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아테나 1 - 날조된 고대 그리스 1785~1985, 서양 고전 문명의 아프리카.아시아적 뿌리 블랙 아테나 1
마틴 버낼 지음, 오흥식 옮김 / 소나무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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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고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게 그리스 문명은 인도유럽어를 쓰는 아리아인종의 침입으로 형성되었다거나, 어떠한 다른 문명의 도움도 없이 자생적으로 발생하였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보통 ‘아리안 모델’이라고 부른다. 하지만『블랙 아테나』를 쓴 마틴 버낼은 이러한 아리안 모델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는 그리스 문명도 다른, 특히 동방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그것은 고대 특히 고대 그리스인들이 저술한 사료에서도 쉽게 확인 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 문명이 이집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증거로 그리스의 시초가 되는 미케네를 세운 페르세우스의 조상인 다나오스가 사실 이집트로부터 축출된 힉소스임을 밝힌다. 다나오스는 이집트에서 형제인 아이깁토스와의 세력다툼에서 지고 펠로폰네소스 지방의 아르고스에 와서 그곳의 왕을 축출하고 자신이 왕이 된다. 그 후 다나오스의 후손인 페르세우스가 미케네를 세우고, ‘도리스족의 침입’이전까지 그리스 지방을 지배하게 된다. 페르세우스가 이집트적 뿌리를 가졌다는 것은 페르세우스를 위해 축제를 벌이는 이집트인들의 모습에서도 확인된다. 페르세우스는 다나오스의 후손이고, 다나오스는 힉소스이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자신과 뿌리가 같은 페르세우스를 위해 축제를 벌이는 것이다. 그 후 도리스족의 침입이라고 불리는 헤라클레스왕가의 귀환도 헤라클레스가 페르세우스의 후손임을 감안한다면 그리스문명의 이집트적인 뿌리가 이어지는 것이다.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이 세운, 스파르타의 왕 아레오스가 유다인과 자신들은 형제라고 부르는 것도 자신들의 힉소스적인 뿌리, 즉 유다인과 페니키아인이 포함되는 힉소스임을 생각한다면 모두 아브라함의 후예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리스문명의 상징적인 존재인 ‘아테나 여신‘도 이집트에서부터 왔다고 주장한다. 아테나 여신은 다나오스가 이집트로부터 떠나올 때 들여온 것이라는 것인데, 다나오스가 아테나 여신의 충고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플라톤도 아테나여신은 나일 삼각주에 있는 사이스市의 창립자, 즉 이집트어로 ’네이트‘여신이라고 서술한다. 헤로도토스도 사이스에 아테나 여신의 신전이 있다는 것을 여러 군데에서 언급하고 있다. 결국 그리스문명의 형성에는 이집트문명의 영향이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주장을 종합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는 결국 다나오스로부터 시작하는 미케네 그리스문명의 역사가 되는 것이며, 그 역사는 사실 이집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리스 신화를 역사적 가치가 있는 사료로 인정하지 않고 그저 재미있는 허구의 이야기로만 인식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역사자체에서 기인한다기보다 고대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은 그동안 유럽을 지배한 그리스도적 가치관을 대체하는 엄청난 혁명이었다.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나폴레옹에게 패함으로써 자신들이 국가통합의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심각한 고민에 싸인 프로이센의 지배층은 결국 헬레니즘이라는 제3의 대안을 생각해내게 된다. 그리하여 독일과 독일의 영향을 받은 영국에서는 古典學, 古代學이라는 학문이 발달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은 그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제국주의, 인종주의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고 古典學은 유럽중심주의를 전파하는 이데올로그의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당시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던 ‘미개한’ 동방의 문명이 자신들의 뿌리가 되는 그리스문명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스 문명에 대한 이집트의 영향을 입증하는 ‘미케네 그리스’의 역사인 그리스 신화는 정당한 가치를 가진 사료가 아닌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인 신화로 치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자인 마틴 바낼은『블랙아테나』의 ‘정치적 목적’은 유럽의 오만을 줄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집트의 영향을 긍정하는 ‘고대 모델’이 그리스 문명은 순수하며 자생적이라는 ‘아리안 모델’로 바뀌는 과정을 “지적․학술적 발전은 사회․정치적 발전과 더불어 관찰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입각해 살펴봄으로서 우리가 상식이라고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고대 그리스에 대한 시각이 사실은 수많은 왜곡과 편견을 통해 만들어진 인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블랙 아테나』는 단순히 고대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는 책이 아니라 고대를 바라보는 시각을 통해 우리안에 자리잡은 유럽중심주의라는 편견을 깨는 책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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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바퀴로 가는 과학자전거 - 강양구의 과학.기술.사회 가로지르기 세 바퀴로 가는 과학자전거 1
강양구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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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의 키워드를 하나 꼽는다면 황우석과 그를 둘러싼 논란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과학자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여겼던 어려운 생물학 용어들이 일반인들의 이야기주제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황우석을 비난하고 욕했지만 일부는 아직도 황우석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이라고 자신을 자랑하던 과학이 어떻게 이러한 사회적인 논란을 가져오게 된 것일까.

황우석 사태를 세상에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프레시안의 강양구 기자는 과학은 사회와 별개라는 주장에 대해 강력히 이의를 제기한다. 과학은 결코 스스로 객관적이지 않고, 가치중립적이지도 않으며 그 어떤 학문에 비해서도 철저히 사화적인 맥락을 따른다는 것이다.

저자는 먼저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과학기술이 과연 어떻게 사회와 관련을 맺고 있는지 알려준다. 과학기술 덕분으로 가사노동에서 해방되었다고 믿어지는 가정주부는 사실 각종 기구의 도입으로 모든 일을 혼자 떠맡게 되었고, 청결에 대한 강박관념도 심해져 실제로는 예전의 주부에 비해서 더 많은 일을 하게 되었다는 분석은 과학기술 덕분에 인류가 고통스런 노동에서 해방되고 많은 여가를 즐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간단히 반박한다. 수치제어형 공작기계와 녹음재생용 공작기계 중에서 녹음재생용이 더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를 억압하기 위해 수치제어용 공작기계를 도입한 사례와, 성능이 뛰어난 가스냉장고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단점이 있는 전기냉장고를 표준으로 만든 거대기업의 사례는 과학기술은 스스로 좀 더 편리하고 진보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주장을 대신한다. 어떠한 기술이 선택되기까지는 그 기술이 얼마나 뛰어나냐는 고려 이전에 기술로 인해 나타나게 될 사회적 이해관계에 대한 고려가 선행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모르게 찾아온 과학기술은 인간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을까. 오염 없고, 무한한 에너지로 각광받아온 핵 발전은 그 스스로도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핵폭탄이라는 재앙을 만들어냈다. 좀 더 많은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육골사료분은 광우병이라는 치명적인 질병을 만들어냈다. 또 유비쿼터스, 정보사회 등 달콤한 이름으로 치장되어있는 정보기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권력기관이 자신을 감시할 수 있는 빅 브라더 사회의 실현을 크게 앞당겼다. 이뿐만이 아니다. 인류가 과학과 진보라는 이름을 위해 펑펑 써버린 석유는 이제 고갈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성찰하지 않는 과학기술은 인류에게 안락한 삶을 약속해주는 듯 했지만 다른 면에서는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온 것이다.

저자는 이제라도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사회적인 맥락에서 바라보고 성찰하자고 주장한다. 식량생산에 대한 과학기술이 인류를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것이라는 거짓말을 거부하고, 자본의 욕망을 위해 식량을 독점하는 거대기업에 대항해 지역의 먹거리를 찾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또한 허황된 줄기세포기술을 맹신해 장애인에게 '일반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보다는 장애를 가진 사람도 일반인과 같이 불편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엄청난 이익을 챙기고 있는 다국적 제약회사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독점적 특허권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과학기술을 제어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도 알려준다. 벌써 여러 선진국에서 시행하고 있고 한국에서도 시행된 경험이 있는 '합의회의'라는 제도는 과학기술 전문가와 일반 시민이 머리를 맞대고 과학기술에 대해 토론하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것이다. 저자는 어려운 과학기술에 대해 어떻게 '원자와 전자도 구별하지 못하는'일반인이 정책을 다룰 수 있냐는 비판에 대해, 과학기술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은 과학기술에 대해 많이 아는 것과는 상관이 없으며, 각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가치판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어차피 시민이기에 시민이 과학기술 정책에 대해 개입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에도 부합한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황우석이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받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생물학에 관심을 갖고 정보를 습득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황우석 개인에 대해, 그의 믿을 수 없는 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것은 과학기술이 사회와는 관계가 없는 독립적인 영역이라는 신화와 과학기술이 우리에게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시켜줄 수 있을 것이라는 허황된 기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책의 제목처럼 과학기술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했기에 읽기에 부담이 없는 이 책으로 과학기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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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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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에세이라는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다. 에세이가 가지는 문학적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조건 팔리는 책만을 만드는 한국의 출판계에서 깊이 있는 에세이가 출간되는 일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나에게 에세이란 '깊이 있는 독서를 제대로 하기는 싫은데 책 읽는 것이 좋다고 하니까 한번 읽어보는 만만한 책'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저자에 대한 믿음과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쁘리모 레비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에세이에 대한 나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 책 한권으로 에세이에 대한 불신은 산산이 깨어졌다. 에세이는 깊이 없는 책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떤 책보다도 저자의 사고와 체험이 녹아 들 수 있는 장르라는 확신이 서게 되었다. 

저자는 유대인에 대한 절멸정책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쁘리모 레비'의 무덤 앞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인간에 대한 믿을 수 없는 폭력을 겪고 살아남아 그것을 온몸으로 증명하고자 했던 쁘리모 레비. 하지만 그는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무엇이 폭력과 광기가 끝났다고 여겨지던 시대에 그를 자살로 몰고갔을까.

저자는 그에 답을 찾기 위해 쁘리모 레비의 인생을 되집는다. 쁘리모 레비의 유년 시절, 수용소 시절, 자유의 몸이 된 이후의 삶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파시즘이라는 광기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다. 저자는 쁘리모 레비의 입을 통해 질문한다. 과연 그것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의 질문은 파시즘의 광기를 경고하는 동시에 그런 일이 우리 주위에서도 벌어졌고, 벌어지고 있음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저자의 형제들이었던 서승, 서준식 두 사람의 고통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과연 파시즘의 광기와 인간에 대한 폭력은 아우슈비츠에만 있었던 것일까. 파시즘과 정치적 동맹을 형성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은 물론이고 파시즘의 광기는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엄청난 폭력을 휘둘렀던 대한민국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저자의 외침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저자와 저자의 가족이 겪었던 그런 경험이 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쁘리모 레비가 주는 경고의 무게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비판한다. 죽어가는 증인들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불길한 징조에 최대한 민감하게 반응해 방죽이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하는 한, 홍수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은 당연히 파시즘에 대한 엄중한 비판인 동시에, 우리 주위에 도사리고 있는 언제나 현실화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파시즘에 대한 경고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철저한 성찰의 결과이다. 2006년을 마무리할 최고의 책으로 조금의 손색도 없다. 

* 지금 이 책의 Aladdin 판매지수는 [3430]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호아킴 데 포사다의 『피라니아 이야기』의 판매지수는 [75065]이다. 이것이 현실인가. 쁘리모 레비는 결국 자신이 죽음과 싸워가며 말하려고 했던 바를 대중들이 점점 더 듣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극한의 순간에도 놓지 않았던 생명의 끈을 놓아버린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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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사 4 - 386세대에서 한미FTA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4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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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학문일까. 먼저 역사는 모든 학문에 있어 자신들의 뿌리와 발전을 연구할 수 있는 통찰력을 제시한다. 과학의 발전을 연구하는 과학사의 영역 등 역사적인 통찰은 모든 학문에 있어 필수적인 연구방법이다. 하지만 역사학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는다. 학문적 필요성을 넘어 인간이 걸어온 길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과거가 긍정적이었건, 부정적이었건 우리는 그것을 연구하고 밝혀야한다. 그것은 비단 지나온 길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과거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가치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라는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史>는 이러한 역사학의 의의에 상당히 부합한다. 그의 글은 결코 어렵지 않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쓴다. 하지만 깊이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알아야 하는 것, 느껴야 하는 것을 냉철하게 파헤친다. 그는 역사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국 역사를 통해 지금 우리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독자는 그의 글을 읽고 왜곡된 우리의 역사를 바라보게 되고, 그러한 왜곡이 가져온 일그러진 현재를 마주하게 된다. 특히 이번에 출간된 4권은 비교적 최근의 일을 다루고 있기에 더욱 지금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근대 국민국가의 가장 일차적인 목적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이 될 것이다. 최소국가를 주장했던 자유주의 사상가들도 국가의 역할에서 그것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국가의 권한을 바로 '주권'이라고 한다. 저자는 먼저 한국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미국과의 사이에서 과연 한국은 '주권'을 가지고 있는가 묻는다. 전쟁 중의 상황이라고 하지만 무고한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사건의 진상까지 왜곡하는 미국에게 대항하지 못하는 한국은 과연 주권국가인가. 주권의 상실은 비단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광주 항쟁을 계기로 불타오른 反美의 영향도 잃어버린 주권을 찾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미국과의 FTA를 개방이라고 찬양하는 주장에 대해 홍선대원군과 광해군의 사례를 들어 반박하는 저자는 FTA의 체결은 경제적인 영역에서도 우리의 주권이 작동하지 않는 결과라고 비판한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들에 대해 한국국적을 가진 '제국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한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전략적 유연성 문제나 한미자유무역협정 문제를 보면 한국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들 제국인이다. 한국 이름을 갖고, 한국에서 대학 나오고, 한국에서 한국인 부인과 살고 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국익은 한국의 국익이 아니라 제국의 이익이다. 내선일체를 꿈꾸던 옛날 일본 제국주의자들이나 친일파조차도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일체감을 제국은 이미 이루고 있다. - p. 36  

'주권'의 문제가 국가의 성립이유라면,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국가가 가장 우선시해야할 목표일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저자는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탄생과 함께해 지금까지 목숨을 유지하는 있는 '국가보안법'때문이다. 저자는 국가보안법 때문에 피해를 본 다양한 사례를 언급한다. 독재정권에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언행을 하면 국가보안법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학문의 영역에서도 국가보안법은 맹위를 떨쳤다. 제대로 된 현대사 연구도 할 수 없었고 비판적인 학문성과도 내놓을 수 없었다. 저자는 국가보안법과는 별 상관이 없어보이는 황우석 사태를 통해 국가보안법의 본질을 밝힌다. 과학이라는 것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한 사람의 스타 과학자에 대한 의심없는 충성이 황우석 사태의 본질이듯이, 합리적 의심을 철저히 가로막는 폭력이 바로 국가보안법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역사는 필연적으로 기억의 문제를 수반하게 된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망각하고 기억하는지는 모두 그 사회가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은 지금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고백을 거부하고 자신을 미화하는 사람들은 명예와 부를 이어나가고 고백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여야 할 사람들은 두려워서 숨어사는 사회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역사를 청산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나 잊고 싶은 과거가 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와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은 사실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가해자의 고통이 피해자가 당한 고통보다 크지는 않다. 지금 고백이 필요한 정말 중요한 이유는 고백이 치료약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고통에 허덕이며 살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당신이 하는 고백은 상처받은 그들의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다. 억만금을 보상으로 준다고 해도 치유될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가해자의 고백으로 치유될 수 있다. 그리고 피해자와 국가를 향한 고백은 비록 당장은 고통스럽겠지만, 가해자와 그 후손들이 고백 없이 이름이 밝혀질 때 입을 상처를 막아주는 예방약이 될 것이다. - p. 172    

역사는 결국 인간이 만들지만, 또 역사는 인간에게 엄청난 상처 또는 명예를 안겨주기도 한다. 그렇기에 스스로 역사를 만들고 그러한 역사에 의해 상처받은 개인을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통혁당 사건으로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신영복 선생은 한국의 일그러진 현대사를 온몸으로 이겨낸 증인이다. 저자는 그의 삶을 통해 통혁당 사건의 진실을 전한다. 원폭으로 인한 질병으로 세상을 떠난 원폭2시대 김형률의 삶은 세계2차 대전이라는 광기가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처절히 보여준다. 우리는 보통 역사를 살펴볼 때 개인을 잊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의 삶을 통해 결국 잘못된 역사는 개인의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과거의 전사들이었지만 지금은 기득권을 가진 386정치인들에 대해서는 비판이 이어진다. 저자는 그들에게 철들지 않을 것을 주문하며, 그들이 정의를 위해 싸웠던 과거를 잊지 말라고  경고한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역사가 왜곡되어서 지금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건들을 파헤친다. '초원복집'사건을 계기로 자신들이 가진 것을 조금도 내놓지 않으려는 기득권 세력과 좀 더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려는 시민들의 헤게모니 투쟁을 살펴보고, 박정희 정권 시절에 만들어진 사학에 대한 규제를, 박정희의 정치적 자산을 계승한 박근혜는 그 어떠한 규제도 사학에 대한 침해라고 주장하고 있는 아이러니를 비웃는다. 저자가 항상 주목하는 주제인 군대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전쟁 중이 아님에도 수백 명의 군인들이 죽어나가는 지금의 군대는 근본적인 개혁을 필요로 한다며, 군대 개혁의 핵심이 되는 감군의 문제를 거론한다. 군대문제는 단순히 군대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민주화와 평화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인 것이다.

<대한민국史>는 대중적인 역사교양서를 지향하고 있는 만큼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이나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사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인식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왜곡된 역사에 대해 알리고, 그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는 방법을 제시하는 <대한민국史>는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세상을 향한 결코 작지 않은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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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탄생 (2disc) - 아웃케이스 없음
김태용 감독, 문소리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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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인라는게 무엇일까. 한국의 '정상'적인 가족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혈연으로 이어진 부모와 자식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입양 등을 통해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부모와 자식이라는 구도에는 다름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런 가족의 개념을 모든 가족에 적용하다보면 그렇지 않은 가족에 대한 배제가 불가피하게 된다. 부모중 한쪽이 없는 가족에 대해서는 '결손'이라는 표현을 쓰게되고,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다양한 가족 형태들에 대해서는 가족이라는 말 자체를 허용하지 않게 된다. 
  
가족이라는 것은 결코 연원불변한 개념이 아니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나가기 시작할 때 생존에 유리한 방법으로 사회의 최소 단위를 만들었고 그것이 사호적 변화를 거쳐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의 모습이 된 것이다. 그런데 사회는 또다시 변화를 거듭해 이제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는 새로운 가족의 모습이 생겨나고 있다. '가족의 탄생'인 것이다.
 
영화 <가족의 탄생>은 이런 새로운 모습의 가족을 그리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인 가족을 꾸리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새로운 모습을 가족을 받아들인다. 동생이 데려온 나이 많은 부인(무신)이 언니가 되고, 무신의 전남편이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찾아와 모두의 딸이 된다. 또 다른 경우, 평생 바람을 피워 자신에게 피해만 주던 엄마가 갑자기 죽자 그렇게 미워하던 엄마가 낳은 아들을 동생으로 받아들인다.
 
영화의 구성도 상당이 흥미를 끈다. 상관이 없어 보이는 3가지 상황이 옴니버스식으로 펼쳐지지만 결국 그들의 영화의 말미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다. 그들은 혈연관계도 아니고,그렇다고 부모자식관계는 더더욱 아니지만 함께 김장을 담그는 모습에서 어느 가족 보다도 끈끈한 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가족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가족이라는 것은 새롭게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그 누구보다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정의는 어떨까.
 
영화<가족의 탄생>은 새로운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한다. 물론 배우들의 연기나 영화적 재미도 뛰어나다.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는 연말에 한번쯤 보는것이 좋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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