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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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에세이라는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다. 에세이가 가지는 문학적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조건 팔리는 책만을 만드는 한국의 출판계에서 깊이 있는 에세이가 출간되는 일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나에게 에세이란 '깊이 있는 독서를 제대로 하기는 싫은데 책 읽는 것이 좋다고 하니까 한번 읽어보는 만만한 책'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저자에 대한 믿음과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쁘리모 레비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에세이에 대한 나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 책 한권으로 에세이에 대한 불신은 산산이 깨어졌다. 에세이는 깊이 없는 책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떤 책보다도 저자의 사고와 체험이 녹아 들 수 있는 장르라는 확신이 서게 되었다. 

저자는 유대인에 대한 절멸정책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쁘리모 레비'의 무덤 앞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인간에 대한 믿을 수 없는 폭력을 겪고 살아남아 그것을 온몸으로 증명하고자 했던 쁘리모 레비. 하지만 그는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무엇이 폭력과 광기가 끝났다고 여겨지던 시대에 그를 자살로 몰고갔을까.

저자는 그에 답을 찾기 위해 쁘리모 레비의 인생을 되집는다. 쁘리모 레비의 유년 시절, 수용소 시절, 자유의 몸이 된 이후의 삶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파시즘이라는 광기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다. 저자는 쁘리모 레비의 입을 통해 질문한다. 과연 그것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의 질문은 파시즘의 광기를 경고하는 동시에 그런 일이 우리 주위에서도 벌어졌고, 벌어지고 있음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저자의 형제들이었던 서승, 서준식 두 사람의 고통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과연 파시즘의 광기와 인간에 대한 폭력은 아우슈비츠에만 있었던 것일까. 파시즘과 정치적 동맹을 형성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은 물론이고 파시즘의 광기는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엄청난 폭력을 휘둘렀던 대한민국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저자의 외침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저자와 저자의 가족이 겪었던 그런 경험이 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쁘리모 레비가 주는 경고의 무게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비판한다. 죽어가는 증인들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불길한 징조에 최대한 민감하게 반응해 방죽이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하는 한, 홍수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은 당연히 파시즘에 대한 엄중한 비판인 동시에, 우리 주위에 도사리고 있는 언제나 현실화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파시즘에 대한 경고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철저한 성찰의 결과이다. 2006년을 마무리할 최고의 책으로 조금의 손색도 없다. 

* 지금 이 책의 Aladdin 판매지수는 [3430]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호아킴 데 포사다의 『피라니아 이야기』의 판매지수는 [75065]이다. 이것이 현실인가. 쁘리모 레비는 결국 자신이 죽음과 싸워가며 말하려고 했던 바를 대중들이 점점 더 듣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극한의 순간에도 놓지 않았던 생명의 끈을 놓아버린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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