리의 대상이었다. 남편이 죽은 여성은 자살을 통해 자신의 성을 남편에게 바침으로써 성적 귀속의 단일성을 사회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p.101 이런 해석덕분에 올 여름 TV나 영화를 통해 만나는 귀신들은 내게 전혀 공포스럽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측은하고 슬플 것이다. 진정 사회적 약자일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죽음은 시대가 변해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왜 그들이 억울해 원귀가 되어 사람들앞에 나타났는지가 아니라, 왜 그들이 죽을 수 밖에 없었는가를 되짚어보면 시대적 억압과 사회적 차별은 비단 옛날 옛적 이야기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각을 통해 공포를 해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